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권투 선수 故슈거 레이 로빈슨

Talon 2022. 7. 18. 13:40

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故슈거 레이 로빈슨 선수입니다.

 

복싱 P4P의 제왕이자 복싱 역사상 최고의 아웃복서이며 실력으로만 따지면 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前 세계 웰터급, 미들급 챔피언. 키가 180cm이고 리치가 184cm이었던 미국의 오소독스 스타일의 아웃복서였습니다. 통산전적은 200전 173승 19패 6무승부 2무효 108KO. 본명은 워커 스미스 주니어입니다.

세계 미들급 타이틀을 5번 석권하면서 복싱 역사상 동일 체급 세계 타이틀 5번 석권을 최초로 기록한 선수이기도 합니다. 동일 체급에서 5번 세계 타이틀을 따낸 건 복싱 기구나 체급이 늘어난 21세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록입니다.

1921년 5월 3일 미국 조지아주의 에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남 2녀 중 막내로, 아버지 워커 스미스 시니어는 농부였습니다. 집안이 가난했기에 일거리를 찾는 아버지를 따라 디트로이트로 이사했다가 12세가 되던 해에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어머니를 따라 뉴욕으로 이사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농구와 권투 등의 운동을 즐기면서도 의사가 되길 꿈꿨으나, 가난한 집안 여건 탓에 15세 때 고교에서 자퇴하고 권투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마추어 복싱 경기에 나가기 위해서는 미국 체육협회 회원증이 필요했습니다. 만 18세부터 회원증을 취득할 수 있었기에 1936년 당시 15세였던 로빈슨은 원래 경기에 나갈 수 없었지만, 연상의 친구 레이 로빈슨의 회원증을 빌려 대신 경기에 나갔습니다. 경기 후 한 관중이 '설탕처럼 달콤했다'고 말하면서 이후 워커 스미스라는 본명 대신 '슈거 레이 로빈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로빈슨은 아마추어 전적 85승 무패 69KO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1라운드 KO만 40회였다고 합니다. 1939년 골든 글러브 페더급, 1940년 골든 글러브 라이트급 토너먼트에서 우승했습니다.

1940년 10월 4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 에체베리아를 상대로 프로 데뷔전을 가졌는데, 2라운드 TKO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1942년까지 40전 전승 29KO를 기록하면서 링 지는 로빈슨을 1942년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습니다. 프로 데뷔한지 불과 3년차인 선수인 데다 챔피언이 된 적도 없었기에 상당히 이례적이었는데, 단순히 전적만으로 선정된 건 아니고 前 세계 웰터급 챔피언 프리치 지빅, 당시 세계 라이트급 챔피언이던 새미 앵곳, 이후 세계 웰터급 챔피언이 되는 마티 서보 등 당대 최고로 손꼽히던 선수들을 꺾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943년 2월 5일 영화 레이징 불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제이크 라모타의 두 번째 경기에서 판정패하며 프로 첫 패배를 당했습니다. 다만 당시 라모타는 로빈슨보다 16파운드 더 나갔습니다. 그로부터 3주 후인 2월 26일에 라모타의 세 번째 경기에서는 판정승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1943년 2월 27일에 로빈슨은 본명인 워커 스미스로 돌아와 미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당시 미군 기지를 돌면서 군인들에 대한 응원차로 경기를 가졌는데, 흑인 병사는 경기에 관전할 수 없어 이에 로빈슨이 항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럽 파병을 앞뒀던 1944년 3월 29일에 로빈슨은 기지에서 사라졌다가 4월 1일에 길가에서 발견됐습니다. 5일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겨우 의식을 찾았는데 로빈슨은 기지 막사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는 것 이외에는 그동안의 기억을 잃었고, 이로 인해 정신질환을 진단받아 같은 해 6월 3일에 명예 제대했습니다. 그런데 로빈슨이 제대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연합군이 유럽 본토로 진출하는 등 추축국에 대해 본격적인 반격을 앞둔 상황에서의 갑작스러운 제대로 당시 언론은 로빈슨을 탈영병으로 낙인찍으며 비난했습니다.

