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비운의 천재 故박동희 선수입니다.
부산고등학교와 고려대 시절부터 크게 기대를 받았던 투수였기에 수퍼 베이비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와 동시에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려 오면서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운의 천재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2007년 다이너스티 차량을 타고 가다 광안동에서 단독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프로 입단 이전
시속 150km가 넘는 빠른 강속구가 주무기였던 그는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시절, 1988년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어 올림픽에서 일본의 투수 노모 히데오와 선발 맞대결을 펼치는 등 아마추어 선수 시절부터 '선동열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부산고 3학년 때 1차 3순위 지명을 받았고, 고려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1990년 1억 5천 2백만원의 계약금을 받으며 연고 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습니다. 당시 수퍼 베이비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습니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신인이었던 1990년에는 데뷔전에서 6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10승 7패 7세이브를 기록하였습니다. 이후 1991년 14승 9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47, 1992년 한국시리즈 MVP, 1993년 5월 13일 6회 강우 콜드게임으로 기록된 쌍방울전에서 비공인 노히트노런 기록, 1994년 6구원승 31세이브로 롯데 자이언츠 구단 사상 최다 세이브 기록, 올스타전 4회 출장 등의 수준급 성적을 기록하였지만 이후 오른쪽 팔꿈치 부상과 오른쪽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성적이 나빠져 갔습니다. 그의 31세이브는 2012년 김사율이 34세이브를 거두어서 구단 사상 최다 세이브 기록을 갱신하였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7년 6월 26일, 이동수, 박석진, 박동희, 김종훈 간의 2:2 트레이드에 의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였습니다. 삼성 라이온즈는 박동희 선수의 경기 경험을 높이 평가했기에 영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박동희 선수는 이적한 이후에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2002년 시즌 중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된 뒤,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은퇴했습니다.
프로 통산 성적은 59승 50패 58세이브입니다.
은퇴 이후에는 야구계를 완전히 떠났고, 서울 소재의 건설 업체 '스파크산업개발'에서 건설 관련 업무에 종사해 왔다가 이후에는 해운대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했습니다. 2007년 3월 22일, 영업을 마치고 퇴근하다가 오전 3시 10분경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동에서 자신의 다이너스티 차량을 운전 하며 가다 버스승강장 기둥을 들이받는 교통사고로 사망 했습니다. 향년 40세
부산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올림픽 국가대표
롯데 자이언츠
한일 프로 야구 슈퍼 게임 KBO 선발
삼성 라이온즈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 최다승
대륙간컵 최우수 우완 투수
1992년 한국시리즈 최우수 선수
이상 故박동희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게이머 한지원 (0) | 2018.01.10 |
---|---|
前 야구선수 김명제 (0) | 2018.01.09 |
야구코치 김민재 (0) | 2018.01.07 |
前 야구선수 손민한 (0) | 2018.01.07 |
야구선수 오승환 (0) | 2018.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