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마그넷 정 최정 선수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3루수입니다. 그의 친동생은 내야수 최항이죠. 사사구를 상당히 많이 맞아서 "마그넷 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신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팀의 에이스 겸 4번 타자로 투수와 타자 모두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포수, 내야수, 외야수 모두 가능했던 올라운드 플레이어였습니다. 제38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최고 구속 149Km/h의 공을 던졌던 파워 피쳐로서, 당시 휘문고 김명제, 신일고 서동환과 함께 투수 빅 3로 불리며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타격에서도 밀고 당기는 능력이 뛰어나고, 노림수에 파워도 갖추고 있어 고교 선수 중 가장 약점을 찾기 힘든 타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2003년 전국 대회에서 타격 부문 7관왕을 휩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당시 성남고 박병호와 함께 국내 구단 스카우트들에게도 최고의 고교 타자로 평가받았습니다. 더불어 이들과 함께 제2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청소년 국가대표로 뽑혀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유신고등학교 3학년 시절 청원고등학교와의 봉황대기때는 자신이 투수로 만루 홈런을 맞은 이후, 바로 다음 타석에서 끝내기 만루 홈런을 때린 적도 있습니다. 또한 우익수로 출장했던 선린상고와의 봉황대기 8강전에서는 반보만 밟은채 3루에 정확히 원바운드 송구를 날려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주요 고교 야구 대회에 투수 겸 3루수로 15경기에 출장하여 49타수 23안타, 타율 0.469를 기록하면서 2004년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습니다.
2004년 대붕기 고교야구대회 《도루상》수상
2004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최다 홈런상》수상
2003년 화랑대기 고교야구대회 《도루상》수상
2003년·2004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 2년 연속 《타점상》수상
2003년 미추홀기 고교야구대회 《최우수 선수상》《우수 투수상》《최다 안타상》수상
2005년
유신고를 졸업하고 SK 와이번스의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3억 원, 연봉 2천만 원의 조건으로 입단했습니다. 고교야구와 프로야구의 차이를 경험한 그는 45경기의 1군출장을 하였으며, 5월21일 현대전에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만 18세 나이에 1군 무대에서 홈런을 기록한 선수로 홍현우에 이어 2번째 기록입니다.
2006년
6월 7일 대전 한화전에서 자신의 첫 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는데 9회에 구대성을 상대로 배트가 부러지면서 역전 3점 홈런을 때렸습니다. 이에 구대성이 체격이 크지 않은 고졸 신인타자가 자신의 공을 친것에 믿기지 않는다며 이에 부정 배트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OB 베어스 심정수가 가지고 있던 소년장사 라는 별명을 얻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사령탑을 맡았던 조범현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외국인 선수 시오타니와 피커링을 내보낸 뒤 그를 4번 타자로 기용하기도 했었습니다. 장차 팀의 4번 타자로 키워 보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감독의 생각대로 그는 각 팀의 에이스들을 상대로 중요한 순간에 한 방을 뽑아주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공격력에 비해 수비력은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었습니다.
2007년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혹독한 훈련을 통해 3루수로서 수비의 안정감을 점차 찾아나갔습니다. 또한 3루수 풀타임 리거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이전 연도에 비해 뛰어난 타구처리와 정확한 송구, 핸들링이 좋아졌습니다. 특히 러닝 스로 및 땅볼 처리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그에게 목표의식을 심어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일본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코치로 일하며, 사제의 인연을 맺은 3루수 이마에 도시아키에게 특별히 부탁해 글러브를 얻어다 선물했습니다.
“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너도 이마에보다 나은 3루수가 될 수 있다
”
이렇듯, 공·수 양면에서 성장된 모습을 갖추면서, 7월에 발표된 베이징 올림픽 3차 예비 엔트리에, 최연소 야수로 이름을 올려 주목을 받았으나 아쉽게도 최종 명단에서 탈락했습니다.
