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철완 최동원 님입니다~!
1958년 5월 24일 부산에서 출생한 후 구덕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거쳤습니다.
1981년 실업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서 실업 롯데 자이언츠를 1981년 실업리그 전기리그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신인왕, 다승왕, MVP를 수상하였습니다. 1981년 캐나다 에드먼튼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털컵 대회에서 최우수투수상을 받고 메이저 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팀과 메이저 리그 25인 로스터에서 시작하는 조항이 포함된 5년 메이저 리그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메이저 리그 진출 대신 새로 출범한 한국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1983년 입단하였습니다.
KBO 리그에 데뷔 후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으로 규정이닝의 2배 이상 투구, 14회 이상 완투, 전 구단 상대 완투, 2점대 이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고,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데뷔 후 6년 연속으로 선발등판 2/3이상 완투, 선발승 전 경기 완투승을 하였으며,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40이닝 4선발등판 4완투, 1984년부터 1987년까지 4년 동안 1000.2이닝, 80승, 60완투, 2.16의 평균자책점,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동안 1209.1이닝, 76완투, 2.2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경이로운 연투능력과 이닝이터능력을 나타내었습니다. 특히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데뷔 후 6년간 75.2%의 완투율을 기록했습니다. 1984년에는 포스트시즌을 포함해 56경기 324.2이닝, 31승, 6세이브, 18완투, 258탈삼진으로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4승을 올리며 1984년 롯데 자이언츠가 창단 첫 우승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하는 등 KBO 리그 초창기를 이끌었습니다.
KBO 리그 데뷔 후 5년 동안 연평균 41경기, 250이닝, 16회 이상 완투를 하면서 평균자책점 2.27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역대 단일 한국시리즈 8개부분에서 1위를 기록했습니다. KBO 리그에서 8년을 활약하고 통산 평균자책점 2위, 통산 완투 2위, 통산 완투율 1위, 한 시즌 최다 승 2위, 한 시즌 최다 이닝 2위, 한 시즌 최다 이닝 4위, 한 시즌 최다 탈삼진 1위를 기록했습니다.
최고구속 155 km/h의 강속구와 강한 어깨로 아마야구 시절부터 '철완', '무쇠팔' 으로 불렸습니다.
한화 이글스의 투수 코치 및 2군 감독, KBO 경기감독위원 등을 역임했으나, 2011년 9월 14일 호전되었던 대장암이 악화되면서 54세로 사망했습니다.
구덕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77학번
150 ~155km/h의 강속구에 100~130 km/h의 다양한 속도의 가감을 줄 수 있는 파워커브, 낙차 큰 커브가 대표 구종이었습니다. 슬라이더가 3번째로 자주 던지는 공이었습니다. 역회전볼, 그리고 현재는 쓰지않는 용어이긴 하지만, 어린시절 일본야구의 영향으로 슈트 또한 던졌습니다.
사람들은 최동원 선수가 단조로운 구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과 다릅니다. 빠른 포심, 커브, 슬라이더 또한 명품이었다고 미국신문에서 전했습니다. 또한 한국에 몇 명 없던 투심을 던지던 투수였습니다.
아마추어 시절
경남고등학교 2학년 때, 경북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후, 바로 그 이튿날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투구를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3학년 때, 청룡기 고교야구 대회에서 승자 결정전에서는 김성한의 군산상업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9이닝 동안 20개의 탈삼진을 잡고 완봉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어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77학번에 입학했습니다. 연세대 경영학과 시절, 이틀 연속으로 등판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졸 후 그는 롯데 실업야구팀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롯데 자이언츠 시절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고, 이듬해인 1984년에는 프로 야구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들을 세웠습니다. 51경기에 출전해 14차례나 완투하며 27승과 223탈삼진,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상과 다승왕, 탈삼진왕을 석권한 것입니다. 특히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 팀의 창단 첫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한 선수가 4승을 모두 거둔 선수는 최동원 선수가 유일합니다. 선동열과 더불어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 투수 중의 한명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는 1승 1무 1패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직구는 140 km/h 정도였지만 스피드건의 작동방식 차이 때문에 요즘 기준으로는 150 km/h를 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추어 시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측정한 바에 따르면 150 km/h를 기록했다는 기사가 게재된 바 있습니다. 1987년 시즌까지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200이닝 이상을 던지는 쾌투로 팀의 에이스임을 과시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88년 말 선수협 파동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김시진 등을 상대로 3:4 트레이드로 이적했으며, 트레이드에 반발하여 1989년 후반에서야 돌아왔습니다. 1990년 시즌을 마치고 현역에서 은퇴하였습니다. 1991년에는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다녀온 경력이 있습니다.
