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K의 ‘철벽’ ‘솔킬 머신’으로 불리며 활약한 ‘라스칼’ 김광희가 2024년 DRX에서의 활동을 끝으로 잠시 헤드셋을 벗는다. 1997년 10월생, 27세인 그는 내년 입대를 예정하고 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다시 선수 활동을 이어가는 게 현재로서는 첫 번째 계획이다. 13일 서울 영등포구 KT 롤스터 연습실에서 김광희를 만났다. 그는 요즘 KT의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있다. 김광희를 만나 그의 지난 프로게이머 인생을 처음부터 돌이켜보고 향후 계획에 대해서도 들어봤다.
우선 ①편에서는 그의 데뷔 과정과 젠지 ‘반지원정대’ 시절까지를 재조명해 본다.
평범한 자취생에서 프로게이머로
김광희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중퇴한 경쟁자들보다 시작이 늦었다. 그는 대학을 다녔다. 자취방 근처 PC방을 오가다가 솔로 랭크 챌린저 티어를 찍었다. 주변 지인으로부터 중국에서 프로게이머 생활을 해볼 의향이 있냐는 제안을 받았다. 팀 이름은 요원트(YW). 중국 3부 리그 팀이었다.
“그때는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에 큰 흥미가 없었다”라고 김광희는 말했다. 평생 또는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입단 테스트를 봤다. 팀에서는 월급으로 2만 위안(약 390만원)을 제안했다. 테스트를 생각 이상으로 잘 봤다. 역으로 팀에 3만 위안(약 590만원)을 제안했더니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대학 등록금은 벌겠구나 싶어서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2016년의 일이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프로게이머 생활은 생각보다 그의 적성에 잘 맞았다. “이전까지는 아르바이트하면서 남는 시간과 돈으로 게임을 했거든요. 여기서는 게임을 하면 돈도 주고 밥도 주고 잠도 재워준다고 하는 거예요. 처음으로 해본 합숙 생활도 너무 재밌었고요. 역설적으로 프로게이머 생활을 해본 뒤에 ’나는 프로게이머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즐거운 날들이었다. 팀원들과도 막역하게 지냈고 한중 통역을 도와줬던 사무국 직원과도 좋은 형, 동생 사이가 됐다. ‘엑스엑스(Xx)’ 슝 위룽과 ‘퍼프’ 딩 왕. 그때 3부 리그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들이 훗날 LPL에서 게임하는 걸 보면서 신기해하기도 했다.
YW와 계약을 마무리한 뒤 그의 꿈은 더 확고해졌다. 대학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본격적으로 프로게이머 데뷔를 준비했다. 다른 곳이 아닌 “꼭 한국 1부 리그에서 프로게이머로 활동하고 싶었어요. 그때는 한국이 LoL을 제일 잘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잘하는 선수들과 붙어야 내 실력도 늘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처럼 팀별로 아카데미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시기였다. 솔로 랭크 점수만 높지 프로 대회에서 보여준 게 없다시피 한 김광희에게 선뜻 손을 내민 LCK 팀은 없었다. 일본 라스칼 제스터에서 약 1달 동안 용병 생활을 하고 돌아온 그는 한국 e스포츠 협회가 주최한 LoL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썩 괜찮은 성적을 기록해 LCK 3개 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에버8 위너스, 아프리카 프릭스, 롱주 게이밍(現 DRX) 중에서 그는 롱주행을 택했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 훗날에는 라이벌이자 멘토가 되는 ‘칸’ 김동하와 한 팀에서 활동하고 싶어서였다.
김광희는 김동하와 포지션이 같은데도 함께 입단하길 원했다. 실제로 주전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보다 멋진 팀원들과 협동해서 얻는 즐거움이 더 컸다. “프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가 2017~2018 시즌이었어요. 그때처럼 순수하게 이기고 싶은 마음으로 게임을 열심히 했던 적도 없고. 팀원들 전부 성격이 유쾌했는데 실력까지 좋으니까 성적도 잘 나왔고요. 2018년에는 성적이 좋으니까 후보 선수인데도 제법 출전 기회를 많이 받았고 덕분에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었어요. 제게는 롱주가 정말 감사한 팀이에요.”