2008년
1월 16일 차기 시즌을 위한 연봉 협상에서 전년대비 164.7%가 올라, 이 부문 팀내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2007 시즌에 3루수 풀타임 리거가 된 것과 팀 내 2번째로 많은 타점을 기록한 것에 대한 보상적 측면이 컸습니다. 2008 시즌이 시작되면서 야구팬들에게 또 한번 성장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전반기엔 .327의 높은 타율과 정교함, 정확성의 타격을 선보였고, 6월에만 6개의 홈런을 몰아치면서 여전히 장타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거기다 수비까지 한층 업그레이드 된 모습이었습니다.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3, 4차전 결승타와 5차전 쐐기 적시타를 때려내며 그 해 최연소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2009년
6월 25일, 그는 이날 6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0이닝 1피안타 1볼넷 1폭투로 1실점하여 이날의 패전투수가 되었습니다. 고교야구 시절 투수로 활약한 이후 프로데뷔 후 처음으로 투수로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날 최고 구속은 시속 146km가 나왔으며, 이날 경기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는 '지고 싶지 않았는데 아쉽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2010년
2010년 한국 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와의 2차전에서는 역대 KS 5번째 연타석 홈런을 터트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이날 2차전 MVP가 되었습니다. 지난해 두산 베어스 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4차전 마지막 타석과 5차전 첫 타석에서 연타석 홈런을 터트리며, 역대 포스트시즌을 통틀어 연타석 홈런을 2차례 기록한 타자는 그가 유일합니다.
2011년
시즌을 맞이하면서 그는 조금 더 강한 타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위험 부담을 안고 타격 폼의 변화를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스프링캠프때 좋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시즌 개막 이후 일주일 동안 8푼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폼을 수정해야한다는 부담감과 자신감 저하 상태인 그에게 김성근 감독은 이례적으로 면담을 통해 심리적인 안정을 주게 되면서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을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4월 한달간 타율 0.329, 2홈런, 13타점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5월에 또다시 타격 폼이 흐트러지면서 17타수 무안타로 애를 먹었지만, 지독한 반복 훈련과 끈질긴 노력으로 극복하면서 6월에는 타율 0.447, 5홈런, 20타점을 기록하며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7월에는 팀이 연패에 빠지고, 전체 팀 타선 침체 속에서도 혼자 고군분투하며 ‘최정 와이번스’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팀의 중심을 잘 잡아주었습니다.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처음 4번 타자로 나서면서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 9월 초까지 득점권 타율 리그 1위를 기록하면서 유감없이 클러치 능력도 보여줬습니다. 4번타순에서 타율 0.333을 기록하며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 NC 코치이자, 전 SK 주루코치였던 이광길 코치로부터 야천이라는 별명도 얻게되어 현재 SK 와이번스 팬들이 자주 불러주는 별명 중 하나입니다. 이렇듯 꾸준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2년 연속 3할과 20홈런, 수비에서도 한층 발전된 플레이를 보이며, 골든 글러브 3루수 부문에서 압도적으로 206표를 받아 생애 첫 3루수 골든글러브를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본인에게도 첫 수상임과 동시에, SK 와이번스 팀 창단 이래 3루수 첫 수상이기도 했습니다.
