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손민한 선수입니다~!
야구 국가대표팀의 선수로도 활약하여 시드니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하여 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대연초등학교, 대천중학교를 거쳐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부산고등학교 2학년 재학중인 1991년 제 43회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염종석, 주형광 등과 함께 부산고등학교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3학년이던 1992년에는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었으나 메달을 획득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이후 1993년 고려대학교에 체육교육학과 진학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아마야구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습니다.
199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 자이언츠 구단은 부산고등학교 동기이자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시절까지 배터리로 함께한 포수 진갑용 중 누구를 선택할지 고심하다가 투수인 그를 지명했습니다. 진갑용은 웨이버 방식으로 진행된 2차 지명에서 전년도 최하위였던 OB 베어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입단 2년 후 트레이드 마감일이었던 1999년 7월 31일 삼성에 트레이드되었습니다. 1996년 12월 20일 롯데 자이언츠 입단식을 가졌으며, 계약금 5억원, 연봉 2,000만 원에 계약하였습니다. 이 액수는 당시 임선동에 이어 차명주와 함께 역대 두 번째로 많은 계약금이었습니다. "프로에 적응력을 키우는 것이 최우선이고 팀 전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수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소감을 말하였습니다.
롯데 자이언츠 입단 초기에는 같은 해에 입단한 문동환과 함께 미래의 에이스 후보로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입단 첫 해 개막전에 등판하여 끝내기 폭투를 범해 데뷔전에서 패전 투수가 되었고 이후 3년 간은 부상으로 이렇다 할 활약은 하지 못하고 4년째인 2000년에 12승을 올려 간신히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으로 발탁되어 팀이 동메달을 획득, 병역 혜택을 받았습니다.
다음 해인 신윤호와 함께 2001년에는 15승으로 최다승 및 승률왕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2002년과 2003년에 또 다시 부진에 빠져, 한 자리수 승리에 그쳤습니다. 2004년 전반기에는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으나 8세이브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04년 7월 12일 박석진, 김대익과의 트레이드로 노장진, 김승관이 롯데에 입단하여 노장진이 마무리를 맡게 되자 2004년 후반기부터 다시 선발로 전향하여 9승을 거두어 재기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18승을 거두며 완벽히 재기하여 최다 승과 평균 자책 1위의 2관왕을 차지하고, MVP를 수상했습니다.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팀에서 MVP가 나온 사례는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한 이래로 이 시즌의 손민한 선수가 유일했으며 2012 시즌 넥센 히어로즈의 박병호가 두 번째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팀에서 MVP가 나온 선수가 됐습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어 미국전에서 선발 투수로 호투해 승리 투수가 되었습니다.
2008 시즌에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퀄리티스타트와 퀄리티스타트+를 하고도 계투진의 난조와 유독 손민한 선수가 등판했을 때 타선의 지원 부족으로 단 12승밖에 거두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2008 시즌이 끝난 후 FA 자격을 얻어 롯데 자이언츠와 재계약하였습니다.
또한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의 주장으로 뽑혀,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승전까지 단 1경기에도 등판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컨디션 난조 때문이라고 했으며 실제로 그는 그 때 어깨가 좋지 않았고 어깨로 인해 이후 발목이 잡히게 됩니다. 이를 본 팬들은 "손민한 실종" 이라는 패러디성 유머를 만들어 희화화하기도 하였습니다.
2009 프로 야구가 개막한 이후로도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선수협의 노조 결성 논란으로 인해 출전이 없었다가, 2009년 6월 7일 잠실 두산전에 2008년 준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선발 출장한 이래 7개월만에 처음으로 1군에 등판하여 6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막아 팀의 영봉승을 이끌어 냈습니다. 같은해 6월 26일에 대전 한화전에서 통산 100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부터 좋지 않던 어깨 때문에 2009년 10월 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구단 지정병원인 조브 클리닉에서 감바델라 박사의 집도로 오른쪽 어깨 관절경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미국에서 1차 재활을 마친 뒤 귀국하여 2010 시즌까지 계속 재활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활 훈련 도중 통증이 재발되어 복귀가 무산되었고 2011년에도 시범 경기에 등판하였으나 또 다시 악순환을 거듭하여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시즌 후 방출되었습니다.
