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팀은 한화 이글스입니다!
한화 이글스는 대전광역시와 충청도를 연고지로 하는 한국야구위원회 소속 프로야구 팀입니. 홈 구장은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의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이죠. 제2홈구장은 충청북도 청주시 청주야구장이고, 2군 홈구장은 충청남도 서산시 서산야구장이에요. 현재와 같은 지역을 연고지로 1986년 3월 8일 빙그레 이글스란 이름으로 창단되었습니다. 1993년 11월 1일 구단 이름을 한화 이글스로 변경하였습니다.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창단 이래 처음으로 우승하였습니다. 한화그룹의 기반 업종을 본뜬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2013년 현재 한국프로야구 사상 영구 결번 선수를 가장 많이 지정한 구단이죠.
1982년 한국 프로 야구 출범 당시 대전·충청권을 연고지로 한 OB 베어스는 1984년 시즌을 마치고 연고지를 서울특별시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는 한국야구위원회와 OB 구단 사이에 프로 야구 출범 당시부터 3년 후 연고지를 서울특별시로 이전하겠다는 사전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죠.
1985년 한국 프로 야구 리그 참가를 희망한 한화그룹에서 1월 15일 창단 준비 위원회를 발족시킵니다. 다음 날인 1월 16일 한국 야구 위원회로부터 제 7구단으로 승인받게 되고 3월 11일 '(주)빙그레 이글스 야구단'이 설립된다. 그 해에는 2군 리그에 참가하였습니다.
1986년 3월 8일과 9일, 대전과 청주에서 빙그레 이글스 창단식을 개최하게 됩니다. 그 해 처음으로 1군 리그에 참가하였지만 신생 구단의 한계와 얕은 선수 층으로 리그 7위를 기록합니다.
1988년에 3년 계약 기간이 만료된 배성서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김영덕 감독을 영입하여 정규 시즌을 2위로 마감한 빙그레 이글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3전 전승으로 물리치고 창단 이래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됩니다. 정규 리그 1위 팀 해태 타이거즈와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내리 3경기를 지게 됩니다. 그 후 2경기를 잡고 분위기를 타는 듯 했으나, 결국 6차전에서 져서 2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물게 됩니다.
창단 4년만에 빙그레 이글스는 6할의 승률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 우승을 하게 됩니다.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태평양 돌핀스가 삼성 라이온즈를 이기고 올라왔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태평양을 잡았습니다. 1988년에 이어 또 다시 빙그레 이글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만났습니다. 1차전에서는 빙그레가 에이스 이상군 선수의 호투로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내리 4경기를 모두 져서,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물게 됩니다.
빙그레 이글스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했습니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2패를 당하여, 포스트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정규리그 4위였던 삼성이 빙그레, 해태를 연달아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빙그레는 최종 순위 4위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빙그레 이글스는 정규 시즌 2위에 올랐습니다. 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올라온 삼성 라이온즈와 플레이오프에서 만났습니다. 결과는 3승 1패로 빙그레 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우승팀인 해태 타이거즈와 3번째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단 한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4:0으로 져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빙그레 이글스는 투-타 및 팀 조직력이 완벽했습니다. 6할이 넘는 승률과 팀 홈런 146개를 기록하였으며, 신인 정민철 선수는 14승, 송진우 선수는 19승, 이상군 선수도 10승을 했고, 팀의 주축 거포 장종훈 선수는 무려 41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이정훈 선수는 타율 0.360라는 고타율을 기록하고 25개의 홈런을 날렸으며, 이강돈 선수도 0.320의 타율과 13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정규 시즌을 우승한 빙그레 이글스는 삼성과 해태를 꺾고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났습니다. 1차전과 2차전에서 패배한 빙그레는 3차전을 이겼지만, 롯데 염종석 선수의 활약으로 4차전도 지고 5차전에서도 패배하면서, 시리즈 전적 4:1로 롯데 자이언츠가 8년만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92년 정규시즌은 이글스 팬들에게는 아쉬운 해였습니다. 투-타 걸쳐서 완벽했던 시즌이였고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도 아니였고, 이번에는 우승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는 강했습니다. 이로써 빙그레의 4번째 한국시리즈 첫 우승 도전도 실패했습니다.
