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스포츠 해설가 양준혁

Talon 2013. 5. 26. 17:00

오늘 소개할 선수는 양신 양준혁 선수입니다!


양준혁 선수는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SBS와 SBS ESPN의 야구 해설가입니다. 타격 폼이 마치 만세를 부르는 것과 같아서 붙여진 ‘만세 타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프로 야구 선수 시절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했고 ‘양신’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사촌 형은 투수 출신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 양일환 코치이죠.


영남대학교를 졸업한 뒤 1992년 삼성 라이온즈가 김태한 선수를 1차 지명하면서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게 되었지만 입단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했습니다. 병역 결정을 위한 신체검사 당시 상근 예비역으로 판정을 받으면서 1년 간의 현역 생활 이후 방위병으로 전환해 복무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방위 복무 전환 이후 1993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데뷔 첫 해에 타율 0.341로 타격왕에 오르고, 이종범 선수와의 경쟁 끝에 신인왕에도 올랐으며,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신인으로서 타격왕을 차지한 유일한 선수이죠. 그해 130안타를 시작으로 2008년까지 16년 연속 100안타 기록을 달성했고, 1996년과 1998년에는 최다 안타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 2005년, 2008년, 2010년 시즌을 제외하고는 모두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해“배트를 거꾸로 잡고 쳐도 3할”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2005년 6월 25일, 13시즌 만에 1772개의 안타를 쳐서 장종훈 선수의 개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특유의 만세 타법으로 장종훈 선수에 이어 ‘기록의 사나이’란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이어 2007년 6월 9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 지금까지 골든 글러브를 모두 8차례 수상했습니다. 프로 야구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1993년 초대 챔피언에 등극한 데 이어 1998년과 2001년에도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 최다 수상을 했습니다. 2008시즌에는 1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부진을 보이며 처음으로 시즌 도중 2군으로 내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2002년, 2005년, 2008년, 2010년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 3할대 타율을 기록하고, 15시즌 동안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 내는 등 꾸준한 활약을 보였습니다.




한때 임창용 선수를 상대로 한 트레이드로 삼성 라이온즈를 떠나 1999년 해태 타이거즈와 2000년 ~ 2001년 LG 트윈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2001 시즌이 끝난 뒤 FA를 선언하여 친정 팀에 복귀해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습니다. 2008년 준 플레이오프 때 포스트시즌 최고령 홈런을 기록하였습니다. 2009년 5월 9일에는 대구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기존 장종훈 선수가 가지고 있던 한국 프로 야구 통산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양준혁 선수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통산 기록은 통산 안타 수와 통산 홈런 수라고 합니다. 특히 통산 홈런의 경우 시즌 홈런 1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음에도 통산 홈런 갯수로 1위를 기록했다는 것에 대해 자기 스스로 놀랐다고 합니다. 매 시즌 꾸준히 20개 정도 홈런을 친 게 누적이 되어서 이런 기록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별개로 가장 의미를 두는 기록은 통산 사사구 기록이라고 합니다. 타자로서 출루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타자가 살아 나갈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는 사사구와 출루율이야말로 타자에게 가장 중요한 부문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야구 선수 시절 최고의 순간으로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이승엽 선수, 마해영 선수의 백투백 홈런으로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확정지었던 순간을 꼽았습니다. 양준혁 선수로선 아마추어 시절부터 통틀어 소속 팀이 우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뿐더러 삼성으로서도 1985년 전·후기 시즌 통합 우승을 한 것 외에 단기전 한국시리즈를 통해 우승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 의미 있고, 더 많은 감격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김응룡 감독의 도움으로 FA를 통해 극적으로 친정 팀에 돌아온 첫 해이기도 했거니와 팀내 선배로서 힘겹게 후배 선수들을 이끌며 일궈 낸 값진 우승이었기에 그 보람이 더 컸다고 합니다.


2010년 7월 26일, 그는 현역에서 은퇴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2010년 9월 19일 홈구장인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은퇴식 및 은퇴 경기를 치렀으며, 이날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마지막 송은범 선수와 대결에서 내야 땅볼에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보여 양준혁 선수다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의 등번호 10번은 삼성 라이온즈에서 2번째 영구 결번이 되었으며, 한국 프로 야구 9번째 영구 결번이 되었습니다.


당초 2011년 2월 미국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을 계획이였으나 영남대학교 대학원 진학과 임용수 캐스터와의 친분으로 SBS와 계약하면서 2011년부터 SBS와 SBS ESPN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게 됩니다.


