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야구선수 이진영

Talon 2013. 6. 15. 08:58

오늘 소개할 선수는 이진영 선수입니다!


이진영 선수는 프로 야구 LG 트윈스의 외야수입니다.


군산상업고등학교 시절 140km대 중후반의 직구를 뿌리는 좌완 파워 피쳐로 이름나 있었습니다.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1억 원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외야수로 전향하였습니다. 199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쌍방울 레이더스는 지명한 선수들 중 대학 진학자들을 제외하고 고졸 선수들 중 이진영 선수만 계약하였기 때문에, 이진영 선수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으로 입단한 신인 선수이죠. 입단 첫 해에는 뚜렷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1999년 시즌이 끝나고 모기업의 재정 악화로 쌍방울 레이더스는 해체하게 되고, SK그룹에 선수단이 인계되어 2000년부터 SK 와이번스의 선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SK 와이번스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2007년과 2008년 SK 와이번스의 정규 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였습니다. 2008 시즌이 끝나고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얻자 2008년 11월 20일 정성훈 선수와 함께 LG 트윈스와 연봉 3억 6천만원의 조건으로 1년 계약을 맺어 이적하였습니다.


국민 우익수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나, 1루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소속팀에서는 우익수 이외에 가끔 1루수로도 출장하는 편이죠.


1997년 : 제17회 세계청소년선수권 도루왕

1998년 : 제3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 베스트9

2003년 : 올스타전 출전, 플레이오프 MVP

2004년 : 골든 글러브 수상

2005년 : 7월 MVP

2006년 : 올스타전 출전 사랑의 골든글러브 수상

2006년 :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 3위

2006년 : 제15회 도하 아시안 게임 야구 국가대표 동메달

2008년 :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년 : 제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 준우승


은사, 강병철 감독과의 인연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당시 고교 선수 최대어였던 이진영 선수는 1998년 시즌을 꼴찌로 마친 고향 팀 쌍방울 레이더스에 드래프트 전체 1차 1순위로 지명되었고 계약금 1억 원의 조건으로 입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향 팀에서 프로 선수로 자리를 잡기 전에 모기업은 IMF 사태를 맞아, 재정 사정이 악화되어 이듬해 1월 7일에 해체되었습니다. 2000년 시즌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SK 와이번스가 새롭게 창단되면서 거액의 가입금을 통해 이전의 쌍방울 레이더스 출신 선수들에 대한 권리를 그대로 승계하여 이진영 선수도 인천으로 자리를 옮겨 SK 와이번스에서 본격적으로 프로 선수로서의 풀타임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SK 와이번스의 초대 감독인, 강병철 감독과 사제지간의 연을 맺게 됩니다. 당시 주전으로 뛰기에 다소 기량이 부족했던 이진영 선수는 강병철 감독의 총애를 받으면서 줄곧 선발로 게임에 나섰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는 동기 선수들로부터 ‘감독의 양아들’이란 비아냥을 들으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강병철 감독의 믿음에도 고졸 루키 타자가 바로 프로 무대에 적응하기는 무척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이를 악물고 안타를 못 치는 날에는 숙소에서의 늦은 식사까지 마다하며 숙소로 앞 공터에서 동이 틀 때까지 스윙 훈련을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힘이 없는 날에는 몰래 치킨을 배달시켜 먹어 가며 훈련을 반복했습니다. 한때 그는 너무나도 힘든 프로 생활 때문에 야구를 잠시 접어 두고 입대할 고민까지 했으나, 결국 노력은 결실을 맺어 그는 강병철 감독의 계약 마지막 해인 2002년 프로 데뷔 3년째에 3할 타자로 등극하면서 자신을 믿어준 강병철 감독에 보답했고, 이후 SK 와이번스의 간판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했습니다.


2004년 한국 프로 야구 병역 비리 사건

이진영 선수도 2004년 9월 프로 야구 선수들이 병역기피 혐의로 무더기로 적발될 때 함께 입건됐습니다.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이진영 선수는 법원에 정식 재판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우석대학교를 마치고 군산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입대를 미루기는 했지만 실제로 병역 기피를 시도한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기소유예마저 억울했기 때문이죠. 병역 문제는 "국민 우익수"라는 별명을 얻게 된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으로 해결하였습니다.


2008년 8월 22일,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7회말에 올라온 구원투수 후지카와 규지의 포크볼을 잡아당겨 1~2루간 안타를 뽑아내 대주자로 2루에 나가 있던 정근우 선수를 불러들이는 동점 적시타를 때려냈으며, 이로 인해 후지카와 규지가 마운드에서 내려가고 이와세가 구원 등판함에 따라 이승엽 선수의 결승 투런 홈런이 나오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머리크기와 타율이 비례한다고 했을때 이진영 선수의 타격은 테드 윌리엄스 수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야구 카툰에서도 이진영 선수는 머리가 큰 모습으로 나와있습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1라운드에서는 일본전에서 0-2로 뒤진 4회말 2사 만루에서 니시오카 쓰요시가 친 우익선상 타구를 멋진 다이빙 캐치로 잡았습니다. 이진영 선수 뒤로 빠진다면 1루주자까지 한꺼번에 3실점할 위기였습니다. 이진영 선수는 2라운드에서도 0-0에서 사토자키의 우전 안타 때 정확한 홈송구로 3루를 돌아 홈으로 쇄도하던 2루 주자 이와무라 아키노리를 잡아내며 "국민 우익수"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2008년 하계 올림픽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는 1-2로 패색이 짙던 7회 대타로 투입돼 일본 최고의 마무리 투수라는 후지카와 규지에 동점 적시타를 터트려 위기의 한국을 구해냈습니다. 한국은 이진영 선수의 적시타를 발판삼아 이승엽 선수의 역전 2점 홈런, 강민호 선수의 쐐기타를 더해 8회 대거 4점을 뽑으며 올림픽 금메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2009년 WBC 2라운드 일본과의 1조 승자전에서는 1-0으로 앞선 1회초 1사 만루에서 상대 선발 다르빗슈 유의 3구를 받아쳐 3-유간을 가르는 2타점 적시타를 터트렸습니다. 한국이 일본에 4-1로 승리하면서 이진영 선수의 이 2타점은 자연스레 결승점이 됐습니다. 또 대만과의 경기에서 만루포를 때려냄으로써 이 점수는 승부를 가르는 결승점이 되었고, 결국 한국은 9-0으로 대만에 완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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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곡은 빅뱅의 '붉은 노을'을 사용하고 있으며, 응원가의 원곡은 마야의 '위풍당당'후렴구로 사용하고있습니다. 가사는 "오~ LG 이진영! 오~ LG 이진영! 오~ LG 이진영! 워어어어어 당당히 마주하라 LG이진영!"이다. '오~'부분에서 오른손을 들며 원을 그리는 율동포인트가 있습니다.


이상 이진영 선수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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