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빈(31) 감독은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가 국내에서 태동했던 2011년 신생 종목에 ‘1세대 선수’로 뛰어들었고, 2019년까지 현역으로 고군분투하며 e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병역을 마친 뒤 2021년 겨울 프로게임단 젠지에 감독으로 부임해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년간 3개의 국내 프로 대회 우승 트로피를 팀에 안겼다. 지난달 21일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돼 젠지를 팀을 떠났다. 10년 넘게 쉼 없이 달려온 그는 2024년을 ‘재충전의 해’로 보낼 계획이다.
-지난달 젠지와 계약을 마친 뒤 자유계약(FA) 신분이 됐다.
“한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의 얼굴도 보고, 아내와 함께 시간도 보냈다. 최근 둘이 온전히 휴가 목적으로 일본 후쿠오카 여행을 다녀왔다. 내년 거취를 놓고 몇몇 팀과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실 올해 마지막 대회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렸다. 나를 찾는 팀이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몇몇 팀이 손을 내밀어줬다.”
-그래서 내년 거취를 결정했나.
“고심 끝에 내년에는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스무 살에 인천으로 올라와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 현역에서 은퇴하고 바로 입대했다가, 전역한 후 바로 젠지에 감독으로 부임했으니까… 일본에서 충분히 생각을 정리한 뒤에 결정했다.”
-전역 후 곧바로 젠지 감독으로 부임했다. 2년간 지휘봉을 잡아본 소감은.
“나는 코치 업무를 건너뛰고 바로 감독이 됐다. 처음 감독직 오퍼를 받았을 땐 두려움도 느꼈다.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지훈 단장님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적극적인 푸시 덕분에 제안을 수락했다. 베테랑 선수단·코치진의 도움을 많이 받은 덕분에 2년간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젠지의 팀 체계가 잘 잡혀있다는 점도 큰 보탬이 됐다.
2년간 감독직을 경험해보니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김정균, 강동훈 감독님이나 선수 시절 나를 지도하셨던 이 단장님 모두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지도자는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더라. 프로 세계에는 승리와 패배만 존재한다. 모든 팀의 목표는 우승이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선수단의 분위기를 잘 추스르고 수습해야 하는 게 총책임자의 역할인데, 그게 생각보다 어렵다고 느꼈다.”
-부임 후 첫 시즌이었던 2022년 스프링 시즌을 준우승으로 마쳤다.
“다사다난했던 시즌으로 추억한다. 코로나19 여파로 연습하는 게 쉽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베테랑 선수 ‘피넛’ 한왕호가 냉혹한 프로 세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유를 그때 알았다. ‘룰러’ 박재혁도 내가 국가대표 선수로 함께했을 때보다 콜(브리핑)적인 부분과 기량이 일취월장했다고 느꼈다. 뛰어난 실력의 선수들 플레이를 뒤에서 지켜보고, 그들과 함께 피드백을 나누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신인 선수를 기용한 올해는 기대치가 낮았는데, 국내 리그 2회 우승으로 마무리했다.
“스프링 시즌에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다. 김수환과 ‘딜라이트’ 유환중을 팀에 융화시키면서 그들의 기량을 발전시키는 시즌을 보낼 계획이었다. 시즌 개막 전 연습 경기를 많이 졌다.
신인과 베테랑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게임 공식의 이해도에서 드러난다. 베테랑들은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이미 터득하고 외웠다. 신인 선수들은 그런 지식이 부족하다. 그런데 김수환이 게임에 대한 지식을 흡수하는 속도가 워낙 빨랐다. 덕분에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시즌 첫 경기였던 T1전에서 완패를 당했을 때만 해도 우승 가능성이 적어 보였다.
“김수환의 데뷔전인 만큼 더 쉬운 상대를 만났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연습 경기 성적도 개선되던 찰나에 강팀 T1을 만나게 돼서…. 김수환이 그날 경기에서 부진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확신을 얻었다. 데뷔전인데도 신인 선수한테 전혀 주눅 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경기에서 졌음에도 앞으로 수월하게 시즌을 치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승장구하던 젠지가 ‘LoL 월드 챔피언십’에서 8강에 조기 탈락했다. 본인 책임론도 불거졌다.
“감독은 책임을 지는 자리다. 감독이 책임을 져야만 선수들이 과감하게 플레이할 수 있고, 밴픽(일종의 사전 전략)을 구성할 때도 주저 없이 의견을 낼 수 있다. 어떤 밴픽이 무슨 이유로 나왔든 간에 최종적으로 책임은 감독이 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
-향후 거취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달라.
“당분간은 푹 쉴 생각이다.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선 ‘한 번 쉬면 영원히 쉬게 될 수도 있다’며 만류한다. 그래도 휴식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아내가 선수 시절부터 군 생활을 마치고 감독직을 2년 수행할 때까지 나를 기다려준 사람이다. 그동안 둘만의 특별한 추억을 쌓지 못한 것 같아 한동안은 둘이서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보려 한다. 아내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국내의 맛있는 음식들을 찾아 떠날 계획이다.”
-끝으로 인터뷰를 통해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다면.
“2년 동안 부족한 저를 믿어주신 이 단장님과 젠지 관계자분들께 감사하다. 함께 고생했던 코치들과 선수들에게도 이 자리를 통해 한 번 더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젠지를 응원해 주신 팬 여러분께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지 못해 죄송하단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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