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가수 故신해철

Talon 2018. 5. 7. 23:10

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마왕 故신해철 님입니다.


1988년, 무한궤도의 리드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하여 대상을 차지하며 가요계에 등장하였습니다. 당시 수상곡은 자작곡인 〈그대에게〉입니다. 정식 데뷔는 무한궤도 1집 발표 때이며, 이후 솔로가수로서도 활동하였으나 주로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데뷔 이후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하여 음악성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발표한 대부분의 음악을 스스로 작사 · 작곡 · 편곡하였으며, 앨범 녹음시 악기를 직접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추구한 주된 장르는 록이었지만, 테크노, 재즈, 국악,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였습니다. 또한 가사에 있어서도 통상의 대중가요와는 달리 남녀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자아 · 존재 · 삶 · 가족 · 사회적 문제 등 세상의 다양한 것들을 노래했습니다. 한편 음향 및 녹음 엔지니어링, 작 · 편곡 컴퓨터프로그램 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직접 관련 기술이나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는데, 특히 미디 음악분야에선 한국 대중음악계의 1세대 선구자입니다. 이처럼 신해철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스타이자 천재 뮤지션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더불어, 뛰어난 언변으로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떳떳하게 밝혔던 논객이자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소셜테이너였고, 특유의 입담과 독특한 진행으로 밤시간대를 대표한 라디오 DJ였습니다. 별명은 '마왕', '교주'였습니다. 2014년 10월 27일, 향년 만 4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훈초등학교 졸업

중동중학교 졸업

보성고등학교 졸업

서강대학교 철학과


데뷔 이전

신해철은 1968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에서 사업가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아래,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중동 중학교 재학 시절 학급반장을 맡으며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보성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밴드 각시탈에서 활동을 하였고, 부활의 김태원에게 기타를 배웠습니다. 이미 10대 시절부터 음악에 빠졌던 것인데, "메탈리카의 《Master of Puppets》 앨범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아서 이틀간 학교를 안 가고 음악만 들었다."라고 회상한 적도 있습니다. 특히 1986년부터 KBS 제2FM에서 방송하고 있었던 심야 음악 프로그램인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푹 빠져 지냈는지라, 훗날 신해철의 아버지는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는 머리였는데 매일 밤마다 전영혁의 프로그램을 듣느라고 서강대학교에 갔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2학년이던 1988년 8월에는 고교 시절 밴드 동료였던 이들이 만든 ‘아기천사’라는 밴드의 객원가수로 MBC 강변가요제에 출전했으나, 결선을 목전에 앞둔 본선 3차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데뷔, 무한궤도 활동

1988년, 신해철은 어린시절 친구들이었던 김재홍, 조형곤, 조현문, 조현찬과 밴드 무한궤도를 이루어 언더 그라운드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무한궤도는 밴드의 활로를 모색하는 시기를 맞이하였고, 한 멤버가 1988년 MBC 대학가요제 출전을 제의하여, 멤버들 간의 갑론을박을 거쳐 결국 출전을 결정하였습니다. 이후 신해철은 앞서 출전했던 같은 해에 열린 강변가요제에서의 수상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가요제의 특성에 관해 분석하여 전략을 짰고, 이는 결국 대상 수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수상곡은 신해철이 작사 · 작곡한 〈그대에게〉였는데, 이 곡은 철저히 가요제 수상을 위한 맞춤형 곡이었습니다. 신해철은 곡을 만들기 전에 '전주부터 화려하게 치고 들어가야 한다. 전진돌격대형으로 시작부터 돌격한다. 곡이 좀 특이해야 한다. 노래 자체는 단순하다. 8비트로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멜로디로 간다. 현장 행사에서 가사가 전달될 리 없으니 쉬운 가사로 간다. 4분 동안 끊임없이 변한다. 지루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등의 전략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치밀한 전략이 적중했던 것인지,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조용필은 전주만 듣고 대상감으로 직감했다고 합니다. 신해철은 〈그대에게〉 탄생 과정에 대해, "당시 키보드로 곡을 만든다는 행위를 해보고 싶었다. 문방구에서 멜로디언을 사서, 멜로디언을 불면서 〈그대에게〉를 만들었다. 아버지한테 안 들키려고 밤에 이불 쓰고 멜로디언을 불면서 만들었다. 원래는 10분짜리 대곡을 만들려고 했는데 숨이 차서 4분짜리로 만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달 뒤인 1989년 1월, 신해철은 미스코리아 출신 방송인 장윤정과 MBC AM의 《우리는 하이틴》을 공동진행하였는데, 이것이 신해철의 기나긴 라디오 DJ 이력의 시작입니다. 놀라운 것은 당시 그는 정식 데뷔한 가수도 아니었고, 그저 대학생일 뿐이었다는 점이죠. 청소년들이 주로 듣는 심야 음악 방송조차 황인용 등 유명 중견 아나운서들이 맡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 스물을 갓 넘긴 대학생 신해철의 발탁은 생각하기 어려운 파격이었습니다.


