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게이머의 연차와 경력은 곧 다가올 이별의 다른 말이다. 피지컬에, 팀 상황에, 군대에. 모두가 오래 하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또한 오랜 시간 동안 녹슬지 않게 자신을 갈고닦는 일 또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8년이란 어마어마한 시간에도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선수가 있다. 5년 동안 SK텔레콤 T1에 머물러 정상의 자리에도 오르고, 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으며, 그만큼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뱅' 배준식이다.
"제가 북미에 오게 되면서 과거를 생각하기보단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어요."
배준식은 여태 만족할 만큼의 성장을 이뤘냐는 질문에 8년 동안의 시간보다 앞으로의 시간을 더 생각하게 됐다고 대답했다. 한국에서 성장한 원거리 딜러 배준식은 이제 미국에서 자신의 앞날을 생각한다. 한국에서 100을 쌓고 갔지만, 앞으로의 날들은 100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시작한 첫걸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기쁨으로 승화시킨다. 배준식의 앞날과 걸어왔던 과거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뱅' 배준식: 한국 생활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어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더라고요. 그래도 미국은 날씨가 정말 환상적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커튼을 걷으면 햇빛이 쏟아지고, 따뜻하고. 먹을 것도 잘 나와요. 생활하기에는 정말 좋은 환경이죠.
LCK에서 오래 머물다가 LCS로 떠나게 됐어요. 몸소 뛰어보니 두 리그의 차이점이 느껴졌을 것 같아요
선수로서 크게 차이점을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LCS의 팀 내부 운영 방식이 조금 더 단조로운 것? 그 정도.
과감하게 북미로 이적을 결정했지만 성적이 좋지 못했어요. 여러 가지 이유 중 스스로에겐 어떤 문제점이 있었을까요
처음 갔을 때 게임 플레이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어요. 게임 내에서 아주 짧은 순간에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마다 팀원들과 제가 다르게 선택했어요. 그래서 팀원들에게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고 변화시키려고 했거든요. 팀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는 '팀원들도 생각이 있겠지' 하고 적당한 선에서 팀원들을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적응이 느렸던 거죠. 어떻게 하면 제 생각과 팀원들의 생각이 맞물려 좋은 결과가 나올까 하는 고민을 합니다. 그걸 조율하는 게 앞으로의 몫이겠죠.
정말 뻔한 대답인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어요. SK텔레콤에 있을 때 저희 팀에게 요구되는 건 항상 일등이었어요. 일등이 아니면 잘못을 했다는 부담감이 심했고 일등을 해도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다른 곳에 가서 성적을 내는 게 앞으로 선수 생활에 있어서 큰 도전이 될 것 같아서 선택했어요.
전 팀인 SK텔레콤보다 더 오래 호흡을 맞춘 사람이 있죠. 바로 '울프' 이재완이에요. 그런데 둘 다 SK텔레콤에서 나오며 헤어지게 됐어요. 새롭게 '아프로무' 재커리 블랙과 호흡을 맞춰보니 어땠나요
(이)재완이랑 할 때는 라인전을 하면서 서로 얘기를 거의 안 했어요. SK텔레콤 팀이 말이 많은 편이었는데 저랑 울프는 얘기를 하고 플레이한 적이 없어요. 그냥 상황이 생기면 한몸처럼 같이 들어가고. 그래서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근데 다른 서포터와 해보니까 '말을 안 해 주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재완이랑 나랑 호흡이라는 게 있었구나 싶었어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는다'라는 말이 와닿았죠. 서로 떨어져있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어요. 물론 '아프로무' 재커리 블랙과도 3, 4년 동안 함께하면 그런 호흡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톱 플레이어 감수성이라는 게 있거든요. 결승에서 경기 생각에 몰두해있어야 하는데 제가 주변에서 왔다갔다 거리면 방해가 될 것 같아 피해있었어요. 그리고 이젠 같은 팀이 아니니까 SK텔레콤과 그리핀 둘의 잔치를 방해하면 안 되지, 이런 마음을 가졌죠. 제가 인사를 했어도 (이)상혁이가 좋아했을까요? 근데 상혁이가 결승에서 지난 팀원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걸 듣고 저도 뭉클하더라고요. 18년도에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결승전이 점점 멀어지며 부담이나 압박이 엄청 심했거든요. 이번에 우승하면서 고생했던 것들 다 떨쳐버렸으면 좋겠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어요. 감독님도요. 이번 MSI도 잘했으면 좋겠어요.