다만 스프링 시즌 우승으로 시작했던 2018년의 끝은 좋지 못했다. 서머 시즌 중반부터 주춤하더니 결국 월즈 진출에 실패했다. 성적이 떨어지니 끈끈하던 팀원들끼리의 사이도 서먹서먹해졌다. 김광희는 “옆에서 지켜보는데 속이 많이 상했다. 결국 팀이 와해되더라. 그때는 형들이 다른 팀으로 가는 걸 보고 울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2019년은 그가 본격적인 LCK 주전 탑라이너로 발돋움한 해였다. ‘커즈’ 문우찬, ‘폰’ 허원석, ‘내현’ 유내현, ‘데프트’ 김혁규, ‘투신’ 박종익과 한 팀이 됐다. “2018년에 ‘프레이’ (김)종인이 형, ‘고릴라’ (강)범현이 형, ‘피넛’ (한)왕호한테 배운 것이 정말 많았거든요. 2019년에 혁규 형, 종익이 형으로부터도 또 다른 걸 배웠어요. 배우는 만큼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니까 그만큼 재미도 있었죠.”
그는 넓은 챔피언 폭과 다양한 역할 수행으로 각광받았다. 스스로도 “팀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최대치로 수행했던 시즌이 2019년”이라고 평가한다. 덕분에 ‘밴픽 짬통’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김광희는 “바텀 듀오가 라인전이 정말 강했다. 바텀이 밴픽적으로 이득만 볼 수 있다면 탑에선 뭘 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불만이 전혀 없었다. 그냥 경기에서 이기니까 행복하기만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여름에 암초에 부딪혔다. 외풍(外風)이 선수단을 덮치면서 팀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성적이 수직하락했다. “전년도에 느꼈던 감정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2019년에도 위기를 맞았어요. 하지만 선수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막바지에 분위기를 환기시킨 것으로도 만족했어요. 월즈 선발전 최종전에서 담원 게이밍에 2대 3으로 졌는데요, 지금도 가끔씩 그때 동료 형들과 그 경기 얘기를 해요. 실력 차이가 많이 났는데 풀 세트까지 끌고 간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고….”
반지원정대에 합류하다
LCK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팀. 2020~2021년의 젠지. ‘반지원정대’로 불렸다. 김광희는 그 일원이 됐다. ‘클리드’ 김태민, ‘비디디’ 곽보성, ‘룰러’ 박재혁, ‘라이프’ 김정민과 함께. 우승 트로피를 얻진 못했지만 2년 동안 꾸준히 리그 최상위 팀 자리를 지켰다.
2019 시즌이 끝난 뒤 김광희는 LCK에서만 4개 이상의 오퍼를 받았다. 첫 주전 시즌에 좋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지만 관계자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연습량을 높게 평가했다. 김광희는 각 포지션에서 최고로 거론됐던 곽보성과 박재혁이 뭉친다는 데 매력을 느껴 젠지행을 택했다. “저는 2019년에 이 선수들만큼 많은 걸 보여주진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들과 같이 할 수 있다니 운이 좋구나, 많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반지원정대는 매 시즌 높은 곳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우승엔 실패했다. 유연함이 부족했다고 김광희는 복기했다. 그는 “2년 내내 우승 전력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연습부터 우리가 잘하는 것들만 했다. 대회와 실전의 차이를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실전은 연습보다 템포가 느리니까 밸류 높은 챔피언의 티어가 올라가지 않나. 당시에는 그런 것들을 간과했다”라고 덧붙였다.
그해 열린 MSC는 그가 게임론(論)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됐다. “중국 팀들이 스크림에서 강하진 않거든요. 그런데 대회에선 한국 팀들이 다 무너진 거예요. 중국 팀들이 왜 실전에서 더 강할까를 많이 고찰해 봤죠. 연습에서도 과감한데 실전에선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더 과감하게 하는 게 비결인 것 같았어요. ‘아, 이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 2020년 서머 시즌부터는 더 공격적으로 게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최소한 연습의 80%는 보여줘야 한다고.”
젠지는 서머 시즌을 3위로 마무리했다. 선발전을 통해 월즈에 진출했다. 김광희는 “당시에 담원이 ‘어나더 레벨’이라고 불렸지만 사실 나는 담원 상대로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만큼 젠지가 저력이 있는 팀이라고 생각했어요. 우승까지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8강에서 G2를 만나서 생각보다 허무하게 탈락했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부족함이 많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게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팀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 텐데. 조금만 더 경험이 쌓인 채였다면 G2를 잡았을 거 같아요. G2와 첫 세트에서 붙었을 땐 상대가 강하단 느낌을 못 받았거든요. 하던 대로만 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2세트, 3세트로 갈수록 상대가 운영을 잘하더라고요. 그리고 과감했어요. LCK 외의 팀들은 한·중 팀들과 맞붙으면 제 기량을 온전히 못 보여주는 경우가 많아요. G2는 그런 게 없었어요. 자신들을 믿는 듯 플레이하더라고요.”