1991년 최동원은 민자당의 공천을 뿌리치고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시 서구의 광역의원에 출마했습니다.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낙선했습니다.
계속 야구와 인연을 맺고 싶어 지도자 자리를 원했지만 최동원을 받아 주는 구단은 없었습니다. 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야구 선수가 왜 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느냐’는 식으로 바라봤습니다.
자신의 의도가 다르게 전해진 것을 알고 1999년부터 방송 출연을 접고 다시 야구 현장으로의 복귀를 노렸습니다. 그러다 2001년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선수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코치 직에서 물러난 뒤 2003년 KBS N SPORTS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5년 다시 한화 이글스에서 코치를 맡았습니다.
2007년에는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을 맡아 2년 동안 유망주들을 가르쳤습니다. 한화 이글스에 있는 동안 류현진을 밀어주며 새로운 신인 한 명을 발굴했습니다. 2008 시즌을 마치고 한화 이글스에서 물러난 후 2009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위원으로 야구장을 찾게 됐습니다.
1988년, 그는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투수 김대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 최동원
명예욕에 따른 움직임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해 11월 그는 투수 오명록, 포수 김성현과 함께 삼성 투수 김시진, 전용권, 내야수 오대석, 외야수 허규옥을 상대로 한 3:4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트레이드 사실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롯데 구단이 자신의 의도를 본의와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1990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고 1991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마운드를 떠났습니다.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었습니다. 아마추어 야구 시절부터 혹사 당한 게 조기 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 아마추어 시절이나 프로에서 무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세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
— 최동원
최동원 선수의 선수협 법률자문을 맡았던 변호사가 문재인이었고 문재인은 2012년 이런 내막을 트위터를 통해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활동하던 2007년 대장암 초기 진단을 받았고 2008 시즌을 마치고 한화 이글스에서 퇴직했습니다.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위원으로 발탁되어 활동하다가 2010년부터 병세가 나빠져 직을 그만두고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 요양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2011년 7월 22일 경남고와 군산상고 간의 레전드 매치에 경남고 대표로 참석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경기에 뛰지 못하고 더그아웃을 지켰습니다. 결국 지병인 대장암으로 2011년 9월 14일 54세로 사망했습니다. 선수 은퇴 후 모습과 달리 죽기 직전엔 얼굴에 살이 없고 배가 나와 있었는데 이는 복수때문이었습니다. 허구연이 이 사실을 알고 걱정했지만 최동원은 모른척 해달라고 했습니다.
한화에서는 야구선수로서는 한화 이글스와 인연이 없지만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등으로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장례식 지원을 한화임원급으로 해주었습니다.
사망한 지 16일이 지난 2011년 9월 30일, 롯데 자이언츠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최동원 선수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고, 두산 베어스와의 홈 경기 직전에 사직야구장에서 영구 결번식을 엄수하였습니다.
2011년 영화 ‘퍼펙트 게임’은 최동원과 선동열의 ‘세기의 맞대결’을 다룬 작품으로, 배우 조승우가 최동원 역을 연기했습니다.
