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박지철 선수입니다~!
현재는 부산 신정중학교 야구부 감독입니다.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롯데 자이언츠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였습니다. 1997년 14승 5패 7세이브, 2.45의 방어율을 기록했으나, 이듬해에 단 2승에 그치면서 부진에 빠졌고 1999년에는 재활군에 머물렀습니다. 2001년 13승 7패로 데뷔 후 두 번째로 두자리 승수를 기록하면서 손민한과 함께 팀의 원투펀치를 이루었습니다. 2002년에는 부상으로 5경기 출장에 그쳤고, 2003년 4월 6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심정수의 얼굴을 맞혀 KBO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심정수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당시 프런트를 맡고 있었던 염경엽의 제안을 받아 이 때부터 얼굴보호 헬멧을 사용하게 됩니다. 4월 20일 대전 한화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해 6회 2사까지 무실점 호투로 팀을 개막 12연패 뒤 첫 승을 선사했으며, 이후 그는 롯데 자이언츠가 연패에 빠질 때마다 호투하면서 팀을 연패에서 구해 냈습니다. 하지만 어깨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2007년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되었고, 1년 간의 휴식기를 가진 후 2009년 LG 트윈스에 이적했지만 1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2009년 8월 23일 서승화가 이병규를 폭행한 사건이 드러나 시즌 아웃되자 서승화를 대신하여 1군에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친정 팀과 맞붙었던 경기에서 2와 1/3이닝 동안 4안타 3실점 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고, 1군 3경기에 등판해 2패 평균자책 13.50에 그친 채 8월 30일 대전 한화전을 끝으로 다시 2군으로 내려갔습니다. 시즌 후 방출되어 현역에서 물러났습니다.
2010년에 창단한 부산 신정중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동삼초등학교
토성중학교
동래고등학교
신라대학교 교육대학원
주형광과 입단 동기로 1994년에 입단했는데, 실제 입단할 때는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무도 불러 주는 구단이 없어서 입단 테스트를 거친 다음에야 연봉 600만원의 연습생으로 입단했던 철저한 무명 투수였습니다. 1994년은 롯데 주축 선수들의 상당수가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하며 홈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해 선수층이 많이 얇은 관계로, 성적보다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해로 방향성을 잡은 해였습니다. 그로 인해 개막전 선발을 프로 입단 후 투수로 전업한 신인 강상수가 맡았고, 그제껏 거의 원포인트나 패전처리로만 기용되던 가득염이 그 시즌 풀타임 선발 투수로 활약했을 정도였습니다. 박지철 선수도 그런 팀 사정 덕택에 개막전부터 1군 엔트리에 들 수 있었고, 실제로 개막전에서 3번째 투수로 등판하며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주로 계투나 패전처리로 14경기 32 2/3 이닝을 던져 2.2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같이 입단했던 600만원의 연습생 멤버들 중 유일하게 정식 계약으로 살아남은 케이스.
1995년에 롯데는 위에서 언급한 방위병들이 대거 제대하여 돌아와 전력이 급상승한 덕택에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준우승을 기록했는데, 박지철 선수는 이해 계투 겸 땜빵 선발로 활약하며 팀에서 없으면 아쉬운 레귤러로 성공적으로 안착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초반부터 치고 나가는 팀이 아닌 포스트시즌 진출을 놓고 다투는 팀들은 잡을 경기는 확실히 잡고 버리는 경기는 버려버리는 전략이 대세였는데, 롯데에서는 이 버리는 경기의 선발 투수를 박지철 선수가 전담해서 5~6이닝을 꾸역꾸역 버텨준 덕택에 버리는 경기가 해 볼만한 경기로 바뀌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심심찮게 승리를 따내곤 했습니다. 시즌 성적은 5승 4패 3.9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습니다.
1996년부터는 에이스 윤학길의 부상과 염종석의 시즌 아웃으로 인해 풀 타임 선발로 활약했습니다. 이 해 1승 9패 평균자책점 4.70의 안습한 성적을 남기며 밑천이 드러난게 아닌가라는 의심도 들었지만 1997년 특유의 낙차 큰 커브를 앞세워 14승 5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45로 롯데의 에이스로 대활약했습니다. 올스타전에서 당시 최고타자 이종범을 풀 카운트 끝에 폭포수 커브로 헛스윙 삼진을 잡았던 장면이 그야말로 백미. 이 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시즌이 한창일 때 김현욱과 박지철 선수는 다승왕을 비롯한 여러 타이틀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박지철 선수가 농담조로 '너무 열내지 말고 사이좋게 타이틀 나눠먹자'라고 했는데, 그 말이 있고나서 갑자기 김현욱이 포풍처럼 승을 쓸어담아 버렸습니다.
1997년의 대활약을 밑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었지만,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오른쪽 어깨 부상. 이 심각한 오른쪽 어깨 부상 때문에 1998년 2승 11패 방어율 7.73의 극도의 부진을 보였고, 어깨 수술로 1999년 시즌을 통으로 날렸습니다. 때문에 전설의 1999년 플레이오프 때도 불참.
2000년 복귀해서는 6승 9패 방어율 4.60을 기록했습니다. 2001년에는 다승왕 손민한을 받치면서 13승 7패 4.03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선전했으나, 야구 팬이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롯데의 암흑기인 8888577이 시작된 때라 결국 가을 야구는 못 했습니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가을야구는 더 이상 못 했습니다.
박지철 선수는 이 시기 손민한과 함께 롯데 선발진의 축으로 고군분투하지만 2004년 이후 어깨 부상이 재발하여 많은 이닝을 던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2006년 롱 릴리프로 꽤 좋은 모습을 보여줘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높였으나, 2007년 갑작스런 구위 저하로 거의 2군에만 머물다가 시즌 끝나고 롯데에서 방출되었습니다. 방출 당시 나이가 고작 32세밖에 안 된 것으로 미뤄 짐작컨대 더 이상 재기하기 힘들다고 구단 측에서 판단한 듯.
1년 휴식 후 2009시즌을 앞두고 LG 트윈스에 입단 테스트를 받고 입단했는데, 노쇠화의 여파로 2군에만 머물렀습니다. 8월 23일 사직 롯데전에 시즌 첫 선발로 등판했는데, 원래 이 날 경기는 서승화가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승화가 2군에서 작뱅을 폭행한 사건이 드러나 잔여 시즌 출장금지 처분이 내려지면서 서승화 대신 선발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2009년 단 3경기에만 등판하여 2패만 기록했으며, 시즌 종료 후 다시 방출되어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의 기준으로도, 꽤나 준수한 외모를 가진 선수였습니다. 얼굴 보고 좋아하는 여성 롯빠도 많았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2010년 새로 창단된 부산 신정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후진양성에 힘 쓰고 있습니다.
이상 박지철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