양준혁 선수는 양일환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 코치가 그의 사촌형이고 삼촌 또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투수 출신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사촌 형과 삼촌이 야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그는 야구에 흥미를 느껴 자신도 야구를 하겠다고 부모에게 말했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이유로 부모는 처음에 양준혁 선수가 야구를 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양준혁 선수의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강해, 결국 가족들에게 허락을 받고 남도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투수였던 양준혁 선수는 왼손잡이에 공도 빠른 편이었으나 투수를 하면 팔이 아파서 싫어했습니다. 경운중학교를 거친 그는 대구상업고등학교 때 타자로 전향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미 학교의 4번 타자를 맡았으며, 당시에는 몸이 마르고 힘이 없어 홈런이 많지는 않았으나 지금과 달리 도루를 잘 하는 편이었고 타율도 높았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1988년 당시 만 19세로 프로 데뷔가 가능한 나이였으나 스스로 영남대 입학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당시 박영길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그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서울특별시 소재 대학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삼성에서의 데뷔를 위해 영남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 선수 시절 동안 오늘날 프로에서의 활약만큼이나 많은 기록과 수상 경력을 쌓았습니다. 1988년에 있었던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5할을 훨씬 넘은 5할 4푼 5리의 타율을 기록해 대학 선수권 타격상을 받았고, 이후 1989년에는 대학 추계 리그에서 도루상 또한 수상했습니다.


1988년과 1989년, 아마추어 야구에서 실력을 인정받게 된 양준혁 선수는 생애 처음으로 국가 대표로 발탁되어 제2회 한·미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게 됩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에서 개최되는 제 9회 대륙간컵에도 국가대표로 출전했습니다. 두 번의 국가대표팀 활동에서 그는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팀은 우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대만에서 열린 제2회 IBA회장배 대회에 다시 국가 대표로 출전하여 우리나라가 우승하면서,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래 처음으로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에는 전국대학 춘계리그에 출전하여 추계 리그에 이어 다시 한 번 도루상을 수상하였고,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 대회에도 국가 대표로 출전했습니다.


1991년 영남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각 팀들의 지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신인이었지만 이미 국가 대표 클린업 트리오 중 한 명이었을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모든 구단이 탐내는 선수였습니다. 물론 그는 삼성 이외의 팀에는 입단할 생각이 없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타력에 비해 투수력이 약했던 삼성은 당시 '만딩고' 김상엽 선수 외에는 믿을 만한 투수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140km 대의 빠른 구속을 가진 좌완 신인 김태한 선수도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연고 구단이 1차 지명할 수 있는 선수는 딱 한 명이라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에 삼성이 묘수를 냈습니다. 삼성은 199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먼저 김태한 선수를 연고 지명 케이스인 1차 지명으로 확보한 뒤 이듬해 드래프트에서는 양준혁 선수를 1차 지명해 사자 유니폼을 입혔던 것이죠. 이것은 2차 지명의 시효가 1년이라는 제도의 허점을 파고든 것으로, 1991년 당시 삼성은 일단 김태한 선수를 1차 지명한 뒤 양준혁 선수와는 모종의 합의 하에 상무 입대를 선언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쌍방울이 양준혁 선수를 2차 지명했으나 이미 그의 상무 입대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삼성은 방위 복무로 전환하게 되어 1993년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 다시 나온 양준혁 선수를 1차 지명하여 거둬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몇몇 구단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이후 KBO는 2차 지명의 효력을 1년에서 3년으로 연장했습니다.


한편 1991년 11월 1992년 신인 드래프트가 있기 전, 양준혁은 제25회 대통령기에 출전해 타점상을 받았고, 또한 제 41회 백호기에 출전하여 도루상을 차지해 대학 시절 도루상을 3번이나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삼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입대한 그는 병역 결정을 위한 신체 검사 당시 상근 예비역으로 판정을 받아 1년간 현역병 생활을 한 후 방위병으로 전환해 복무하였습니다. 상무 시절 대통령배 추계 실업리그에 나가 홈런왕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외에 여러 경기에 출전하여 좋은 기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전까지는 몸이 말랐으나 상무 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서 프로 첫 해까지 82kg로 몸무게가 불어났습니다. 제대 후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지명권이 1년이었기 때문에 자동 말소되었고, 약속대로 1차 지명을 다시 받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상무 피닉스 야구단의 박치왕 감독은 양준혁 선수와 상무 동기이죠.


