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푸른 피의 에이스 배영수 선수입니다~!
김상엽, 김진웅에 이어 전 삼성 라이온즈의 우완 강속구 투수 계보를 이은 에이스 선발 투수이자 전통 프랜차이즈 스타였습니다.
대구 출신으로 칠성초등학교와 경복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학년 때 이미 최고 구속 147 km/h의 공을 뿌렸지만, 경북고등학교 3학년 때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했습니다. 이에 언론에서는 삼성 라이온즈가 당시 대구상고의 우승을 이끈 투수 장준관을 지명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예상을 깨고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그를 1차 지명하였으며, 1999년 11월 팀 고졸 신인 역대 최고 계약금인 2억 5,000만원에 입단했습니다.
2001 시즌
2001년 2년차에 13승을 거두며 마운드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2002 시즌
2002년 6승으로 주춤하였으나,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여 우승하였습니다.
2003 시즌
2003년 다시 13승을 거두며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2004 시즌
삼성 라이온즈가 선동열을 수석 코치로 영입한 2004년에는 17승 2패,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다승 및 승률 1위를 기록하며, 선발 투수로는 14년 만에 정규 리그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팀 타율 1위 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10이닝동안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지만 타선이 무득점에 그쳤고, 연장 11회에 권오준으로 교체되어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2005 시즌
개막전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무사사구 완봉승을 거두며 쾌조의 스타트로 전반기에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7월에 왼쪽 발목을 다친 이후로 하락세를 보이며 전년도보다 좋지 않은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3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했고, 147탈삼진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고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팀의 정규 시즌 1위 등극에 기여했습니다.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는 6 ⅓이닝 무실점으로 승리의 밑거름을 만들었습니다.
2006 시즌
유독 부족한 타선 지원과, 불펜진 난조로 인해 8승 9패에 그쳤지만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2000년대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들 중 유일하게 3년 연속 2점대 방어율을 달성하였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팔꿈치 부상을 안고도 선발과 계투를 오가며 활약하며 2승, 1세이브, 1홀드를 기록했습니다.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선동열의 권유로 데포메드롤이라는 강한 진통제를 맞으며 경기를 해야 했습니다. 상태가 안 좋았으나 151 km/h의 직구를 던졌습니다. 삼성 라이온즈를 우승으로 이끌만큼 대단한 활약을 펼쳤으나 진통제를 다량으로 복용하며 투혼을 보여 그의 팔꿈치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선수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습니다. 시즌이 끝난 뒤 그는 11월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2007년 1월 27일 LA 컬란조브 외과 병원에서 오른쪽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 이른바 "토미 존 서저리"를 받았습니다. 팔꿈치 수술로 인한 재활 훈련으로 2007 시즌에는 단 1경기에도 출전할 수 없었습니다. 팔꿈치 수술 전 직구 최고 구속은 2006년 8월 2일 SK 와이번스전에서 기록한 155 km/h이고 슬라이더는 144 km/h였습니다. 수술 전 정규 시즌 직구 평균 구속이 145 km/h였습니다.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 이후 그의 구위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토미 존 서저리 수술 이후 회복 속도는 다른 선수들보다 상대적으로 빨랐습니다. 보통 2년 후에 복귀하지만 그는 재활 1년만에 마운드에 복귀했습니다.
2008 시즌
시범 경기에는 최고 구속 146km까지 던졌지만, 2008 시즌이 가면 갈수록 직구의 구위는 좋지 않았습니다. 시즌 중반기 최고 구속은 138km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주 무기인 슬라이더와 변화구로 맞춰 잡는 피칭으로 시즌 컨디션이 최상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직구 평균 구속 138~140km를 회복했고 최고 구속은 145km를 기록했습니다. 수술 복귀 후 첫 시즌 9승을 달성하여 토미 존 수술 1년차로 믿기지 않는 회복 속도를 보였습니다.
2009 시즌
전문가와 야구 팬들의 예상 및 기대와는 달리 1승 12패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너무 빠른 복귀로 인해 수술 부위에 무리가 갔고, 구속은 140km도 나오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2010 시즌
2010년 FA 자격을 얻자 일본 프로 야구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2년간 최대 1억 7,000만엔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며, 입단 테스트까지 성공적이었지만 메디컬 테스트 결과 간 수치 문제로 부적격 판정을 받아 계약이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삼성 라이온즈와 2년 간 계약금 6억, 연봉 2억, 옵션 3억에 계약하여 잔류했습니다. 4월 7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선발 승을 거두었으나, 6승 8패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두산 베어스와의 포스트시즌 4차전에서 1 ⅓이닝동안 무피안타, 무실점 투구로 1점차 세이브를 기록하며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2011 시즌
시즌 초반에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시즌이 지날수록 구위가 저하되어 결국 6승 8패의 저조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2012 시즌
지난 3시즌 간 부진했던 그는 2012년 용병 미치 탤벗과 브라이언 고든을 선발 투수로 영입으로 선발 투수로서의 입지가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며 스프링캠프 때 일본에 다른 선수들보다 더 오래 남아 훈련하며 시즌을 대비하였습니다. 결국 시범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5선발로 낙점됐습니다. 4월 14일 첫 선발 등판 경기였던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면서 좋은 출발을 하였으며, 8월 19일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2012년 시즌 첫 번째 전 구단 상대 승리 투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8월 26일 LG 트윈스전 오지환을 상대로 역대 25번째 1000탈삼진을 기록했으며, 이날 7이닝 무실점 승리 투수가 되어 역대 23번째 100승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12년만의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였습니다. 9월 26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자신의 최다 투구수인 140구를 던지며 9이닝 6탈삼진, 3실점으로 역투했으나, 상대 투수였던 윤석민의 완봉으로 인해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특유의 맞춰 잡는 피칭과 위기 관리 능력으로 2번의 완투를 하는 등 긴 이닝을 소화하였습니다. 마지막 등판 경기인 10월 2일 LG 트윈스전을 8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시즌 12승을 거두면서 정규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완급 조절과 뛰어난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투구로 12승 8패,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고 수술 이후 첫 3점대 평균 자책점과 두 자릿 수 승리를 거두며 부활하였습니다. 가을에 특히 강했던 그는 2012년 10월 28일 한국시리즈 3차전 선발로 등판하였으나 3이닝 3실점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우승 이후 아시아 시리즈 1차전인 라미고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였으나, 타선이 무득점에 그쳐 패전 투수가 되었습니다.