이젠 같은 팀이 아니라고 하셨으니까, 타인의 시선으로 SK텔레콤의 결승 경기를 봤는데 어땠나요
저는 SK텔레콤이 이기는 게 저한테도 좋다고 생각해요. 전 동료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라 그 사람들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 이런 느낌이에요. 물론 지금은 LCS 선수이기 때문에 SK텔레콤 자체보단 LCS 팀들에 더 관심이 가는 건 맞아요. 그래도 SK텔레콤 경기는 항상 챙겨보게 돼요. 재완이나 (허)승훈이나 (한)왕호 경기도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주변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되면 저도 좋아요.
어떻게 된 거냐면, 처음 SK텔레콤에서 창단 15주년 영상을 찍어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근데 3일 후 귀국인 상황이어서 SK텔레콤 경기가 있으면 놀러 가서 찍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갔죠. 근데 작가님이 전에도 롤챔스를 맡던 분이라 자유롭게 이런 거 해 볼래? 하고 제의를 하시더라고요. 분석 데스크도 그렇고 만우절 이벤트도 그렇고 갑작스럽게 하게 됐어요. 결승 코스프레는 올스타전에서 자야 코스프레를 준비해 주셨던 분께서 제의해 하게 됐어요. 코스프레 하는 과정은 의문이 드는데, 막상 가발까지 다 쓰고 나면 다른 자아가 생기는 느낌이에요. 감독님이 지나가셔서 인사했는데 못 알아보기도 하더라고요. 새로운 경험이라 재밌어요.
데뷔 8년 차가 됐어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장을 했을까요
아무래도 그렇죠. 제가 북미에 오게 되면서 과거를 생각하기보단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어요. 아무래도 10등을 하다 보니 더 그랬겠죠. 근데 다들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원래 북미 오고 첫 시즌은 망쳐줘야 한다고. '임팩트' 정언영도 그렇고 다들 망쳤대요. 근데 해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내가 어떻게 이 선수들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지. 다음 시즌 가면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선수들까지 생각해줄 수 있는 단계가 됐다는 건 조금 성장했단 거겠죠?
2019년 현재 LCS를 뛰는 배준식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뭘까요
팀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는 것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저에게 없던 능력이에요. 팀원들을 케어하고 도움을 준다는 게. 한국에선 플레이어가 플레이어를 도와준다는 게 다소 생소하죠. 그건 감독, 코치님들의 역할이잖아요. 근데 그런 생각도 북미에 와선 그런 생각도 변했어요. 유(柔)해졌죠.
항상 승리를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하는 선수. 그게 프로게이머로서 최고의 덕목 아닌가 해요. 그게 경기를 보는 팬들에게 전해질진 모르겠어요. 결과가 좋지 않아서.
성공의 기준은 재단할 수 없지만 높은 커리어와 수많은 팬을 보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여태 해 온 것처럼 할 수 있을까요
다시 롤드컵에 진출해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커요. 다른 선수들 보면서 자극도 많이 받아요. 예전엔 당연하게 생각했던 우승을 돌아보게 되고. 당연히 다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 혼자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팀원들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 도움을 주는 것도 목표구요.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 김정균 감독님이나 형들에게 방향을 지도받았기 때문에 이제 처음 시작하는 선수들이나 팀원들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기 성적은 안 좋지만 저는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항상 희망 품고 있고, 내일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프로게이머를 오래 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더 발전할지 생각하게 돼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 더 좋은 모습으로 발전하는 배준식 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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