이 해 빙그레 이글스는 부진에 시달렸습니다. 주축 외야수 이정훈 선수가 부상을 당했고, 장종훈 선수도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었습니다. 베테랑 투수 한희민 선수는 김영덕 감독과 갈등을 빚어 삼성 라이온즈로 박철희 선수를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었고 다른 투수들은 부진했습니다. 이 시즌 동안은 프로 2년차를 맞이했던 투수 정민철 선수가 13승을 거두며 홀로 고군분투했습니다. 1993년에는 좌완 투수 구대성 선수가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해이기도 했지만 구대성 선수는 기대와 달리 프로 데뷔 첫 해에 부진했습니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부진했습니다. 정규 시즌 5위로 마감한 빙그레 이글스는 이제 더 이상 '빙그레'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즌 후 그 해 11월 9일 모그룹명을 팀명으로 쓰기로 하고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김영덕 감독도 계약 기간이 만료된 후 빙그레를 떠나게 되어 김영덕 감독의 퇴장과 함께 빙그레의 시대도 끝났습니다.
새롭게 구단명을 바꾸고 강병철 감독이 사령탑을 맡았지만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한화는 5년 동안 두 차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데 그쳤습니다. 1994년 길배진 선수, 1995년 신재웅 선수 등 1차 지명 선수가 거듭 실패하면서 세대교체 작업도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다행인 것은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향후 팀의 새로운 주축이 될 선수들을 대거 지명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해 한화는 신인 지명에서 이영우 선수, 송지만 선수, 김수연 선수, 임수민 선수, 이상열 선수, 심광호 선수, 홍원기 선수 등을 선택하며 세대교체의 물꼬를 트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중 임수민 선수, 이영우 선수, 송지만 선수는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였습니다. 여기에 마운드에서는 기존의 송진우 선수와 정민철 선수가 좌·우 에이스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데뷔 첫 해 실망스러웠던 투수 구대성 선수가 ‘대성불패’로 거듭났습니다.
강병철 감독이 성적 부진의 이유로 올스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98년 7월 9일에 경질당했습니다. 강병철 감독은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중 한대화 감독과 더불어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경질된 감독이죠. 북일고등학교 감독 출신 수석코치 이희수가 감독 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치렀고, 시즌 후 정식 감독이 되었습니다.
1999년부터 새로이 양대 리그가 출범함에 따라, 각 리그 1·2위 팀이 상대 리그의 1·2위와 교차로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매직 리그 2위인 한화 이글스는 드림 리그 1위인 두산 베어스를 맞이하여 4전 전승으로 1999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습니다. 드림 리그 2위인 롯데 자이언츠는 매직 리그 1위인 삼성 라이온즈와의 대결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3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습니다. 그 해 외국인 타자 댄 로마이어와 제이 데이비스가 힘을 보탰으며, 로마이어는 그 해 45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정민철 선수는 무려 18승을 기록했습니다.
모두 5차전을 벌인 결과 롯데 자이언츠를 4승 1패로 누르고 한화 이글스는 창단 1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였습니다. MVP는 구대성 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우승 다음 해인 2000년, 3할 타자 3명-20홈런 타자가 5명이나 되는 타선을 갖고도 시즌 7위로 추락했습니다. 1999년 18승을 기록한 에이스 정민철 선수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진출에 이어 전 해 14승을 거둔 이상목 선수가 부상으로 이탈하여 투수진도 부실해졌습니다. 시즌 후 이희수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했고, 다혈질의 댄 로마이어는 방출되었습니다. 시즌 후 구대성 선수도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했습니다.
갑작스런 구대성 선수의 공백에 한화는 2001년 내내 마무리 투수 부재에 시달렸고, 2002년에는 장종훈 선수가 역대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급격한 노쇠화를 보였습니다. 2001년 5할이 안 되는 승률로 4위에 올랐지만 준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습니다. 그 해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신인 내야수 김태균 선수가 신인왕을 차지했습니다. 2002년 7위를 기록한 후 이광환 감독은 경질되었습니다.
유승안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도 2003년 5위, 2004년 7위로 부진하였습니다. 2003년 시즌 후 프런트와의 마찰로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 외야수 송지만 선수를 잃게 되었습니다.