양준혁 선수가 쌍방울의 지명을 거부하며 상무에 자진 입대를 택했을 때 그와 삼성 사이의 밀약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쌍방울의 감독이었던 김인식 감독 및 대부분의 야구 관계자들이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양준혁 선수가 1993년 제대한 뒤 결국 삼성에 입단하게 되자, 제도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KBO는 2차 지명의 보호권을 3년으로 늘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과 양준혁 선수 간의 밀약의 존재는 정황상의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으므로 정작 당시에는 이 사건의 파장이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5년 후 양준혁 선수가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을 때, 오랜 잠적 끝에 가진 인터뷰에서 과거 트레이드 당시 있었던 삼성과의 모종의 거래를 폭로하면서 문제가 크게 불거졌습니다. 그는 1991년 삼성이 일단 급한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 김태한 선수를 1차 지명한 후, 자신을 1차 지명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도록 권유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당시 2차 1순위권자였던 OB에서 백지 수표와 아파트를 제의했지만 거절했으며, 2차 2순위권자였던 쌍방울이 지명하였지만, 삼성의 권유대로 상무에 입대하고 난 뒤 월급조로 삼성으로부터 매달 100만 원씩을 받았다는 사실도 함께 밝혔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해태의 김응룡 감독은 "양준혁을 회유하여 팀에 입단하게 한 삼성의 행위를 문제 삼기 위해 구단이 직접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양준혁 선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해태는 '양준혁의 삼성 입단은 명백한 규약 위반이다'라며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에 KBO는 삼성에 1993년 양준혁 선수의 입단경위서 제출을 요구했습니다.


삼성은 이러한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다가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 생각나지 않고, 경리 장부에 매월 100만 원의 지출 내역이 있는지 확실치 않다. 일단 확인 작업을 거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후 양준혁 선수가 해태로의 이적을 동의하게 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여론의 관심도 잠잠해졌고, 점차 대중의 기억 속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양준혁 선수는 삼성이 1993년 1차 지명함으로써 드디어 자신이 오래전부터 원했던 구단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고, 역대 타자 최고액인 계약금 1억 100만 원, 연봉 1800만 원에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1993년 4월 10일, 그는 자신의 프로 첫 경기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임창식 선수로부터 첫 안타를 뽑으며, 5타수 5안타를 치는 무서운 활약을 선보였고, 그후로도 계속 놀라운 활약을 펼치며 신인임에도 팀의 3번 타자로 꾸준히 출전하였습니다. 당시 여러 전문가들은 양준혁 선수, 김성래 선수, 강기웅 선수, 이종두 선수가 있는 삼성의 중심 타선을 문제로 지적하고, 약체로 취급하게 하였으나 신인 양준혁 선수의 대활약과 부상에서 돌아온 4번 타자 김성래 선수 및 이종두 선수의 활약으로 팀은 준우승까지 하였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데뷔 첫 해 MVP 경쟁을 하게 됐는데, 그 경쟁자는 같은 팀 선배인 김성래 선수였습니다. 정규 시즌에서 후반기로 갈수록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타율면에서는 양준혁 선수가 0.341로 0.300인 김성래 선수를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득점에서도 양준혁 선수가 82점으로 64점인 김성래 선수를 앞서갔고, 양준혁 선수는 홈런에서 밀렸으나 타점에서는 1점 차이로 뒤진 채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김성래 선수가 아무리 홈런 기록이 양준혁 선수보다 앞서간다고 해도 만약 타점면에서 양준혁 선수한테 뒤지면 MVP는 같은 팀 후배인 양준혁 선수에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MVP 경쟁에서 삼성 구단은 MVP 김성래 선수, 최우수 신인 선수를 양준혁 선수로 정했으며, 우용득 감독은 남은 두 경기에서 양준혁 선수와 김성래 선수를 모두 내보내지 않았고, MVP 투표에서도 홈런왕과 타점왕인 김성래 선수가 압도적인 표를 받고, 득점면에서 김성래 선수에게 앞서가고, 수위 타자였던 양준혁 선수는 단 2표만 받고 MVP는 김성래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한 팀에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배출시킨 경우는 1985년 해태 타이거즈의 김성한 선수와 이순철 선수에 이어 2번째였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삼성 라이온즈 최초의 신인왕이 되었습니다.


