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e스포츠 철수, 퇴보 아닌 변화
지난 11월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리그오브레전드 2017 월드 챔피언십’(통칭 롤드컵) 결승전이 열렸다. 4만여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팀인 삼성 갤럭시팀이 우승을 거뒀다. 준우승팀 역시 한국의 대기업팀인 SK텔레콤 T1이었다. 롤드컵은 현재 최고 인기 게임인 리그오브레전드(League of Legends·통칭 롤)의 국제대회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e스포츠 대회다. 올해 롤드컵 결승전은 전 세계에서 6000만명 이상이 시청했다. 롤드컵에서 삼성과 SKT 게임팀은 5년째 우승과 준우승을 주고받았다. 전 세계의 수많은 게임팀이 이들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롤드컵이 막을 내린 2주 뒤인 11월 20일, 삼성 갤럭시는 우승의 주역이었던 핵심 선수들과 재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e스포츠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삼성 게임단이 선수들에게 우승에 따른 값진 보상을 해주지 않았을까 기대하는 의견이 많이 달렸다. 롤드컵에 뒤이어 바로 진행된 국내 대회인 케스파컵 후원기업 명단에도 삼성이 있었기에, 이때만 해도 삼성의 e스포츠 사업 철수를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12월 1일, 삼성이 e스포츠에서 손을 뗀다는 발표가 나왔다. 삼성 갤럭시 게임단을 운영하는 제일기획은 미국 실리콘밸리 자본이 설립한 벤처기업 KSV(코리아실리콘밸리)에 삼성 갤럭시팀을 매각했다. KSV는 e스포츠 팀 운영이 목적인 기업으로, 올해 7월 창립했다. 롤 외에 오버워치, 배틀그라운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게임팀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의 e스포츠 철수 소식은 e스포츠 관련 커뮤니티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삼성 갤럭시팀은 국내 프로게임단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팀이다. 2000년 ‘삼성전자 칸’이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이래, 국내외에서 열리는 주요 e스포츠 대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가장 오래된 프로게임단이 세계 최고의 대회에서 우승 직후 매각된 것이다.
이미 삼성과 KSV는 롤드컵이 개막한 9월께부터 팀 매각 협상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KSV의 아놀드 허 CGO(최고성장책임자)는 “3~4개월 전부터 팀 인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삼성 갤럭시팀의 팀워크나 성장전략 등이 KSV와 가장 잘 맞는다는 판단 하에 인수를 결정했다”며 “삼성 갤럭시팀이 2017년 롤드컵을 우승하기 전부터 눈여겨 보고 있었으며, 내년 1월 중으로 팀명을 확정해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삼성뿐만 아니라 CJ도 프로게임단을 축소했다. 2002년 창단해 삼성 갤럭시팀만큼 오랜 역사를 보유한 CJ 엔투스 프로게임단의 리그오브레전드 팀은 지난 11월 사실상 해체했다. 11월 13일 CJ 엔투스는 롤 팀에 소속된 코칭스태프·선수 전원과의 계약을 종료했다고 발표했다. e스포츠에서는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한꺼번에 바뀌는 일도 없는 일은 아니기에, e스포츠 팬들은 CJ 엔투스가 새로운 선수와 코칭스태프를 선임해 롤 팀을 유지할 것으로 봤다. 하지만 CJ 엔투스 게임단은 롤 팀 운영을 포기하고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는 게임인 배틀그라운드 게임팀을 새로 구성했다.
기업이 소유한 프로게임단이 해체한 일 자체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1년 위메이드와 화승이 운영하던 스타크래프트1 프로게임단이 해체된 바 있으며, 지난해에는 SKT, KT, 삼성, CJ 등 다수의 대기업 소속 스타크래프트2 게임단이 해체했다.
하지만 과거 기업 게임팀의 해체는 이번과 다르다. 스타크래프트 1·2 게임팀 해체는 게임 자체의 인기 하락과 더불어 벌어진 일이었다. 그와 달리 리그오브레전드는 현재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종목이다. 게임산업 데이터분석업체인 슈퍼데이터의 ‘2017년 e스포츠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1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리그오브레전드를 플레이하고 있다. 월간 롤 관련 영상 시청시간도 16억6500만시간에 달한다.
e스포츠 업계에서는 대기업팀의 해체가 e스포츠 시장의 축소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프로게임단은 크게 기업에서 운영하는 기업팀과 특정 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클럽팀으로 나뉜다. 한국의 경우 야구·축구 등 기존 스포츠 구단과 마찬가지로 e스포츠에서도 한동안 대기업 소속팀이 판을 주도해 왔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기업팀보다는 클럽팀이 대세다.
스타크래프트 전 프로게이머이자 국제 e스포츠연맹 등에서 활동했던 변성철 소셜벤처 게임컬처랩 대표는 삼성의 이스포츠 사업 철수에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는 “e스포츠 초기부터 20년 가까이 팀을 운영했던 대기업 삼성이 철수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징성이 있다. 저도 그렇고 대부분의 e스포츠 팬들은 삼성이 게임단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 대표는 대기업의 e스포츠 철수는 e스포츠의 퇴보가 아니라 변화라고 강조했다. 그는 “팀 자체는 삼성에서 KSV로 넘어간 것뿐이지 없어진 게 아니다. e스포츠 시장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성장을 해왔고, 대기업이 e스포츠에서 빠졌다고 해서 e스포츠 시장 전체에 마이너스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전에도 국내 프로게임단이 해체할 때마다 e스포츠가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종목(게임)이 바뀐 것뿐이지 e스포츠에 대한 투자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고 말했다.