2004년 6월 25일 잠실 두산전에서 3:0으로 뒤지고 있던 8회. 1사 만루의 위기, 타자는 외야수 최경환 선수이었습니다. 안타 하나에도 2점이 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점수 차가 벌어지면 경기가 힘들어질 수 있겠다고 판단한 한화 이글스의 유승안 당시 감독은 무조건 내야 병살을 유도하기 위해 시프트를 지시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유승안 감독은 좌익수 이영우 선수를 내야로 불러들이는 내야 5인 수비망을 펼칩니다. 땅볼만 나왔다면 병살로 처리할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좌측으로 날아가는 2타점 적시타였습니다. 이영우 선수가 제 수비 위치에 있었다면 충분히 잡을수 있는 타구였지만 좌익수가 없는 바람에 1점을 막으려다가 도리어 2점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는 일명 유승안 시프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김인식 감독의 부임 첫 해로 정규 시즌 4위의 성적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준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와 맞붙어 3승 2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 3전 전패를 당해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습니다.
‘괴물 투수’ 류현진 선수의 등장은 놀라웠습니다. 인천 출신의 좌투수 류현진 선수는 한화 이글스의 2차 1순위 지명으로 입단하여 18승 6패 1세이브를 기록, 프로 데뷔 첫 해인 2006년 다승·평균 자책·탈삼진 1위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에 오르며 신인상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습니다. 그리고 문동환 선수도 16승 9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미국에서 복귀한 구대성 선수는 37세이브, 방어율 1.82로 한화의 뒷문을 걸어 잠궜습니다. 노장 투수들과 신인 투수의 완벽한 조화로 정규 시즌을 3위로 마감한 한화 이글스는 4위 팀인 KIA 타이거즈와 준 플레이오프에서 만났습니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정규리그 3·4위를 각각 기록한 한화 이글스와 KIA 타이거즈가 격돌하였습니다. 한화 이글스가 KIA 타이거즈에 2승 1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 정규 리그 2위인 현대 유니콘스에 1차전을 내주었지만, 남은 세 경기를 모두 이기면서 한화 이글스가 2006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한화 이글스는 1999년 이후 정상을 노렸지만 1승 1무 4패로 준우승하여 아쉽게 다음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이 해를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한화와 함께한 제이 데이비스가 떠났습니다.
제이콥 크루즈와 세드릭 바워스를 영입하면서 정규 시즌 3위의 성적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정규 시즌 4위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었습니다. 2승 1패로 삼성 라이온즈에게 2006년 한국시리즈 패배를 되갚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와 맞붙었으나 2005년에 이어 3전 전패의 성적으로 또 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습니다.
외야수 덕 클락과 좌투수 브래드 토머스를 영입하고 시즌 중반까지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시즌 중반을 지나 주전 선수들의 부진과 부상, 베이징 올림픽의 후유증 등으로 인하여 정규 시즌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습니다. 대신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핵심 투수 류현진 선수가 병역을 해결한 게 다행이었고, 소집 해제로 돌아온 투수 마정길 선수가 새로운 셋업맨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외야수 덕 클락이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고 넥센 히어로즈와 계약하여 이적했지만, 투수 브래드 토머스와 재계약하였고 우투우타 외야수인 빅터 디아즈를 영입하여 투타 강화를 꾀했습니다. 