1993년 이후로 양준혁 선수는 1994 시즌에는 타점왕을 기록하고, 1995 시즌에는 특별한 성적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1996 시즌은 최초로 전 경기 출장과 3할 4푼 6리로 수위 타자가 되었고, 28홈런과 23도루로 양준혁 선수는 20-20을 기록했고, 20-20을 기록한 날짜는 1996년 8월 15일이죠. 그는 프로 데뷔 첫 20-20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고, 또 20-20 클럽에 가입한 양준혁 선수는 팀 사상 최초로 20-20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2007 시즌에는 역대 최고령 20-20 클럽에 가입하였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20-20 을 4번 달성해 박재홍 선수와 함께 최다 20-20 달성 선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6년에 양준혁 선수는 20-20클럽을 성공해 MVP에 다시 도전하게 됩니다. 타율 3할 4푼 6리와 28홈런, 또 23도루를 기록해 MVP에 뽑힐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성은 팀 사상 최악의 성적인 6위와 첫 30-30을 기록한 박재홍 선수, 다승왕과 최고의 마무리였던 구대성 선수로 인해서 양준혁 선수는 MVP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전 MVP를 뽑을 때나 지금에도 MVP를 뽑을 때 팀 성적이 나쁘면 여전히 MVP로 뽑히기 힘들어집니다. 팀 성적이 나쁜 양준혁 선수는 삼성이 만약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늘어났을 것이죠. 그러나 1996년 삼성은 6위라는 성적을 기록했으며, 첫 30-30을 기록한 신인 박재홍 선수, 다승왕과 최고의 마무리였던 구대성 선수가 문제점이 되어서 MVP 투표에서 양준혁 선수는 최고 수위 타자와 최다 안타, 장타율 1위를 기록하고도 다시 도전한 MVP에서 탈락하고 프로에 데뷔한 후 처음으로 받는 골든 글러브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1999년 양준혁 선수는 삼성에서 해태로 전격 트레이드되었습니다. 이 트레이드는 선수협이 만들어지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망주였던 곽채진 선수, 황두성 선수와 함께 해태 타이거즈 투수 임창용 선수를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었습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판단은 양준혁 선수와의 연봉 협상을 피하기 위해 빅 트레이드를 성사시킴으로써 외국인 선수로 그 공백을 메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이 트레이드 이후 열흘 이상 잠적하였습니다. 다시 기자 회견을 열어 트레이드를 전면 거부한다는 의견을 밝히고 미국의 마이너 리그에서 뛰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의견대로 미국으로 진출한다면 양준혁 선수는 해태가 임의탈퇴 처리를 하면 한·미 선수협정 7항에 따라 미국에 진출을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양준혁 선수는 마이너 리그 진출이 아닌 1년간 미국 연수를 한다고 말을 하며, 트레이드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해태에서 양준혁 선수 문제가 골칫거리가 되자 갑작스럽게 양준혁 선수가 현대로 재트레이드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삼성은 양준혁 선수를 "재트레이드를 하지 말라"라고 요청하자 해태는 재트레이드가 없음을 말했습니다. 양준혁 선수가 계속해서 해태에 돌아오지 않자, 해태는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라는 의견을 밝혔고, 양준혁 선수가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인 미국행을 굽히지 못한다면 임의탈퇴 공시 신청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끝날 줄 몰랐던 양준혁 선수의 트레이드 파동은 그가 계속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미국행 연수를 하려 한 양준혁 선수가 극적으로 해태에 가게 된 이유는 프로 야구에서 국내에서 팀을 옮기려면 10년을, 해외로 진출하려면 7년을 뛰어야 갈 수 있게 만든 자유 계약 선수 제도의 도입과 함께 당시 해태 타이거즈 감독 김응룡의 말에 의해 양준혁 선수는 김응룡 감독에게 사과하고, 양준혁 선수는 전화 통화 뒤 4일 만에 해태에 이적하겠다고 밝혀 트레이드 파동이 일단락되었습니다.


트레이드 파동이 일단락된 후 양준혁 선수는 1999년 1월 8일, 해태에 첫 방문을 한 뒤, 팀 훈련에 합류하면서 김응룡 감독을 만나 해태 V10 결의를 했고, 해태의 선수들과 우승을 위해 전지 훈련을 떠난 뒤 양준혁 선수는 개인적으로 특별 타격 훈련을 자청하였습니다.


라이벌 팀으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도 대구 팬들은 경기에 나선 양준혁 선수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이후 그가 FA를 선언하였을 때 김응룡 감독이 양준혁 선수의 삼성 라이온즈 복귀를 도왔습니다.


