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前 프로 야구팀 쌍방울 레이더스

Talon 2020. 1. 29. 17:28

오늘 소개할 팀은 바로~

쌍방울 레이더스입니다~!


KBO 소속으로,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과 군산월명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습니다. 초대 감독은 김인식이었습니다.
1990년 3월 31일에 구단이 창단된 후, 1990년 5월 11일 프로 2군 리그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1991년 시즌부터 1군 정규리그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매년 하위권을 맴돌았으나,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는 1996년 정규시즌 2위, 1997년에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하면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였습니다.

 
약팀의 이미지를 조금씩 벗겨 내면서 서서히 강팀으로 변모하고 있을 즈음에 IMF 사태를 맞게 됩니다. 경제 위기의 여파로 인하여 모기업인 쌍방울 그룹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도 극심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으며, 1997년 10월 15일에 모기업인 쌍방울 그룹이 부도가 났습니다. 이때 이후 주축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하는 악순환이 발생했습니다. 1998년부터 돈도없는 힘든 구단 사정으로 성적은 바닥을 기었습니다. 이에 진정한 팬들이 힘을모아 야구 최초의 서포터를 결성하게 됩니다. 최초의 야구서포터 포레버 레이더스는 전주대생 여용구씨를 필두로 약 100여명의 골수 팬들이 홈.원정 가리지않고 경기장을 찾아 힘든 시절을 겪는 선수들에게 큰힘을 보태었습니다. 그러나 팬들의 바램에도 결국 쌍방울 레이더스는 2000년 1월 7일에 해체되었고, 기존 선수단과 코칭스태프, 신인 지명권은 SK 와이번스에 인계되었습니다. 쌍방울은 1999년 8월 회사 정리 절차 인가가 결정되었고 대한전선 계열로 넘어가 "트라이 브랜즈"라는 이름으로 변경했으나 최근 다시 쌍방울로 환원되었습니다.

 
그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지였던 전라북도는 무연고 지역이었으나 2001년 KIA 타이거즈에 반환되었고, 그 해 이후부터 매년 2001년 부터 2013년까지 군산시에서 경기를 치뤘는데 2002년에는 미약한 경기장 사정과 적은 수익, 2003년에는 전국체전 관계로 프로야구 경기가 개최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구장 개보수 관계로 3년 동안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통산 성적은 10시즌, 1202경기 490승 674패 38무, 승률 0.420이었습니다.


창단과 프로리그 참가
한국 야구 위원회는 1989년에 신생팀 '제 8구단' 창단을 결의하고 희망 기업을 선정하게 됩니다. 신생팀의 연고지는 전라북도 지역으로, 홈 경기장은 전주 야구장으로 하였습니다. 창단 과정에서 전라북도 연고권은 당시 전라도 지역 연고팀이었던 해태 타이거즈로부터 구입하였습니다. 본래 창단 과정에서는 쌍방울그룹과 미원그룹의 컨소시엄 형태로 창단을 추진했으나, 후일 미원그룹이 창단 과정에서 빠지게 되었으며 쌍방울은 프로야구단 창단에 앞서 1983년 프로축구 출범 후 미원 금호 해태 등 여러 호남지역 기업과 함께 몇 차례 호남 프로축구팀 창단에 도전했지만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1990년 창단 당시 1년간은 2군 리그에서 경기를 치렀고, 1991년부터 정식 프로 야구 팀으로 승격되어 1군 정규 리그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1991년 ~ 1995년
신생 창단 팀 쌍방울 레이더스는 대주주 모기업의 규모가 작았기에 야구단 운영에 고질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8개구단 팀들과 전력을 비교하면 선수진이 얇았었습니다. 쌍방울 구단은 신생 창단된 팀으로 선수들이 부족한데다 자금력이 탄탄한 편이 아니었고, 연고지인 전라북도 지역 역시 그렇게 우수한 팜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로 타 팀에서 전성기가 지난 선수들을 많이 영입해서 효과적으로 이용했었습니다. 특히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들이 쌍방울로 많이들 넘어왔습니다. 이 시기에 쌍방울은 해태 타이거즈의 작은집으로 불렸지만 성적은 매년 하위권으로 아쉬웠습니다.

 
1996년 ~ 1999년
매년 하위권 팀으로 분류되었던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6년에 김성근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감독으로 부임한 김성근의 지도 하에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6년 정규 시즌 2위를 기록하여 돌풍을 일으켜 창단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현대 유니콘스를 맞아 5차전 접전 끝에 2승 3패로 분패하였습니다. 그 다음 해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하여 1996년 시즌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만, 준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패해 4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지만, 1996년과 1997년 시즌 성적을 놓고 보면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은 기존의 약팀의 이미지에서 강팀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12월, IMF 사건이 터지면서 모기업이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 역시 여파를 미치게 되어 구단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재정난을 심각하게 겪으면서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은 구단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핵심 선수들을 상대로 '선수 팔기'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무렵 1차 지명하였던 원광대 투수 조진호는 결국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하였습니다. 결국 1998년 박경완과 조규제는 현대 유니콘스로, 1999년 시즌 전에는 김기태와 김현욱은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하는 등 쌍방울 레이더스 핵심 선수들 대부분이 이러한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의 극단적인 '선수 팔기' 작업에 의해 팀을 떠남으로써 구단의 전력은 바닥을 치게 됩니다. 1998년 시즌 중에는 재일동포 외야수 김실을 OB 베어스로 트레이드했습니다. 이와 함께, 1998년 시즌 중에는 한때 좌완 에이스였던 박성기를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했는데 다음 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한 뒤 그 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바 있었지만 같은 해 시즌 후 은퇴했었습니다.