그러나 디아즈의 떨어지는 수비력과 효율성 없는 타격 능력 등을 고려하여 시즌 도중 빅터 디아즈를 방출하고 투수 에릭 연지를 영입하여 남은 시즌을 소화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한 팀 내 최고의 타자 김태균 선수가 4월까지 타율 4할을 넘기는 등 맹활약하였으나, 4월 26일 두산 베어스의 포수 최승환 선수와 홈 승부 도중 충돌하며 뇌진탕 증세를 보였고, 이후 페이스가 급락하며 팀의 타격을 책임지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 시즌에는 KIA 타이거즈에서 신종길 선수를 상대로 한 트레이드로 영입한 외야수 강동우 선수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여러 악재로 인하여 8위를 기록함으로써 1986년 빙그레 이글스 팀 창단 원년 이후로 최초로 최하위를 기록하는 불명예를 당하게 되고 암흑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한편 팀의 레전드 투수인 송진우 선수와 정민철 선수가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으며, 두 선수의 배번인 21번과 23번은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김인식 감독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물러났습니다. 시즌 후 내야수 이범호 선수와 김태균 선수가 FA를 선언하고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하였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한대화 감독이 계약이 만료된 김인식 감독의 후임 감독으로 전격 부임했습니다. 리빌딩을 주 목표로 했던 2010년에는 호세 카페얀과 훌리오 데폴라라는 2명의 우완 투수를 용병으로 영입했으나, 팀의 주축이던 내야수 김태균 선수는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범호 선수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하여 모두 해외 진출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한대화 감독은 고향 팀에 오자마자 폭탄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시즌 전 시범 경기 중 셋업맨 마정길 선수가 마일영 선수를 상대로 넥센 히어로즈에 현금 트레이드되었지만, 마일영 선수는 부상으로 인해 이적 후에도 부진했습니다. 팀의 투수진을 책임지고 있던 송진우 선수, 정민철 선수 등의 베테랑 투수들이 2009년 시즌 중 은퇴하는 바람에 유원상 선수, 김혁민 선수 등의 신인급 투수들이 팀의 선발진을 급하게 맡게 되어 에이스 류현진을 제외한 투수진이 괴멸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동우 선수와 김태완 선수 등 팀의 주전 타자들이 부진하여 성적이 암울한 전망을 나타내었으나 경찰청에서 제대한 우타 외야수 최진행 선수가 새로운 다이너마이트 주포로 거듭남으로써 큰 성과를 남겼습니다. 그 해 최진행 선수는 이대호 선수에 이어 홈런 2위를 기록하였습니다. 한대화 감독이 부임하자마자 두산 베어스의 유격수 이대수 선수를 투수 김창훈 선수와 조규수 선수의 2:1 트레이드로 영입하여 주전 유격수로 출전시켰고 같은 팀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된 내야수 정원석 선수를 2루수로 영입했습니다. 넥센 히어로즈에서 2009년에 방출된 외야수 전근표 선수도 팀에 합류했고 시즌 중 KIA 타이거즈의 1루수였던 장성호 선수를 안영명-김다원-박성호와 3:3 트레이드해 이동현-김경언과 함께 한화에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장성호 선수는 스프링 캠프 불참, 훈련 부족 및 부상 등의 이유로 형편없는 성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중 이동현 선수는 이듬해 시즌 중 방출당했고, 안영명 선수는 이범호 선수의 보상 선수로 이듬해 복귀했습니다. 호세 카페얀은 시즌 초반 기대를 모았으나 잦은 야수 실책과 적은 득점 지원으로 인해 승리를 기록하지 못하고 11패에 그쳐 시즌 중 방출되어 좌완 투수 프랜시슬리 부에노를 시즌 중 영입하게 됩니다. 팀의 주포의 부재와 류현진 선수를 제외한 투수진의 몰락으로 투타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2010년에도 2년 연속 8위를 기록하였으나 시즌 막판 안승민 선수 등의 신진 투수들과 김강 선수, 박노민 선수 등의 신인 타자들의 잦은 출전 기회 획득으로 인해 다음 시즌에 대한 더 나은 전망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좌투수 박정진 선수가 방출 직전에 한대화 감독에 의해 다시 중용되어 최고의 셋업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팀 리빌딩을 이유로 시즌 후 몇몇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FA를 선언한 포수 이도형 선수와 투수 최영필 선수와도 계약하지 않았습니다.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강타자 이영우 선수는 부진 끝에 결국 현역에서 은퇴했고, 마지막까지 레전드로 남았던 투수 구대성 선수도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2011년 한화 이글스는 리빌딩의 핵심 주전 타자인 김태완 선수, 송광민 선수, 정현석 선수 등이 병역을 이행하게 되어 전력이 더 약화되었습니다. 