해태로 트레이드 된 이후 1년 뒤, 양준혁 선수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수협의 설립 목적이 "국내 프로 야구 선수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대외 홍보를 강화하며 야구의 건전한 보급과 지원을 통해 장기적으로 한국 프로 야구를 국제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라고 밝히며 선수협은 노동 조합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옷을 벗을 각오까지 하고 선수협 결성에 나섰다고 밝히면서 선수들의 권익과 복지차원에서 선수협 결성을 추진한다고 말했습니다. 주변의 우려와 소속구단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수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해태는 양준혁 선수가 단체행동 사전 고지 임무를 어겼기 때문에 임의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강경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은퇴까지 불사하고 선수협을 결성을 달성하려는 양준혁 선수와 임의탈퇴라는 최후의 카드까지 꺼내든 소속 구단은 정면 대립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다른 선수들과 합심하여 투쟁을 계속한 끝에 결국 2000년 1월 22일 한국 프로 야구 선수협회가 공식 출범하게 되었으며, 초대 회장은 송진우 선수, 감사는 정수근 선수, 박충식 선수가 맡게 되었습니다. 선수협 출범 후 하루 뒤 KBO는 양준혁 선수의 영구 제명을 추진하였는데, 이러한 KBO의 움직임에 이번에는 시민 단체가 선수협을 지지하며 KBO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양준혁 선수를 비롯한 여러 선수협 선수들은 선수협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전지 훈련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결국 선수협 문제는 2000 시즌 시범 경기 개막을 하루 앞둔 2000년 3월 10일 열린 선수협과 KBO의 협상에서, '선수협은 올시즌 종료후 결성하고 제도개선위원회는 4월 3일 발족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합의사항이 도출되면서 극적으로 타결되었습니다.


그러나 2002년 삼성으로 복귀후 선수협이 2009년 선수노조로 전환을 시도하자 양준혁 선수는 노조설립 안건에 대한 투표 자체를 거부하고 삼성 선수들을 인솔해 퇴장했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선수협 파동 이후 얼마 가지 않아 LG로 선수협 여파로 인해 다시 한 번 트레이드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소속 팀이었던 해태의 감독 김응룡이 양준혁 선수를 "선수 + 현금" 방식으로 트레이드 하겠다는 뜻을 말하자, 직접 LG 권혁철 사장이 "적당한 선이라면 얼마든지 트레이드할 의사가 있다" 라고 영입 의사를 밝혔고, 또 당시 신생 팀이었던 SK가 양준혁 선수를 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현대도 여러 문제로 인해 양준혁 선수를 사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선수협이 걸림돌으로 작용하여 양준혁 선수 영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해태가 '10승 투수를 내주어야 트레이드하겠다' 는 말에 SK와 LG는 서로 난색을 표했고, 결국엔 LG가 전년도에 10승을 거두었던 투수 손혁 선수에 현금 5억 원을 얹어 현금 트레이드하여 양준혁 선수를 영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LG와 함께 양준혁 선수 영입 쟁탈전을 벌이던 SK는 LG와 달리 해태와의 트레이드 협상이 LG처럼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해태의 트레이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있었던, 삼성이 해태로 자신을 트레이드한 사건과 달리 LG로 가는 이 트레이드에 불만이 전혀 없음을 밝혔습니다.


반면 양준혁 선수의 현금 트레이드 상대였던 손혁 선수는 이적을 거부하고 은퇴 의사를 굽히지 않게 되었고, 해태 구단은 손혁 선수를 2000년 4월 16일에 임의탈퇴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KBO 이상국 사무총장이 "손혁이 일본에서 돌아오면 직접 만나보고 최종 결정을 내리자"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이며 해태 구단은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손혁 선수는 팀에 돌아오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해 보지 못하고 2002년 시즌 후 진필중 선수를 상대로 김창희 선수와 함께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된 후 2004년에 은퇴했습니다.


LG로 트레이드된 후 양준혁 선수의 등번호를 정하기 위해 LG 구단은 많은 고민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준혁 선수가 줄곧 달았던 10번을 내야수 안상준 선수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안상준 선수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묘안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1번과 38번 중 하나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당시 LG 이광은 감독은 "38광땡"이라 행운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38번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준혁 선수는 "선수의 권익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서 후배의 등번호를 뺏기는 싫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에게 생소했던 57번을 등번호로 달았습니다. 하지만 2001 시즌이 되면서 다시 원래의 등번호인 10번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LG 이적 첫해에는 한때 타율이 0.235까지 떨어지는 부진을 보이며 LG 이광은 감독의 애를 태우기도 했지만 이후 타격 페이스가 살아나기 시작하며 3할이 넘는 타율을 유지하여 시즌을 마칠 수 있었고, 이듬해에도 본인의 최고 타율인 0.355 로 타격왕에 등극하며 FA 자격이 될 수 있는 시즌을 좋은 성적으로 마치면서 후일 LG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이상 양준혁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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