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회 표준계약서 분석해보니
한국e스포츠협회(KeSPA)가 작성해 프로게임단에 제공하는 표준계약서에 불공정 조항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30일 확인됐다. KeSPA 표준계약서에는 선수 동의 없이 이적이 가능한 조항, 이적 뒤 재계약이 불가능한 조항이 담겨 있다. 선수가 언론을 별도 접촉해 활동 내용이 기사화된 경우 구단은 계약을 즉시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때 선수는 지급된 연봉의 2배를 30일 내에 구단에 배상해야 한다. 선수 권익을 보호해야 할 협회가 불공정 계약을 사실상 장려한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국민일보는 최근 KeSPA 표준계약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KeSPA 표준계약서 내용이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이 계약서에는 구단의 이익을 우선시한 조항은 많은 반면 선수 권익을 위한 조항은 거의 없었다. 협회는 2003년 출범한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시절 작성된 표준계약서를 몇 차례 수정해 지금까지 사용해 왔다. 그동안 협회는 요청이 있을 시 프로게임단에만 표준계약서를 제공하고 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KeSPA 표준계약서 15조 ‘계약의 양도’ 부분을 대표적인 불공정 조항으로 지목했다. “선수는 회사와 성격을 같이하는 여하한 팀 또는 단체법인 등에게 본 계약에 의한 회사의 선수에 대한 권리의무를 양도할 수 있음에 동의한다”는 게 15조 내용이다. 구단이 사전 동의 없이 선수를 마음대로 이적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적 시 사전 동의’ 조항은 최근 불공정 논란을 빚은 프로게임단 ‘그리핀’ 계약서에도 명시돼 있다. 업계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그간 사전 동의 없는 이적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며 “이 조항은 문제가 되는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선수 동의 없는 이적은 축구 및 야구계에서도 계속 지적돼온 문제다. 미성년 선수가 많고 해외 이적이 활발한 e스포츠계에서 이는 더 큰 문제로 작용할 거라는 게 중론이다. 김훈기 프로축구선수협회 사무총장은 “선수 동의 없는 이적은 당연히 문제”라며 “축구계에서도 잘못된 걸 알면서 침묵하는 피해자가 많다”고 말했다. 2001년 3월 공정거래위원회는 구단 측의 일방적인 선수 이적 행위를 불공정 거래 행위라고 판단했다. 당시 공정위는 한국야구위원회를 상대로 시정명령을 내렸다. 한국법조인협회 e스포츠연구회 소속 윤현석 변호사는 “동의 없는 이적 조항은 불공정 계약 조항”이라고 강조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양도된 선수의 의무와 처리’를 규정해 놓은 16조에는 “선수는 양도 전 팀과 체결한 선수계약의 변경을 양도팀에 요구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이적해간 새로운 팀과의 재계약을 금지시켜 놓은 것이다. 윤 변호사는 “선수는 새 구단과 계약 내용을 변경할 권한도 주장할 수 없는 셈”이라며 “이 조항은 정의에 현저히 반한다”고 비판했다.