2013 시즌
5년 만에 두산 베어스와의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되었으나, 만루 홈런을 두 번이나 허용하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경기인 NC 다이노스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습니다. 특히 8월 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6⅔이닝 3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며 김시진의 삼성 시절 투수 통산 최다 승 기록을 경신하였습니다.
또한 9월 7일 LG 트윈스를 상대로 5이닝 무실점으로 선발 승을 거둬 팀의 1위를 지켜냈으며, 9구단 체제 도입 이후 최초이자 이 시즌의 유일한 전 구단 상대 승리 투수가 되었습니다.
전년도에 비해 컨디션이 들쭉날쭉한 모습을 많이 보였으나, 타선의 활약과 특유의 노련함으로 크리스 세든과 함께 14승을 거두며 2004 시즌 이후 9년 만에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하였습니다. 2013년 10월 28일 한국시리즈 4차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으나 1⅓이닝 2실점으로 강판되었고, 타선이 1득점에 그쳐 패전 투수가 되었습니다.
2014년 12월 3일 타 구단 협상 마지막 날에 당시 감독이었던 김성근의 부름으로, 계약기간 3년, 총 21억 5,000만원에 FA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2015 시즌
시즌 전 기대와는 달리 정규 시즌에 선발 투수로써 불안감을 노출하며 4승 11패, 7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였습니다.
2016 시즌
2016년 8월 1일 KIA 타이거즈전에 1군 엔트리에 등록되었으나, 부상으로 하루 만에 2군으로 내려갔습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국가대표팀 선수로 참가했습니다.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사토자키 도모야를 상대로 슬라이더를 이용해 3구 삼진을 잡으면서 호투했습니다. 당시 직구 구속이 143 km/h 정도로 약간 느린 구속으로 직구로 일본 타자들을 압도하지는 못했지만 특유의 자신감으로 일본 타자들을 아웃시켰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는 투구 밸런스를 제대로 잡지 못해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회로 병역을 해결했습니다.
2001년 9월 18일 롯데전에서 당시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던 펠릭스 호세가 연이은 위협구에 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습니다. 펠릭스 호세는 이로 인해 잔여 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다음 날 1군에서 말소됐습니다. 펠릭스 호세는 2002년 시즌 직전 이중 계약 파문으로 한국 무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펠릭스 호세가 한국 무대를 떠난 이후 그는 2002년 6월 23일 경기를 시작으로 2005년 8월 31일 경기까지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14연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개인 투수 특정 팀 상대 최다 연승 공동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2006년 4월 8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6.2이닝 4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면서 대 롯데 자이언츠전 14연승을 마감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은 펠릭스 호세의 한국 무대 복귀전이였습니다.
2013년 3월 30일 시즌 개막전에 선발 투수로 나와 두산 베어스의 오재원, 김현수에게 각각 만루 홈런을 맞았습니다.
2014년 5월 30일에 경북대학교의 첫 명예 홍보대사에 위촉되었습니다.
2017년 4월 27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보크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7월 17일, 8월 20일 등 유독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부정 투구 행위가 잦았고, kt 위즈전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도 부정 투구 행위가 발각되는 등 프로 선수 답지 못한 행동을 보여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결국 2017년 8월 22일에 KBO로부터 로진을 옷에 묻히는 행위가 부정 투구라고 판정됐고 추후 이 부분이 또 발각되면 징계를 내린다고 해 네티즌들로부터 그 동안의 부정 투구는 봐 주는 것이냐며 비난을 받았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별명은 푸른 피의 에이스였고, '개막전에 만루 홈런 두 방 맞은 투수'의 줄임말인 '개만두', '한 경기에 만루 홈런 두 방 맞은 투수'의 줄임말인 '한만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스즈키 이치로가 '30년 망언'을 해 그가 스즈키 이치로의 둔부에 빈 볼을 던진 이후로 '배열사'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대구칠성초등학교
경복중학교
경북고등학교
다승왕 : 2회 - 2004, 2013
탈삼진왕 : 1회 - 2005
승률왕 : 1회 - 2004
MVP : 1회 - 2004
골든 글러브 : 1회 - 2004
2000년
4월 9일: 잠실 LG전, 프로 첫 등판
5월 14일: 대구 LG전, 프로 첫 선발 등판
2004년
10월 25일: 한국시리즈 4차전 10이닝 노히트 노런
2005년
4월 2일: 대구 롯데전, 개막전 무사사구 완봉승
2006년
10월 21일: 한국시리즈 첫 선발승
2012년
8월 26일: 잠실 LG전, 통산 100승, 1000탈삼진
이상 배영수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