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축구선수 조원희
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폭주기관차 조원희 선수입니다~!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논현초등학교,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엄청난 활동량과 투쟁심, 성실함으로 팀의 살림꾼 역할을 자처하는 점이 젠나로 가투소와 닮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조투소'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종횡무진 공수를 오가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어 '폭주기관차'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에 가지 않고 2002년 연습생 신분으로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여 K-리그에 데뷔했으나, 그 해 리그에서 1경기를 뛰는데 그쳤습니다.
2003년 광주 상무 불사조에 입대하고 나서야 경기 출전 횟수를 계속 늘렸고, 2004년 12월 군복무를 마치고 울산 현대 호랑이에 복귀한 뒤 2005 시즌 전 곧바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였습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한 이후에는 주 포지션인 좌 · 우측 풀백 또는 2007년부터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활약하였고, 2008년 K-리그 우승, 2006년 K-리그 준우승 등에 공헌하였습니다.
2008년, AS 모나코의 훈련에 합류하여 입단이 성사되는 듯 했으나 모나코의 용병 쿼터가 모두 차있어 입단이 불발되고, 2년 6개월 계약 조건으로 2009년 2월 25일 위건 애슬레틱 FC로 이적하였습니다.
2009년 3월 28일 이라크와의 친선경기에서 종아리 부상을 입어 시즌 아웃 진단을 받았지만, 시즌 중 회복하여 2009년 5월 16일 2008-09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37라운드 스토크 시티 FC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2010년 1월, 주전 경쟁에서 밀려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하자 2010 남아공 월드컵 출전을 위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으로의 이적을 모색하다 친정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임대 이적하였습니다. 수원에서 1시즌 간 활약하여 위건으로 복귀한 직후 광저우 헝다로의 이적을 확정지었습니다. 광저우에서 주전으로 활약하였으나 2012년 광저우의 자금력을 앞세운 대대적인 보강에 밀려 팀을 떠날 것이라는 보도가 이어지기도 하였으나 중국 슈퍼리그에서 광저우를 위한 외국인 선수 제도를 신설하여 잔류에 성공하였습니다.
2014년 K리그 클래식 경남 FC로 임대 이적하였습니다. 임대된 조원희 선수는 입단 당시 본인 연봉의 상당 부분을 삭감하며 구단의 부담을 덜어준 대신 시즌 중 해외 진출 요청 시 구단이 이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2014년 7월 4일 J리그의 오미야 아르디자로 이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팀은 강등권에 밀려 있었고 조원희 선수의 몸상태 역시 완벽하지 않아 많은 경기를 뛰진 못했고 시즌 종료 후 반 년 만에 오미야를 떠났습니다.
2015년 2월 5일 서울 이랜드로 이적하였습니다. 서울 이랜드를 떠난 이후에 팬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필드에서 게임을 잘 조립해주는 조원희 선수의 이탈이 다음 시즌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과, 뛰지 않고 걷는 모습, 공격 템포를 늦추고 공을 오래 점유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 조원희 선수가 나가서 다행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2016년 1월 29일 6년 만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복귀하였습니다. 2018년 하반기에 들어서자 무섭게 폼이 수직하락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ACL 및 FA컵 탈락의 주원인 중 하나가 됐습니다. 2018년을 끝으로 FA 대상이 되었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2020년 7월 22일, 플레잉 코치로 수원 FC에 합류하면서 현역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출전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크게 평가할 구석은 없습니다. 2020시즌 종료 후 수원 FC에서 퇴단했습니다.
2005년 10월 12일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축구 국가대표팀에 취임한 뒤 치른 첫 경기인 이란과의 친선경기에서 데뷔하여, 경기 시작 59초만에 결승골을 넣어 1979년 이후 국가대표팀의 최단시간 득점을 기록하였습니다.
2006년 FIFA 월드컵에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지만 본선 경기에서 기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상으로 조원희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