고동진 선수, 한상훈 선수, 오재필 선수, 정재원 선수, 정민혁 선수 등이 제대 및 소집 해제로 복귀했지만, 무게감이 떨어졌습니다. 2010년에는 선수 관리 부재로 시즌 중 내야수 송광민 선수의 현역 입대 영장 때문에 큰 혼선을 겪었습니다. 그 때 부상을 안고 있었던 송광민 선수는 훈련소에서 귀가 조치를 받은 후 수술을 받아 시즌을 마감한 후 이듬해 재검을 받고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는 등 큰 진통을 겪었습니다. FA를 선언하여 일본 소프트뱅크에 이적했다가 2011년 국내 복귀를 타진하였던 내야수 이범호 선수를 결국 놓치고 KIA 타이거즈에 빼앗기게 되면서, 3루수 딜레마와 동시에 프런트의 무능력한 구단 운영으로 이글스 팬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2011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한화 이글스는 4월 승률이 3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악의 부진을 겪어 2011년 최하위를 예상한 게 맞아 떨어 지는 듯했습니다. 핵심 투수 류현진 선수는 시즌 초 연패를 당해 크게 슬럼프에 빠졌고 이후 근육통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부진했습니다. 이에 코칭 스태프의 보직 변경이 있었고, 급기야 구단 운영진의 총 사퇴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외국인 투수 오넬리와 데폴라는 성적 부진으로 시즌 중 방출당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5월 12일 잠실 LG전에서 벌어진 조인성 선수와 전현태 선수의 홈 플레이트 충돌 사건 이후 한화는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이며 급격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투수진에선 김혁민 선수, 양훈 선수 등의 젊은 선발진이 각성하였고, 전년도에 부활한 셋업맨 박정진 선수가 뒷문을 맡아 무결점의 호투를 선보였으며, 프로 10년차의 잊혀진 언더핸드 유망주 투수 신주영 선수가 2군에서 올라와 평균 자책점 0점대의 호투를 이어갔습니다. 2010년 트레이드 이후 부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장성호 선수 역시 부상에서 복귀하여 전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맹타를 선보이자 전체적인 타선의 집중력도 급상승, 5월 이후 팀 득점권 타율이 3할을 넘기며 어떤 팀에게도 밀리지 않는 기세를 선보였습니다. 결국 5월 이후의 한화는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끈기있는 면모를 보이며 몇 차례의 기적적인 역전승을 포함, 5할여의 승률을 유지하며 순위를 6위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기대 이상의 리빌딩 솜씨를 보이고 있는 한대화 감독에게 '야왕'이라는 별명까지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6월에는 데폴라를 보내고 2010년까지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하였던 외야수 카림 가르시아를 영입하여 장성호 - 최진행 - 가르시아로 이어지는 꽤 짜임새 있는 중심 타선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가르시아는 복귀 후 2번째 시리즈전에서 2011년 6월 15일과 16일에 걸쳐 프로야구 통산 4번째 두 경기 연속 만루 홈런을 터뜨렸고, 팀은 14일 유격수 이대수 선수의 만루 홈런을 더하여 3일 연속 만루 홈런이라는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기며 다이너마이트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결정적일 때마다 패하여 하위권에서 맴돌았지만 새로 영입한 데니 바티스타와 카림 가르시아의 활약에 힘입어 LG 트윈스와의 공동 6위를 기록함으로써 2년만에 탈꼴찌에 성공하여 희망을 보였습니다. 이대수 선수가 그 해 골든 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수상하여 다시 한 번 "연습생 신화"를 썼고, 장종훈 선수 이후 21년만에 빙그레 시절을 통틀어 한화에서 유격수 골든 글러브 부문을 배출하였습니다. 그 해 시즌 후 스토브 리그에서 FA를 선언한 셋업맨 송신영 선수를 영입했고, 동일본 대지진과 허리 부상 등으로 일본 무대를 단념한 내야수 김태균 선수가 전격 복귀하였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그 투수 박찬호 선수는 계약금과 연봉을 전액 기부하면서 고향 팀 한화 이글스를 통해 한국 프로 야구 무대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2012년 한화 이글스는 김태균 선수와 송신영 선수, 박찬호 선수를 영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8위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에 대전야구장 증축 공사 완공이 6월로 늦어지면서 청주야구장을 계속 쓰게 되었고, 이는 경기력 저하로 이어졌습니다.