상금 수령 조항은 일방적으로 구단 측에 유리하다. 계약서 6조는 “경기 상금은 회사에 전액 귀속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회사 기준에 따라 수령액의 일부를 선수에게 지급할 수 있다. 지급 기준은 회사 자율로 결정한다”고 명시했다. 프로스포츠계에서 상금을 회사가 수령한 뒤 선수들에게 배분하는 게 이례적인 건 아니다. 다만 이를 선수와 협의 없이 회사 ‘자율로’, 즉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 e스포츠업계 관계자는 “상금을 한 푼도 안 줄 수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초상권에 대한 부분을 규정한 14조도 마찬가지다. 14조 3항에는 “행사 참가 및 광고 출연 등에 의한 수익은 전액 회사에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며 회사의 기준에 따라 수령액 일부를 선수에게 지급할 수 있다. 지급 기준은 회사의 자율로 결정한다”고 돼 있다. 윤 변호사는 “광고 수익도 회사가 모두 가질 수 있다는 얘기”라고 비판했다. 2항에는 또 “초상권, 섭외권 등 일체는 회사에 귀속되며”라는 문구만 있고, 계약 종료 후 선수에게 이를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이 없다. e스포츠업계 관계자는 “계약 기간 중 선수 초상권이 구단에 귀속되는 일은 있지만 계약 종료 후에도 구단이 이를 소유한다는 규정은 듣도 보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회사에 의한 계약 해지’를 규정한 21조도 불공정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계약서에 따르면 구단은 선수 관련 상황에 대한 공식 발표권 등 언론매체에 대한 독점적인 홍보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런데 21조 5항은 선수가 이 독점적 홍보 권한을 침해할 경우 구단은 선수와 계약을 즉시 해지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아울러 선수는 계약 해지 30일 이내에 지급된 연봉의 2배를 구단에 배상하게 돼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선수가 언론을 따로 접촉해 활동 내용이 기사화되면 바로 내쫓겠다는 뜻”이라며 “이미 지급된 돈의 2배를 물어내라는 것도 가혹한 조항”이라고 말했다.
KeSPA는 계약서 21조에서 구단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상황을 상세히 다뤘다. 그런데 선수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경우를 명시한 22조는 내용이 부실하거나 유명무실했다. 선수는 구단이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구단이 부도를 당하거나 해체되는 경우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윤 변호사는 “구단의 계약 해지 조항에 비해 선수의 계약 해지 및 그에 수반된 권리(손해배상)가 계약서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매우 불공정하다”고 비판했다.
KeSPA 표준계약서에는 선수 권익을 보호하는 조항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방적으로 구단 측의 이익을 반영한 계약서라는 얘기다. 표준계약서에는 구단 측의 부당한 요구를 선수가 거부할 수 있다는 조항도 없다. 구단이 선수의 사생활이나 인격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 선수의 신체적·정신적 준비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조항도 없다. 이는 정부가 만든 대중문화예술인 표준계약서에 있는 내용이다. 업계 상황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KeSPA 표준계약서는 체계적이지도 않고 선수 권리 측면에서 빠져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며 “최근 ‘카나비 사태’로 논란이 된 프로게임단 ‘그리핀’의 계약서가 KeSPA 표준계약서보다 더 낫지 않나 싶을 정도”라고 비판했다.
프로게임단 상당수는 불공정 조항이 담겨 있는 이 계약서를 바탕으로 선수들과 계약을 해왔다고 한다. 한 e스포츠업계 관계자는 “KeSPA 표준계약서를 사용하는 ‘리그오브레전드(LoL)’ 1부 리그 팀도 있다”며 “적어도 3개의 LoL 구단이 KeSPA 표준계약서를 바탕으로 계약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은 KeSPA 계약서에 불공정한 조항을 추가해 놓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게임 제작사와 구단 측의 ‘입김’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KeSPA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는 지적도 있다. KeSPA는 예산 대부분을 LoL 제작사인 라이엇게임즈와 프로게임단 측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카나비 사태’ 해결 과정에서 KeSPA 측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협회는 당장 라이엇게임즈 도움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한 정도”라며 “라이엇게임즈에 밀려 카나비 사태 해결 과정에 전혀 개입할 수 없었다. 재정 자립도를 높이지 않으면 협회 역할은 유명무실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 변호사는 “KeSPA 표준계약서 문제는 정부 차원의 표준계약서가 왜 필요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며 “정부 표준계약서도 강제성은 없지만 하나의 지침,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이어서 e스포츠계에 만연한 불공정 계약이 시정되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동섭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 22일 구단과 선수가 계약할 때 문화체육관광부가 마련한 표준계약서를 사용토록 하는 ‘e스포츠진흥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공정위 차원의 계약서 전수조사와 이에 따른 시정명령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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