2012년
2012 시즌이 시작되기 전 프로 야구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3루수 부문 랭킹에서 이범호, 김동주 등을 제치고 현역 최고의 3루수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만수 감독 부임 이후 고정 3번 타자로, 시즌 초중반까지 강정호와 홈런왕 경쟁을 펼치면서 팀이 필요로 할 때 홈런과 타점을 뽑아내며 중심타자다운 모습으로 팀 타선을 이끌었습니다. 수비에서도 '3유수' 라는 수비 시프트를 선보이며 더욱 공격적이면서 과감함과 안정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현대 유니콘스 시절 외국인 3루수 톰 퀸런이 서있던 위치와 비슷했으며 수비범위, 강습타구 처리능력, 핸들링이 뛰어난 그였기에 가능한 시프트였습니다. 시즌 후반 한 달이 넘는 아홉수에 걸려 홈런왕 경쟁에 밀려났지만 곧 20홈런을 쳐내면서 24개의 개인 최다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10월 6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SK 와이번스 팀 최초이자 개인 첫 기록인 20-20 클럽에 가입을 했습니다. 3루수 포지션에서 역대 3번째, 15년만에 나온 기록이었습니다. 2005년 프로 데뷔 이후 타율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그는 2개의 최고수비상과 2년 연속 골든글러브 2연패를 달성하며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3루수로 우뚝 섰습니다. 2012년 야수고과 1위를 기록한 그는 2013 시즌 선수 등록 마감 시한을 이틀 앞두고 SK 와이번스와 재계약을 맺었습니다. 2억 8000만원에서 2억 4000만원이 오른 인상률 85.7% 기록, 5억 2000만원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프로 8년차에 구단 최연소로 5억원대에 진입했습니다. 팀내 두 번째로 높은 연봉과 동시에 프로야구 3루수 부문 전체 연봉 1위, 팀 선배 정근우와 함께 같은 인상폭으로 프로야구 역대 8위의 인상 금액 기록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구단이 그의 가치를 인정한 이유 중 하나는 3월에 열리는 WBC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할 경우, 자유계약선수 자격 일수를 채워 1년 빨리 FA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SK 와이번스는 그동안 자팀 FA 선수들을 여럿 놓친 탓에 전력 약화와 팀의 정체성이 흔들릴 위험을 감지한 터라 간판 타자이자 나이 어린 프랜차이즈 스타인 그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타구단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를, 선수 본인에게는 '너는 우리 선수' 라는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연봉협상을 마친 그는 “팬들과 구단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선수가 되겠다”고 각오를 밝혔습니다.
2013년
팀내 선참급과 신인급 사이의 위치에 있는 그가 후배들에게 "개막이 얼마 안 남았으니 몸 관리 잘하자. 시간 약속 등 사소한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면 다들 예민해진다. 시범경기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우리가 잘해서 형들을 도와주자."라며 놓쳐서는 안 될 조언을 전하면서 2013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전반기 내내 주축선수들의 부상과 부진, 그로 인한 신인선수들의 1군진입 등 팀내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도 전반기에 묵묵히 중심을 잡고 팀을 홀로 이끌었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많이 와 책임감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는 그는 시즌 내내 각 공격부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며 8월까지 박병호와 함께 치열하게 홈런왕 경쟁을 펼쳤었습니다. 전반기 내내 득점권타율은 4할에 육박했으며, OPS는 타자 중 전반기 가장 높은 1.064의 수치였고 조정 OPS도 가장 높은 187.08 이었습니다. 2013 시즌 전체 타자 중 RC/27은 8.66 으로 리그 2위 타자였습니다. 그 외에도 4년 연속 3할-20홈런, 2년 연속 20-20 클럽가입, 4년 연속 9할 이상의 OPS 기록, 3년 연속 3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삼성 라이온즈의 박석민, LG 트윈스의 정성훈을 제치고 국내 최고의 3루수임을 입증했습니다.
2014년
3년 연속 야수고과 1위 등 이처럼 빼어난 성적으로 꾸준하게 팀을 이끌어준 팀의 간판타자에게 SK 와이번스는 2014년 연봉협상에서 제대로 예우해줬습니다. 2013년 WBC 대회에서 대표팀이 4강 안에 들었을경우 시즌 종료 후 FA가 되었을테지만, 그렇지 못해 2014 시즌 종료 후 FA가 되는 그에게 작년 연봉 5억 2천 만원에서 34.6% 인상된 7억원을 제시했습니다. 연봉 7억원은 프로야구 비FA선수 역대 최고 연봉이자 구단 역사상 최고 연봉이기도 합니다. 종전 2003년 이승엽과 2001년 이대호가 타이기록했던 6억원, 구단 역사상 정근우가 받았던 최고 연봉 5억원의 기록을 모두 뛰어넘었습니다. 최근 FA시장에서 내부선수들을 모두 놓친 SK 와이번스는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잡는다”라는 분위기가 굳건합니다. 해외 진출을 한다면 모를까, 국내 구단과의 싸움에서는 질 수 없다는 비장함입니다. 구단의 자존심과도 연계된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비 FA 역대 최초 7억원 돌파’ 라는 상징성을 안겨준 이유는 그를 중심타자로 최대한 예우하며 시즌 뒤 FA 협상에서도 우위를 가져가겠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재계약을 마친 최정은 “스프링캠프를 가기 전에 계약을 마쳐 홀가분한 마음으로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 프로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냈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내 한계를 다시 한번 넘어서도록 하겠다. 팀과 나의 목표를 꼭 이루는 시즌을 만들겠다” 며 계약 소감을 밝혔습니다. 또한 자유계약선수을 앞두고 "팬들로부터 '거액을 주고 잡아야 하는 선수'로 인정받고, '저 정도 금액을 줄만 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공수 모두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만들어야겠다. 팬들도 '저 선수는 그 정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을 하실 수 있도록 기량을 끌어올리겠다" 는 각오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시즌 중에 허리부상을 당하며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습니다. 시즌 종료 후 역대 FA 최고액인 4년 86억원으로 재계약했습니다.