배스와 숀 헨은 기대 이하로 방출당했고, 많은 탈삼진에도 에이스 류현진 선수가 9승 9패로 부진했습니다. 올스타전을 반환점으로 한화는 달라지는 듯했습니다. 류현진 선수와 김혁민 선수의 호투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해서 전과 달라진 게임을 보여 줬고 그 후에 있던 주말 3연전에서 KIA를 상대해 선발로 올라간 바티스타와 장성호 선수 등의 활약에 힘입어 KIA를 상대로 스윕했습니다. 한화의 상승세는 멈추지 않았고 LG 트윈스를 맞아 첫 경기에서 패했지만 그 후 위닝 시리즈를 거두었고 김태균 선수는 타율 4할권에 진입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그 해 타격왕에 올랐습니다. 또한 SK 와이번스를 상대해 승리하며 3연승으로 7위 LG를 바짝 추격했지만 SK 와이번스에게 위닝 시리즈를 내주고 두산 베어스를 상대해서는 3연패로 다시 후반기에 하락세로 치닫았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팀을 상대하여 상당히 악화된 성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결국 8월 28일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었습니다. 한용덕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고 그 후 한화 이글스는 나아진 경기 플레이를 보여 주는 듯했지만 얇은 선수층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다시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시즌 후 류현진 선수가 포스팅에 입찰하여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한용덕 감독대행은 사의를 표명한 이후 류현진 선수가 이적한 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습니다. 박찬호 선수는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FA로 부진하였던 송신영 선수는 NC 다이노스의 전력 보강 선수로 이적했습니다. 또한 2012년 시즌 이후에 팀의 베테랑이었던 장성호 선수와 롯데가 선발한 신인 투수 송창현 선수를 트레이드하였습니다. 김응룡 감독이 새로 선임되어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시즌 후 김태완 선수와 정현석 선수가 군 복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김응룡 감독의 영입과 류현진 선수를 LA다저스로 이적시키면서 280억원이라는 거금을 입수함에 따라 FA 영입 등을 포함한 대대적인 리빌딩을 통한 김응룡 체제가 기대되었으나, FA 영입에 완전히 실패함에 따라 초반부터 불안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불안함은 2013년 시즌 초부터 바로 표면에 드러났습니다. 시즌 개막 이후 14연패를 기록하여 종전의 기록을 경신하였으며, 3할 이상을 회복하지 못하는 승률로 인해 일찌감치 4강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 상황에 처했습니다. 2013년 8월 10일자로 팀 타율은 0.264로 리그 5위, 팀 장타율과 팀 총득점은 각각 0.347과 320점으로 리그 최하위에 위치하는 등 기존의 '거포 타선' 이미지가 사라졌으며 병살은 96개로 타 구단에 비해 월등히 높은 상황이죠. 한편 팀 사사구는 434개로 두산 다음으로 많았으며, 방어율은 5.56으로 역시 리그 최하위를 달리고 있어 투타 양면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노출되었습니다.
또한 김응룡 감독의 파격적인 선수 운용에 대한 논란도 일고 있습니다. 2013년 4월 12일부터 2013년 4월 14일 간의 LG 3연전에서 격일로 김혁민 선수를 선발투수로 기용하였으며, 송창식 선수를 마무리로 활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에 등판시키거나 세이브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도 등판시키고, 유창식 선수의 경우, 4월 26일부터 5월 4일까지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여섯 차례 등판시키는 등 일반적이지 않은 투수 운용으로 인해 팬들로부터 투수를 혹사시킨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유창식 선수의 경우, 이 시기 이후에 2군으로 보내진 이후 복귀하지 않고 있어 혹사 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유창식 선수의 경우와 같이 선발과 계투의 경계를 허물고 전날의 선발투수를 계투로 기용하거나 전날 계투로 등판한 투수를 다음날에 선발로 등판하는 등의 기용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화 선발투수 가운데 유일하게 불펜을 겸하지 않은 투수는 바티스타뿐이며, 바티스타마저도 무리한 등판으로 인해 구속이 떨어지는 데드암 증상을 보이고 있어 투수 혹사로 인한 전력 악화 문제가 심해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또한 좀처럼 있기 어려운 실수들과 기행들로 인해 이슈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2013년 6월 26일에 있었던 삼성과의 경기에서는 선발 오더에 등록되지 않은 윤근영 선수를 마운드에 올렸다가 부정투수라는 삼성의 항의로 투수가 바뀌는 웃지못할 일도 일어났습니다. 7월 13일에 역시 삼성과 치룬 경기에서는 1루와 외야수를 겸하는 김태완 선수가 대타로 들어왔다가 3루 수비를 보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김태완 선수가 1루 글러브를 들고 경기장에 나왔다가 규정 위반이라는 심판의 지적에 따라 글러브를 교체하고 3루 수비를 했습니다. 이 이후에 2개의 땅볼타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며 2점을 더 주며 이날 경기를 6-2로 패배하였습니다. 한편 김응룡 감독은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지면 덕아웃을 비우는 일도 종종 있어 팬들로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이상 한화 이글스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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