2013년 시즌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이후 제 9구단 NC 다이노스에 이적을 타진하며 입단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선수협 문제 등은 해결됐고 메디컬 테스트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정식 선수 등록 마감일까지 새 둥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2013년에 선수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신고선수로 입단해 6월 1일 이후부터 1군 등록이 가능한 신고선수 등록 기간에 돌아오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신고선수는 6월 1일 이후 정식 선수로 등록할 수 있고, 연봉도 별도의 언급이 없으면 최소 연봉을 받아야 합니다. NC 다이노스에서도 그의 부상 이력 때문에 이를 바라보며 최대한 몸을 만들 때까지 복귀를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코칭스태프가 전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3월에 테스트를 거쳐 신고선수 영입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후 2013년 4월 15일 NC 다이노스에 연봉 5,000만원의 조건으로 신고선수 계약을 맺었습니다. 퓨처스 팀에 합류, 몸 상태를 고려하여 퓨처스 경기에 등판하였습니다.
2013년 6월 5일 노성호를 대신하여 4년 만에 1군에 올라왔습니다. 마산 SK전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1,378일 만에 1군 복귀전을 치렀고, 김광현을 상대로 1,407일 만에 선발승을 거두었습니다.
2013년 6월 한 달 동안 4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3승 평균자책 0.77, 8탈삼진으로 활약하였으며, KBO 리그 6월 MVP에 선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선발로 나설 때마다 투구 수에 대한 부담으로 김경문 감독에게 불펜 전환 의사를 표명하였고, 김경문 감독도 이를 승인하여 불펜으로 전환했으며, 마무리 투수도 겸했습니다. 2013년 7월 24일 대구 삼성전에서는 데뷔 첫 홀드를 따 냈습니다.
2013년 8월 13일 청주 한화전에서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타석에 섰으나, 김혁민을 상대로 삼진 아웃을 당했습니다.
2014년 시즌
2014년 4월 24일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2이닝 1실점을 기록하면서 역대 18번째 1600이닝 기록을 달성하였습니다. 5월 13일 마산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5-5 동점이던 9회초 1사 1루에서 구원등판하여 2/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습니다. 9회말 이호준이 무사 만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면서 배영수에 이어 역대 15번째 통산 110승을 구원승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경기에서는 NC 다이노스가 6-5로 승리하였습니다.
시즌에서 52경기 48 1/3이닝 4승 4패 1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3.54를 기록했습니다.
준플레이오프
준플레이오프 4경기에서 4경기 모두 출장해 3이닝 2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3차전에서 4-2로 이기고 있던 8회말 무사 1,2루에서 등판하여 최경철의 희생번트를 내준 1사 2,3루에서 폭투를 기록하며 4-3 추격을 허용하고 이민호와 교체되었습니다.
경기는 NC 다이노스가 4-3으로 승리하면서 손민한 선수도 홀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 시즌
2015년 시즌에서 NC 다이노스의 선발 투수로 낙점이 되어서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4월 5일 마산야구장에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해 6이닝 5피안타 3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하면서 선발승을 기록했습니다. NC 다이노스는 9-2로 승리했으며, 손민한은 40세 3개월 3일의 나이로 선발승을 기록해, 송진우 박철순에 이어 최고령 선발승 3위를 기록했습니다.
5월 28일 마산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했습니다. 4회초 허경민에게 우전 안타를 내준 후 후속타자 김현수를 1루 땅볼로 잡아냈습니다. 김현수는 손민한 선수가 프로 데뷔 후 7,000번째로 상대한 타자가 됐습니다. 이 기록은 통산 17번째 기록이었습니다.