제대 후 1년간의 휴식을 가졌던 로빈슨은 1945년 10월 링에 복귀해 다시 연승가도를 달렸고, 1946년 12월 20일 당시 공석이었던 세계 웰터급 타이틀을 두고 토미 벨과의 경기에서 판정승을 거두면서 마침내 챔피언이 됐습니다. 1943년 라모타에게서 첫 패배를 당한 후 토미 벨과의 경기 전까지 로빈슨은 33승 무패 1무를 기록했었습니다. 그토록 뛰어난 전적을 기록했음에도 타이틀 도전은 늦은 편이었는데, 로빈슨이 당시 복싱계를 암암리에 주무르고 있던 마피아에게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빈슨은 화려한 스타일로 체급내 경쟁자들을 대부분 정리했던 터라 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프로모터로서는 그런 로빈슨을 마냥 썩히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1947년 6월 24일 지미 도일을 상대로 첫 타이틀 방어전이 예정됐습니다. 그런데 경기 전날 로빈슨은 경기 중 도일을 죽이는 악몽을 꿨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로빈슨은 경기 취소를 요구했지만 프로모터측이 신부와 목사를 불러 악령을 쫓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경기는 강행됐고, 8라운드 TKO로 로빈슨이 승리를 거뒀습니다. 경기 후 의식을 잃은 도일은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음날 새벽 결국 숨을 거뒀습니다. 원래 로스앤젤레스 출신인 도일은 이전부터 몇 차례 KO패를 당했고 이에 캘리포니아주 복싱위원회가 도일의 몸상태를 우려해 경기 출장을 제재하자 도일은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로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가면서 화를 자초했습니다. 세계 타이틀전에서 발생한 최초의 사망사고로, 로빈슨은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될 뻔하기도 했습니다. 기소되지 않으면서 법적인 책임으로부터는 피할 수 있었지만 로빈슨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2차 방어전을 가지기 전까지 4차례 논타이틀 경기를 하면서 이 경기들의 수입 모두를 도일의 모친에게 전했고 도일의 모친은 집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2015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일화를 다뤘습니다.

1950년 3월 22일 조지 코스트너를 두 번째로 상대했습니다. 앞서 1945년 첫 번째 경기에서도 로빈슨이 KO로 이겼는데, 코스트너는 로빈슨과의 재대결을 앞두고 '슈거'를 자신의 별명으로 칭하면서 로빈슨을 도발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로빈슨은 '슈거'는 자신의 이름이라며 1라운드 만에 끝날 거니 글러브 터치를 하는 게 좋다고 코스트너에게 경고했고, 자신이 말한 대로 1라운드 2분 29초 만에 코스트너를 KO 시켰습니다.

웰터급 챔피언이 된 후 1950년까지 로빈슨은 총 5번의 타이틀 방어전과 38번의 논타이틀 경기를 치르면서 점점 체중 조절의 한계를 느끼게 됐고, 1951년부터는 미들급으로 월장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세계 미들급 챔피언은 로빈슨에게 첫 패배를 안겼던 제이크 라모타였습니다. 1951년 2월 14일에 라모타에게 도전했는데, 영화 레이징 불에서 묘사됐듯이 로빈슨이 일방적으로 두들기면서 13라운드 TKO승을 거뒀습니다. 혹자는 이 경기를 두고 복싱판 피의 발렌타인이라고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로빈슨은 라모타와의 6경기에서 5승 1패를 기록했습니다.

1951년 6월 26일에 독일에서 유럽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게르하르트 헥트와의 경기에서 2라운드 때 키드니 블로로 KO시키면서 로빈슨의 반칙패가 선언됐다가 이후 무효로 정정됐습니다.

1951년 7월 10일 영국에서 유럽 미들급 챔피언 랜디 터핀을 상대로 판정패하면서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로빈슨의 커리어 사상 두 번째 패배로, 1943년 라모타 전에서의 첫 패배 이후 88연승 행진도 마감됐습니다. 로빈슨이 1950년부터 유럽 각지를 원정 다니며 도전자들을 쓰러뜨려 왔는데, 그런 로빈슨을 꺾은 터핀은 단숨에 영국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1951년 9월 12일 뉴욕 폴로 그라운즈에 6만 명의 관중이 몰린 가운데 열린 터핀과의 재경기에서 10라운드 TKO로 미들급 타이틀을 탈환했습니다. 1951년 링지는 로빈슨을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습니다.

1952년 3월 13일 보보 올슨을 상대로 1차 방어에 성공했고, 같은 해 4월 16일에는 영화 '상처뿐인 영광'의 주인공인 前 세계 미들급 록키 그라지아노를 상대로 3라운드 KO로 2차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2차 방어에 성공한 후 로빈슨은 3체급 석권을 목표로 당시 세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인 조이 맥심에게 도전하기로 하며 미들급 타이틀을 반납했습니다.