 
1998년부터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되자, 쌍방울 레이더스의 야구단 운영은 더욱 가혹해지는데, 비싼 돈을 주고 선수를 쓸 수 없었고 중도 퇴출되어도 마땅히 대체 선수를 데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98년에는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즌에는 김기태, 최태원, 조원우, 김원형 등이 활약하여 정규 시즌 6위로 마쳤습니다.

 
1999년이 되어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만 갔습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9년에 제이크 비아노, 전해 LG 트윈스에서 마무리로 뛰었던 마이클 앤더슨 등 투수 용병 선수를 영입하였지만, 이들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열악한 시설 환경과 김성근 감독의 훈련량에 못 따라가 시즌 6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는 등 극심한 부진을 보여 중도 하차했습니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는 일부 대학 진학자를 제외한 고졸 선수들의 지명을 포기하고, 2차 1순위로 지명한 한양대학교 투수 라형진은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권을 양도했으며, 1차 지명자인 군산상고의 이진영만 계약했을 정도였습니다.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이승호와 엄정욱 등을 지명하지만, 2차 1순위로 지명한 투수 마일영의 지명권을 현대 유니콘스에게 매각할 정도였습니다. 구단 대주주였던 모기업인 쌍방울이 사실상 팀 운영을 할 수 없게 되면서 KBO에 의한 위탁 관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투타의 핵심 선수들이 매년 현금 트레이드 등으로 팀을 떠났기에 결국 빈약한 선수층으로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었고 시즌 중 김성근 감독마저 올스타전이 끝난 날 성적 부진에 따른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해임되면서 김준환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어 팀을 맡지만 1999년 시즌 단일 시즌 최다 패 기록인 97패를 기록하면서 마지막 시즌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IMF 여파로 극심한 재정난을 겪어야만 했던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은 1998년부터 주축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선수 팔기' 작업식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마지막 해였던 1999년에는 신인 지명자들 중 1차 지명한 군산상업고등학교 외야수 이진영만 계약하고 2차 1순위로 지명한 한양대학교 투수 라형진은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권을 양도하였으며, 다른 선수들 중 몇몇 대학 진학 선수들을 제외한 고졸 지명 선수들과는 계약하지 않을 정도로 운영난을 보였습니다. 1999년 7월 16일 이의철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가 박용오 KBO 총재와의 비밀 회담에서 최초로 매각 의사를 밝히게 됩니다.

 
하지만 매각 협상은 지지부진하여 진전이 없었고, 결국 1999년 11월 16일, 쌍방울 레이더스 김종철 신임 구단주는 박용오 KBO 총재와의 회담에서 '2000년 시즌 팀을 꾸려 나갈 능력이 없다'고 최초로 밝혔습니다.

 
이때, 프로 야구단에 관심을 보인 SK그룹은 쌍방울과의 협상을 철저히 배제하고, KBO와 접촉하며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의 인수가 아닌 새로운 구단의 창단으로 KBO 리그계에 뛰어들 계획을 갖게 됩니다. 법정 관리 중인 쌍방울 입장에서는 야구단을 넘기는 인수 조건으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 내길 원했지만, SK그룹은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자동적으로 퇴출되는 쌍방울과 만날 이유가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즉, SK그룹은 쌍방울이 자동으로 퇴출되는 2000년 2월 12일까지 기다렸다가, 새로운 팀 창단의 수순을 밟는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양쪽 다 팽팽하게 '줄다리기'식으로 매각 당사자들은 버티기만 했었습니다.

 
결국, 쌍방울은 얼마 못 가 2000년 1월 7일 해체를 선언하고, SK그룹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SK그룹이 KBO 리그에 참여할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게 됩니다.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는 해체되었고, SK는 인수가 아닌 새 팀의 창단으로 레이더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해체 후 재창단이라는 과정을 거친 SK 와이번스는 당시 현대 유니콘스가 연고지를 이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연고지를 인천광역시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인천 연고 구단으로 독자적인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훗날 히어로즈의 창단 과정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히어로즈 또한 현대 유니콘스 해체 후 재창단의 과정을 거쳐 현대와 히어로즈의 연결고리를 끊고, 현대가 KBO에 운영 자금으로 진 빚 131억을 갚지 않을 명분을 얻게 되고 역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팀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고, 1991년 투수 조규제가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다승, 평균자책점 : 1997년 김현욱 20승2패,  157 2/3 - 33 - 1.88
최다 세이브 포인트 : 1993년 조규제 7구원승 27세이브 34SP
최다 세이브 : 1991년 조규제 27세이브


수위 타자
1995년 김광림 419타수 141안타 타율 0.337
1997년 김기태 390타수 134안타 타율 0.344


최다 안타 : 1995년 최태원 147안타
최다 홈런 : 1994년 김기태 25홈런


최고 장타율
1994년 김기태 0.590
1997년 김기태 0.636


최고 출루율
1992년 김기태 0.461
1997년 김기태 0.453


이상 쌍방울 레이더스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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