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체육인 故손기정

Talon 2022. 3. 21. 12:50

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故손기정 선수입니다.

 

1936년 하계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습니다.

약죽 보통학교 졸업 - 양정 고등 보통학교 졸업 - 보성전문학교 상과 자퇴 - 메이지 대학 법학과 학사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리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그는 신의주의 학교를 다녔습니다. 1926년 초봄에 해일이 일어나 오늘날의 신의주부 남민포동 일대가 바닷물에 잠겨 학업을 중단하고 장사에 나섰습니다. 14세의 나이로 철 따라 물건을 바꿔가며 참외 장사, 각설탕 장사, 군밤장사 등을 했습니다. 덕분에 2학기부터 약죽 보통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으나, 6학년 졸업을 할 때까지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장사해야 하였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집에서 학교까지 약 2킬로미터의 자갈길을 항상 뛰어다녔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개신교 사상가인 김교신 선생이 교사로 일한 학교였으므로 김교신 선생과 교사와 제자로서의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지만, 일제의 감시로 자퇴했습니다.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에 일본의 메이지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활약했으며,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마라톤 대회 13개에 참가했고 그중 10개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는 1935년 11월 3일에 2시간 26분 42초의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1947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개인 최고 기록은 이보다 더 좋은데, 표준 마라톤보다 더 긴 코스에서는 2시간 25분 14초, 더 짧은 코스에서는 2시간 24분 51초를 기록했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사발라와 손기정 선수의 다툼이었습니다. 처절한 사투는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 선수가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결판이 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손기정 선수는 마라톤에서 우승하였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경기 다음 날 손기정 선수를 면담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42.195km를 2시간 29분 19.2초에 주파해 당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때 손기정 선수와 함께 출전하였던 남승룡이 동메달을 차지하였습니다. 1936년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본 대표팀에서 뛰어야 했고, 이름의 로마자 표기도 일본식으로 읽은 손 기테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손기정 선수는 한국어 이름으로만 서명했으며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신의 모국이 한국이라고 밝혔습니다. 시상식 때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경기 후 일본 선수단이 여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베를린의 조선인 두부공장에서 열린 우승을 축하하는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그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린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1년간 감옥에서 복역을 하는 등 언론노동자들이 탄압을 당했으며, 손기정 선수도 조선에 귀국할 당시, 환영 대신 경찰들로부터 연행 마냥 대우받았고 전차를 타는 것조차 일본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유럽 여러 나라와 인도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선배로부터 “주의하라. 본국에서 사고가 나서 일본인들이 너희를 감시하라는 전문이 선수단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게재한 사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문이 정간되고 많은 기자가 복역을 하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손기정 선수는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일본 경찰이 손기정 선수를 감시했습니다. 마치 사상범을 다루듯 몸을 검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마라톤 우승을 반납하고 싶다”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잠깐 일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1945년 3월에는 건국동맹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 경기도 주안 조병창이 채병덕 중좌에게 전갈을 보내는 연락담당 역할을 했습니다.

 

광복 이후 1947년 7월 19일에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극우인사 한지근에게 피살될 때, 8월 3일 서울 운동장에서 인민장 영결식에 참석하여 역도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과 같이 여운형의 관을 운구하였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에 대한 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서 전 세계인의 안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코치직으로 활동하여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마라토너 서윤복과 함기용의 코치로 활동해 이들을 훈련시켰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는 손기정 선수가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혔습니다. 1983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과 심정을 밝혔습니다.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과 명예졸업장을 전달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 간혹 방송과 인터뷰에 참여하였습니다. 2002년 11월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사후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서울역 서부 출구에서 멀지 않은 그의 모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손기정공원과 손기정 기념관이 만들어졌습니다. 손기정 기념관은 나라를 잃은 어려운 시절, 세계를 제패해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손기정 선수의 뜻을 기리고, 국제적인 스포츠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자 1918년 만리동에 건립된 손기정 선수의 모교인 양정의숙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 14일에 개관하였습니다.

前 숭실대학교, 고려대학교, 한양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특임초빙교수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 소식이 알려지자 윤치호는 광의로 보아 황인종의 자랑이며 백인의 종의 우월성을 타파한 일이라며 칭송하였습니다.

1936년 하계 올림픽대회 육상 남자 마라톤 금메달
1957년 대한민국 체육상
1963년 혁명정부 문화공로상
1967년 바킬라 아베베상 / 서울신문사 체육상
1968년 국제육상경기연맹 공로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창립 70주년 특별기념상
2002년 체육훈장 청룡장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 선수의 국적이 우승 당시의 일본으로 되어 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 세워진 기념비에 쓰인 국적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 번 바뀌었다가 다시 일본으로 바뀌었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일본 올림픽 위원회가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 국적 변경을 신청하면 공식 기록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올림픽 위원회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 기록은 일본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홈페이지에도 손기정 선수의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하고 있고 이름도 손 기테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손기정 선수의 일대기에 대한 자료에서는 국적이 한국이라고 밝히고 있고, 일제강점기 시절 어쩔 수 없이 일본 국적을 달고 경기에 나오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다른 이름을 손기정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올림픽 역대 마라톤 우승자 기념비나 올림픽 기록집 등에는 손기정 선수의 국적이 대한민국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손기정 투구”로 알려진 이 투구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 신문사가 1936년 하계 올림픽 당시 육상 남자 마라톤 우승자에게 씌워 주려 했으나 전달되지 못하고 50년 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1986년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이를 지난 1994년 국가에 기증했으며 정부는 손기정 선수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서양 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 904호로 지정했습니다.

 

 

 

이상으로 손기정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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