1952년 6월 25일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맥심과의 경기에서 체격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이 경기를 주도해 갔지만, 점점 체력이 떨어지며 13라운드 TKO 패했습니다. 당시 39도나 이르는 더위 때문에 10라운드 때는 심판이 교체되는 일도 있었고, 로빈슨은 열사병으로 13라운드 종료된 후 코너에 주저앉았다가 14라운드를 시작하는 공이 울리고도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는 로빈슨의 커리어 첫 TKO패이자 유일한 TKO패였습니다. 경기 후 로빈슨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 후 로빈슨은 쇼 비즈니스를 시작해 노래와 탭댄스를 하지만 사업이 잘 되지 않으면서 1954년 다시 링에 복귀하기 위해 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55년 1월 5일 조 린든을 상대로 6라운드 KO로, 2년 반만의 복귀전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2주 후인 1월 19일 랄프 존스를 상대로 판정패하지만, 다시 4연승을 기록하며 당시 세계 미들급 챔피언인 보보 올슨을 상대하게 됐습니다. 로빈슨도 한물갔다는 세간의 평가가 무색하게 2라운드 KO로 통산 세 번째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1956년 5월 16일 시카고 리글리 필드에서 보보 올슨을 상대로 재대결하는데 이번에도 4라운드 KO로 1차 방어전에 성공했습니다.

1957년 1월 2일 진 풀머를 상대하는데 예상 밖으로 만장일치 판정패하며 미들급 타이틀을 내주지만, 같은 해 5월 1일 풀머와의 재대결에서 5라운드 KO로 다시 미들급 타이틀을 탈환했습니다. 특히 이 경기에서 풀머를 KO시킨 로빈슨의 레프트 훅은 복싱 역사상 가장 완벽한 KO펀치 중 하나로 회자되었습니다.

1957년 9월 23일 前 세계 웰터급 챔피언인 카르멘 바실리오를 상대로 판정패하며 다시 미들급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로빈슨은 1년에 두 번이나 같은 타이틀을 뺏긴, 진기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링지는 바실리오와의 경기를 올해의 경기로 선정했습니다.

1958년 3월 25일 바실리오와의 재대결에서 판정승으로 다시 미들급 타이틀을 탈환, 통산 5번째 미들급 챔피언이 됐습니다. 링지는 이 경기도 올해의 경기로 선정했습니다.

이후 1년 넘게 방어전을 치르지 않으면서 1959년 8월 NBA는 로빈슨의 세계 미들급 타이틀을 박탈했습니다. 뉴욕주 공인 세계 미들급 타이틀만 보유하게 됐는데, 이마저 1960년 1월 22일 폴 펜더와의 경기에서 판정패하며 잃었습니다. 같은 해 6월 10일 폴 펜더에게 재도전하지만 또 지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강적을 상대로 승패를 주고받은 로빈슨이었지만 설욕전에도 실패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1960년 12월 3일 세계 미들급 챔피언이 된 진 풀머를 상대로 도전했으나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1961년 3월 4일 다시 진 풀머에게 도전하지만 이번에는 만장일치 판정패하면서 또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습니다. 이 경기가 로빈슨의 커리어 마지막 타이틀전이었는데, 이후 만 40세가 되고도 로빈슨은 계속 링에 올랐습니다. 전성기 시절 사치와 사업 실패로 인해 돈 벌 수단이 링에 오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1963년에는 유럽으로 원정을 떠나는 등, 타이틀과 거리만 멀어졌을 뿐 여전히 인기는 있었습니다.

1965년 11월 10일 만 44세였던 로빈슨은 당시 미들급 랭킹 1위이며 자신보다 17살 어린 조이 아처를 상대했습니다. 당시 아처는 44승 1패로 전적은 좋았지만 물주먹에 가까울 정도로 펀치력은 가벼운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로빈슨은 7라운드 때 아처의 펀치에 다운되는 등 고전하며 판정패하고 말았습니다. 경기 후 로빈슨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1965년 12월 1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은퇴식이 열렸습니다. 보보 올슨, 진 풀머, 카르멘 바실리오, 랜디 터핀 등이 은퇴식에 참석해 대선수의 마지막을 함께 했습니다.

 

이상으로 슈거 레이 로빈슨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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