2015년
요약 : 기량은 좋지만 건강이 문제. 거액 FA 계약 후 첫 시즌이었습니다. 개막전부터 컨디션 저하로 출전을 못하더니 시즌 내내 잔부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4월 5일 넥센 히어로즈 전에서 만루포 포함 4안타 8타점 2홈런으로 살아나나 싶더니 계속되는 부상과 부진으로 8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고 본인 명성과 86억 몸값에 걸맞지 않은 성적을 냈습니다. 이 때 많은 야구팬은 그를 "먹튀"라고 말하며 비아냥거렸습니다.
2016년
대한민국 최고 3루수
요약 : 올라올 선수는 올라온다. FA계약 두번째 시즌. 4월에 주춤했지만 5월에 살아났습니다. 5월에는 홈런왕경쟁을 펼쳤습니다. 6월1일에는 통산 200홈런달성. 그 이후로는 부진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7월7일 견제사로 아웃되고 김용희감독이 화를 내자 그 이후로는 타격감이 좋아졌습니다. 8월 19일에는 개인 첫 30홈런을 쳤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40홈런! 역시 3루수중 탑입니다.
여담으로 180사구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KBO 역대 최다 사구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데뷔 후 올스타전 첫 출전이었던 2008년에 이어 2010~2012년까지 4차례 모두 감독추천 선수로 선정됐었습니다. 하지만 2013 시즌은 어느 때보다 특별했습니다. 처음으로 팬투표에 의해 베스트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턴리그 3루수 부문에서 박석민, 김동주, 황재균을 제치고 인터넷 및 모바일 합산 1,035,449 표를 받고 당당히 선발출전 선수로 포항 올스타전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올스타전에 열심히 뛰어야겠다"며 "팬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선발 라인업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고 덧붙였습니다. "팬들께서 돈을 주고 경기를 보러오신다. 평소보다 긴장감은 떨어지겠지만 설렁설렁하고 싶지 않다. MVP를 노리기에는 몸이 안 좋지만 해볼 수 있을 때까지 해보겠다"며 옆구리 통증으로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 참가하진 못했지만 본경기에선 교체없이 풀로 경기를 뛰며 첫 올스타 팬투표로 선정해준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본래 좌타석에서도 능숙하지만 프로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2005년 2008년 시즌 초반 언더핸드, 사이드암 투수에게 약점을 보이며 좌타석에 들어선 기록이 있지만, 스위치 타자로 활약하기엔 버거운 점들이 많아 우타석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포수, 내야수, 외야수, 투수를 모두 볼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입니다. 그러나 프로에서는 주로 3루수를 보고 있습니다.
장타력이 뛰어나고 손목 힘이 좋습니다. 팔로 스로우 동작이 좋고 타구 방향은 좌측으로 많이 올리는 당겨치는 스타일입니다.
직구에는 가운데, 몸쪽 빠른 공을 좋아하며 이때의 배트 스피드가 빠릅니다.
가운데, 바깥쪽 슬라이더에 강하고 컨디션이 좋을 시에는 슬라이더를 밀어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당겨칩니다.