반지원정대는 같은 멤버 그대로 2년 차를 맞았다. LCK 스프링 시즌 준우승, 서머 시즌 3위, 월즈 4강 진출. 거둔 성적은 준수했으나 속은 점점 곪았다. 김광희는 “팀이 똑같은 선수단으로 2년 이상을 보내기가 어려운 이유를 피부로 느꼈다”라고 말했다.
“선수라면 누구나 우승을 좇으니까요. 우승하지 못하면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요. 그리고 선수들이 처음 모인 팀은 큰 경기에서 지더라도 ‘우리가 다음엔 이걸 개선하면 되겠다’ ‘다음에 더 열심히 한다면 이길 수 있다’고 피드백을 하거든요. 그런데 2년 차에도 미끄러지면 ‘우리가 이걸 개선할 수 있을까?’가 되는 거죠. 열심히 안 했을까를 고민해 보면 그것도 아닌 거 같고… 어떻게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는 2021년 젠지의 부진을 미로에 비유했다. “열심히 안 했는가 하면 그건 아닌 거 같고. 준비를 더 잘할 수 있었을까 하면 그것도 아닌 거 같고. 그러면 뭐가 문제일까? 팀이 아닌 선수 개인에게 문제가 있을까? 그러면 내가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선수로서 자신감이나 자존감도 자연스럽게 떨어졌어요.”
레넥톤·리 신·아지르… 늘 같은 챔피언만 고집해서, 그런데 그 챔피언들을 잡기만 하면 이겨서 ‘젠지 클래식’이란 별명도 생겼다. “사실 젠지가 스프링 시즌엔 다양한 챔피언을 했어요. 서머 시즌 초반까지도 여러 가지를 시도했고요. 그런데 혼란이 생긴 건 제이스 때문이었어요. 개막 전에 연습에서 딱 한 번 만나봤던 챔피언인데 막상 시즌이 시작하니까 여러 팀이 제이스를 하더라고요. T1한테 맞아보고 나니까 혼란스러운 거예요. 제이스가 좋은 건지, 트페가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고. 누군가가 확실하게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모두들 확신이 없었던 거 같아요. 연습 과정에서도 분위기가 안 좋아졌죠. 이기긴 해야 하니까 하던 챔피언만 하게 되고. 시즌 후반부로 갈수록 밴픽이 원 패턴으로 변했던 것 같아요.”
서머 시즌 중반부터 김광희는 ‘버돌’ 노태윤과 교체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탑라이너 교체 투입은 월즈까지도 이어졌다. 김광희는 “선수로서 교체되는 과정을 겪는 게 쉽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선수로서 납득하지 못한 부분들도 있었어요. 월즈를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그때 동하 형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형이 매일 밤 제 고민을 들어주고 스트레스 해소를 도와준 덕분에 월즈에서 잘한 게임도 있었죠. 못한 적도 있었지만….”
젠지는 8강에서 C9을 꺾고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준결승 상대는 EDG.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팀이었다. 젠지는 EDG와 풀세트 접전을 벌인 끝에 석패했다. 김광희는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감이 없던 때였다. 그룹 스테이지도, 8강전도 팀에 의존한 바가 컸다”라고 말했다. 이어 “준결승전은 할 만하다고 느꼈다. 1·2세트 붙어 보니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라면서 “사실 5세트까지 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4세트를 이길 거라고 생각했고 4세트를 진 뒤에도 ‘설마 5세트를 지겠어’라고 생각했다”라고 덧붙였다.
“막상 5세트를 진 뒤에는 마음이 공허했죠. 하지만 2021년도를 되돌아보면 정말 마음고생을 많이 한 해였어요. 2021년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아쉬움만큼이나 시원함과 후련함이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맏형 역할을 제대로 못 해줬던 것 같아 아쉬워요. 저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경력이 짧은 편인데 나이가 많아서 맏형 역할을 했거든요. 그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팀에서 저한테 기대한 것도 선수단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역할이었어요. 제가 그런 역할을 조금만 더 유연하게 잘했더라면, 동생들을 잘 통솔하고 이끌어줬다면 반지원정대가 한 번쯤은 우승하지 않았을까요?”
②편에서 계속…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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