변 대표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나 슈퍼데이터, 뉴주(Newzoo) 등 해외 게임산업 데이터 분석업체 등의 자료를 토대로 e스포츠 산업의 성장세를 설명했다. 지난 11월 발표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7년 e스포츠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e스포츠 산업 규모는 약 830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14.9% 성장했다. 올해 전 세계의 e스포츠 산업 규모는 약 6억9600만 달러(약 7577억원)로 추산되며, 이는 지난해에 비해 40% 이상 성장한 것이다. 또한, 뉴주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에서 e스포츠 경기 시청자 수는 약 3억8500만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20% 가까이 늘어났다. 뉴주는 2020년까지 e스포츠 시청자 수가 약 5억8900만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국내 한 리그오브레전드 클럽팀 관계자 ㄱ씨는 “삼성이 e스포츠에서 철수한다고 해서 우리 내부적으로는 ‘왜 저런 잘못된 결정을 할까’ 이해하지 못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ㄱ씨는 “기업팀은 기업의 일부이기 때문에 선수 연봉이나 운영비 등 당장 눈에 보이는 비용이 크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매년 e스포츠 시장이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장기적인 시각으로 보면 팀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는 게 저희 생각이다. 프로게임단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대기업들도 저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클럽팀 관계자들은 기업팀의 해체, 축소는 클럽팀 위주로 돌아가는 세계적인 추세와도 맞다고 설명했다. 롤 클럽팀 관계자 ㄱ씨는 “기업팀은 아무래도 수익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큰 조직의 일부이다 보니 의사결정이 느릴 수밖에 없다. 반면 클럽팀은 자금 운영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결정이 빠르다”며 “안정적인 운영이라는 측면에선 기업팀이 유리할 수 있지만 기업팀이라는 존재가 기존 한국 스포츠에서 따온 특이한 시스템이다. 대부분의 해외 클럽팀은 특정 기업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도 충분한 투자를 유치해서 안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 갤럭시팀을 인수한 KSV의 신생 프로 게임팀도 굳이 따지면 기업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KSV는 특정 대기업에 속한 기업이 아니라 미국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자본이 투자된 벤처기업이다. KSV는 자신들의 프로게임팀 운영은 대기업 게임팀의 운영과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아놀드 허 KSV CGO는 “한국에는 세계 최고의 e스포츠 코치, 선수, 팬들이 모여 있어 전망이 매우 좋다. e스포츠 관련한 커뮤니티의 성숙도가 높아 한국 시장만의 독보적인 잠재력이 있다”며 “기존 국내 대기업은 한국 시장에 주력했지만 우리는 아이콘이 될 수 있는 국제적인 선수들을 키워내려고 한다. 한국의 e스포츠 시장과 국제무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통해 세계의 자본과 e스포츠 비즈니스를 한국으로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우리의 예측으로는 내년까지 e스포츠의 팬층이 야구를 능가할 것으로 본다”고도 말했다.
변성철 대표는 e스포츠의 역사가 2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10~20대 남성 위주이던 소비층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의 프로스포츠도 즐기는 연령층이 넓어지고, 여성 관객, 시청자들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인기가 이어지는 것과 같은 길을 걷는다는 분석이다. 뉴주의 ‘2017년 e스포츠 시장 보고서’에 의하면, 일반 e스포츠 시청층의 경우 여성의 비율이 39%에 이른다. 36~50세 남성의 비율은 15%로, 10대 남성 시청자 비율(17%)과 엇비슷하다. 변 대표는 “국내만 따져도 e스포츠가 시작된 지 20년이 됐다. 당시 20살이었던 사람이 지금 40살이다. 게임을 즐기는 청소년들은 계속 유입되는 한편으로, 40대 이상으로 e스포츠 연령층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e스포츠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올림픽에서도 e스포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8월 토니 에스탕게 파리올림픽 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 e스포츠 종목 도입을 놓고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10월엔 IOC에서 e스포츠가 ‘스포츠 활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발표해 기대감을 높였다. 지난 4월에는 e스포츠가 2022년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에 채택됐다는 소식도 흘러나왔다.
한편, 지난 4년간 중단됐던 e스포츠계의 올림픽 월드사이버게임즈(WCG)도 내년부터 부활한다. WCG는 원래 삼성이 주관사였으나, 2013년을 끝으로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4월 중견 게임사 스마일게이트에서 WCG에 대한 상표권을 사들였고, 내년 4월 태국 방콕에서 5년 만에 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지난 13일 WCG는 태국 방콕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도타2’ ‘카운터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 등 4개 종목을 발표했다.
하지만 WCG가 중단된 몇 년 사이 주요 게임대회가 게임 제작사 위주로 재편됐다. e스포츠 업계 관계자들은 대기업의 투자보다 중요한 이슈는 게임 제작사와 대회 주최측, 방송국, 팬들 사이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가장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리그오브레전드, 배틀그라운드, 오랫동안 WCG의 종목이었던 스타크래프트 등이 정식 종목으로 포함될지 여부가 관심사다.
한 프로게임단 관계자 ㄴ씨는 “국내 롤 리그는 몇 년간 CJ의 계열사인 OGN(구 온게임넷)에서 주관해 왔으나, 2015년부터 제작사인 라이엇게임즈가 직접 리그를 운영하고 있다”며 “CJ가 e스포츠 내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이 줄어든 것과 CJ 엔투스 팀의 해체와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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