바깥쪽 체인지업에 강하며 실투를 놓치지 않습니다.
커브와 싱커는 높은 볼을 좋아하며 결대로의 타격을 합니다.
낮은 포크볼에 주로 속으며 특히 다른 타자에 비하여 원바운드 볼에 배트가 잘 나갑니다.
2009년 제2회 WBC 야구 대회
프로 데뷔 후 첫 국가대표 A대표팀으로 발탁되었던 대회였습니다.
당시 주전 3루수 자리를 두고 이범호와 경합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주전 유격수로 유력시됐던 박진만이 부상으로 완전히 이탈함으로써 유격수 박기혁, 3루수 이범호, 내야 유틸리티 최정으로 멤버를 꾸려 엔트리를 확정지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겐 첫 국가대표팀이었던 것만큼 아주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2라운드 일본과의 순위 결정전에서 유격수로 첫 선발 출장했던 그는 5회까지 2타수 무안타, 유격수 수비도 매끄럽지 못했었습니다. 대표팀 타자 중 유일하게 타석에 들어서 보지 못해 경기 감각도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전을 앞두고 3루수 이범호의 감기 몸살 증세로 처음으로 자신의 본 포지션인 3루수로 선발 출장을 하게 됐습니다. 6경기를 출장해 7타수 무안타 1타점으로 첫 성인대표 대회를 아쉽게 마무리했습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10년 9월 6일, 11월에 열리는 광저우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프로 데뷔 2번째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주전 3루수 자리를 놓고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소프트뱅크의 이범호와 경합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기술위원회는 국내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최정을 주전 3루수로 발탁했습니다. 11월 13일 대만과의 예선 1차전, 다음 날 홍콩전 예선 2차전에 선발 출장하였으며, 타격감이 예상 외로 떨어져 있던 점과 컨디션 조절 실패로 11월 18일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선 타격감이 최고조였던 주전 유격수로 발탁됐던 강정호가 3루수로 출장하여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대만과의 결승전 때에는 그를 대신하여 강정호가 유격수 대신 3루수로 선발 출장하였으며, 9회 초 5번 지명 타자 이대호를 대신해 대타로 출전하여 중전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대회에서 4경기를 출장해 10타수 4안타 1타점 4득점 1사구 타율 4할을 기록하였습니다.
2013년 제3회 WBC 야구 대회
개인통산 3번째로 국가대표팀에 합류했습니다. 대표팀 2루수 정근우와 함께 유일하게 백업없이 주전 3루수로 발탁되었으며, 기술위원회와 대표팀 사령탑 류중일 감독은 두 선수가 프로 리그에서 보여준 빼어난 기량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같은 엔트리를 구성했다고 밝혔습니다. 합숙훈련기간 동안 류중일 감독은 타격감이 좋지 못했던 그에게 이례적으로 1:1 레슨을 해주면서 그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2월 15일 대만 도류구장에서 수비훈련 도중 갑자기 바운드가 튄 펑고 타구에 맞아 눈두덩이가 찢어지는 아찔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검사결과 눈에는 큰 이상이 없었으며, 눈두덩이 부위를 7바늘이나 꿰매야만 했습니다. 이 부상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겨 경기를 치르는 내내 수비에 대한 두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예선 1라운드 1차전 네덜란드 전에서 선발 9번타자로 나와 대표팀 타자들 중 유일하게 멀티히트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선 2차전 호주 전에서는 6번 타자로 나와 2개의 사구를 얻어내며 출루하였고, 안정적인 수비도 함께 해주면서 팀 승리에 보탬이 되었지만 마지막 대만전을 앞두고 훈련도중 왼쪽 허벅지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2경기를 출장하여 6타수 2안타 1타점 2사구 타율 0.333을 기록했습니다.
유신고등학교
평촌중학교
대일초등학교
KBO
한국시리즈 MVP : 1회 - 2008
골든 글러브 : 3회 - 2011, 2012, 2013
홈런왕 : 1회 - 2016년
국제대회
아시안 게임 금메달 : 1회
이상 최정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