프로
MVP, 골든글러브, 다승 - 84
탈삼진왕 - 84, 87
올스타 베스트 10 2회 - 86~87
아마추어
고등학교 2학년 전국 우수고교 초청대회 경북고등학교와 경기에서 경남고를 3관왕으로 이끌며 17이닝 노히트 노런 기록 / 3학년 경남고 첫 청룡기 우승
연세대학교 시절 23연승 기록
아마야구 실업 팀 롯데 입단 실업야구리그전에서 우승, 최우수선수상, 최우수신인상, 최다승리상 3관왕
전기·후기리그 : 30경기 205.2이닝 17승 4패 2세 173탈삼진 2.45 평균자책점
코리언시리즈 : 6경기 42.1이닝 2승 1패 1세 37탈삼진
합 계 : 36경기 248이닝 19승 5패 3세 210탈삼진
캐나다 인터콘티넨털컵 대회 최우수선수 - 8이닝 퍼펙트 게임 및 최우수 투수상 : 1981
민주당 스포츠문화체육행정특보위원
SBS 야구 해설위원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
KBS 스카이 스포츠 해설위원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 2008년 10월 11일, 한화 이글스가 최동원을 비롯한 코칭스텝 4명의 재계약을 포기하는 의사를 밝혀 2008년 시즌을 끝으로 한화 이글스의 2군 감독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최동원은 “아버지는 한국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차고 다니셨다. 아버지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하셨지만 조부의 반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네가 운동을 하고 싶다면 시켜주겠다’며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고 아버지 최윤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아들 뒷바라지를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야구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안테나를 별도로 설치해 일본 고교 야구와 일본 프로 야구 중계를 볼 수 있게 해준 것도 최윤식이었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함께 캐치볼을 했던 것도 최윤식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최동원 선수의 구단 입단하는 과정이나 연봉 협상 과정에서 구단과 갈등을 빚을 때면 일부 언론에서는 최윤식이 최동원 선수의 문제에 지나치게 간여한다며 최윤식을 비난했습니다. 최동원 선수는 그런 일부 언론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며 “내가 해명을 하려고 해도 선수 한 명의 목소리는 구단에 비해 너무 작았다”고 말했습니다.
최윤식은 “주위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마라”며 최동원에게 힘을 실어 주곤 했고 ‘즐겁게 열심히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최윤식은 2003년 세상을 떠났고 최동원은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랐습니다.
동생 최수원은 KBO 야구 심판입니다.
통산 평균자책점 2위, FIP 2위, 완투 2위, 완투승 4위. 완투율 1위
단일 시즌 최다 승 : 2위, 최다 이닝 : 2위, 4위 (1986), 최다 탈삼진 : 1위 - 1984
역대 유일 2년연속 200이닝-20승-1점대 평균자책점-1점대 FIP-0점대 WHIP : 1985-1986
역대 유일 5년연속 200이닝-14완투-2점대이하 평균자책점, FIP : 1983-1987
역대 최초 통산 400탈삼진, 500탈삼진, 600탈삼진, 700탈삼진, 800탈삼진, 900탈삼진, 1000탈삼진, 100승-1000탈삼진
역대 최초 통산 70완투, 80완투
역대 최초 통산 10완봉, 15완봉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승 : 4승, 최다 이닝 : 40이닝, 최다 선발 등판 : 4번, 최다 완투 : 4완투, 최다 선발승 : 3선발승, 최다 완투승 : 3완투승, 최다 탈삼진 : 35탈삼진 - 1984
한국시리즈 선발 등판 4경기 연속 완투, 최초 완봉승, 선발 전원 탈삼진 - 1984
연간 최다 승 : 31승, 최다 탈삼진 : 258탈삼진 - 1984
한 시즌 최다 탈삼진 : 223탈삼진 - 1984
포스트시즌 통산 완투 1위, 완투승 2위, 완봉승 2위
한국시리즈 통산 완투 1위, 완투승 1위
다승 1위 : 1984, 2위 : 1986
탈삼진 1위 : 1984, 1987, 2위 : 1985, 1986
평균자책점 2위 : 1985, 1986
FIP 2위 : 1984, 1985, 1986, 1987
WHIP 2위 : 1984, 1985, 1986
최다 이닝 1위 : 1984, 1986, 2위 : 1987
완투 1위 : 1985, 2위 : 1984, 1987
완투승 1위 : 1985, 2위 : 1984, 1987
완봉승 1위 : 1985, 1987
최다 경기 2위 : 1984
1983-1987 시즌 : 202경기 1209.1이닝 76완투 2.28평균자책점, 평균 : 40경기 242이닝 15완투 2.28평균자책점, 규정이닝 2배이상 투구, 14회이상 완투, 전구단상대 완투
1983-1988 시즌 선발등판경기 2/3이상 완투, 선발승 전경기 완투승
이상 최동원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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