경기에서는 6이닝 5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시즌 6승을 기록했습니다. NC 다이노스는 5-0으로 승리했으며 이 승리로 창단 최다 연승인 8연승을 기록했습니다. 6월 18일 수원 kt 위즈 파크에서 열린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서 5이닝 6피안타 3탈삼진 4실점을 기록하면서 시즌 7승을 기록했으며, 역대 19번째 통산 1700이닝을 기록했습니다.
NC 다이노스는 9-4로 승리했습니다. 6월 24일 마산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5이닝 5피안타 2볼넷 2탈삼진 무실점으로 시즌 8승, 역대 13번째 개인 통산 120승을 달성했습니다.
NC 다이노스는 8:1로 승리했습니다. 2015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에 감독 추천선수로 발탁됐습니다. 특히, 올스타전 기준 나이 40세 6개월 16일로 종전 최고령 투수이던 김용수의 40세 2개월 21일을 제치는 최고령 투수가 됐습니다.
7월 24일 마산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 선발등판 하면서 ‘오른손 투수’ 최고령 선발 등판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40세 6개월 22일의 나이로 선발 등판해 종전기록인 박철순의 40세 5개월 23일을 갱신했고, 송진우 구대성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많은 나이에 선발 등판한 선수가 됐습니다. 경기에서는 2 1/3이닝 6피안타 1사구 5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됐습니다.
경기에서는 NC 다이노스가 3-9로 패배했습니다. 9월 11일 마산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5이닝 5피안타 1탈삼진 2실점을 기록하면서 시즌 10승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2008년 시즌 12승을 거둔후 7년만 이었으며, 40세 8개월 9일로 역대 최고령 10승 투수가 됐습니다. 경기에서는 NC 다이노스가 9-3으로 승리했습니다.
2015년 시즌 26경기 105이닝 평균자책점 4.89 11승 6패 50탈삼진을 기록했습니다.
플레이오프
10월 21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3차전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5이닝 77구 3피안타 3볼넷 2실점을 기록해 승리투수가 됐습니다. 이 승리로 손민한 선수는 포스트시즈 통산 최고령 선발 승리투수로 기록됐고, 롯데 자이언츠 시절인 1999년 10월 17일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승리한 후 16년 만에 포스트시즌 승리투수가 됐습니다. 경기는 NC 다이노스가 16-2로 승리했습니다.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수상 경력
1995년: 제 29회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최우수선수
1995년: 아마야구 최우수선수상
2001년: 2001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2001년: 2001년 한국프로야구 승률 1위
2005년: 2005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2005년: 2005년 한국프로야구 평균자책점 1위
2005년: 2005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선수
2005년: 2005년 한국프로야구 골든글러브 투수상
2013년 : 한국프로야구 6월 MVP
국가대표 경력
1992년 : 1992년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회 대표
1994년 : 1994년 아시안 게임 대회 대표
1996년 : 1996년 하계 올림픽 대회 대표
2000년 : 2000년 하계 올림픽 대회 대표
2006년 : 제1회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
2006년 : 2006년 아시안 게임 대회 대표
2009년 : 제2회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
대연초등학교
대천중학교
부산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93학번
2007년 12월 16일에 열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정기총회에서 2008년 ~ 2009년을 이끌어갈 선수협회회장으로 선출됩니다.
2008년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를 막기위해 10억을 기탁하는 등 이전과는 달리 더 적극적으로 선수협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2008년 5월 7일에는 나진균 총장의 후임으로 권시형 서울대 스포츠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선임했습니다. 7월 8일에는 정기 이사회를 열어 도핑테스트를 수용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또한 11월에는 히어로즈의 장원삼 트레이드 사건을 비판하며 선수에게 트레이드 거부권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2011년 말 선수협 간부가 한 온라인게임업체와 선수 초상권 사용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브로커로부터 뇌물을 받으면서, 8개구단 고참급 선수들이 손민한 선수의 퇴진을 요구하였고, 결국 선수협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상 손민한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