한편 무한궤도는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뒤, 멤버구성에 변화를 겪게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1988년 강변가요제에 '실험실'이라는 팀으로 참가했었던 정석원이 신해철의 제의로 무한궤도에 영입되었습니다. 6인조가 된 무한궤도는 1989년 6월 1집을 내놓으며 《우리앞의 생이 끝나갈때》를 히트시켰습니다. 그러나 멤버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해 몇몇 멤버들이 탈퇴하게 되었고, 오래 활동하지 못하고 결국 해체됐습니다. 또한 신해철은 같은 해 10월 16일 대마초 흡연으로 인해 대마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그 후 10월 28일에 구속적부심에서 재판부는 초범인 데다가, 대학생신분이며,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고, 친구들이 산 대마초를 두 모금만 피워 가담정도가 경미한 점을 감안해 신해철을 석방시켰습니다.


무한궤도 해체 후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발돋움

신해철은 88년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이후 밴드로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음반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솔로로 데뷔하길 원했고, 신해철은 그때마다 솔로 데뷔 제의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대학가요제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조용필을 만나 이러한 고충을 토로했고, 그가 소개해준 매니지먼트 회사와 계약하여 솔로가 아닌 무한궤도라는 밴드로 데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계약당시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밴드가 해체될 경우, 남은 계약기간을 신해철이 솔로 가수로 활동하며 채운다"라는 조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무한궤도는 해체하고 1990년 신해철은 솔로로 활동을 시작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솔로 데뷔앨범의 첫번째 히트곡은 앨범 타이틀 곡이었던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였습니다. 참고로 이 곡의 원래 제목은 1988년 MBC 강변가요제 출전 당시 밴드 '아기천사'의 참가곡이었던 원경 작곡의 〈그리움은 기다림의 시작이야〉였습니다. 이 곡은〈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로 제목이 바뀐 뒤 1989년 발매된 아기천사 1집에 수록되었는데 크게 인기를 끌지못하였고, 이후 신해철이 재편곡하여 솔로 데뷔앨범에 수록한 뒤 비로소 히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솔로 데뷔앨범의 또 다른 수록곡인 〈안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영어랩의 삽입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신해철이 솔로 1집을 발표했던 1990년, 무한궤도 멤버였던 조형곤, 조현찬, 정석원은 장호일과 함께 그룹 015B를 결성하였습니다. 정석원은 신해철의 솔로 1, 2집에 곡을 주거나 세션으로 도우기도 했고, 신해철은 015B의 1~2집 수록곡에서 객원보컬로 참여하기도 했었습니다.


솔로 1집 수록곡이 대박을 치면서 신해철은 90년대 초반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시기 신해철은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하고, MBC 10대 가수상 등 방송사의 연말 시상식에서 수상하였으며, 운동화 광고모델로 섭외되기도 하였고, 곱상한 외모에 수많은 오빠부대를 몰고다니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저한 대중가수이자 하이틴 스타였습니다. 1991년에는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등이 수록된 솔로 2집 앨범 《Myself》을 발매하였습니다. 이 앨범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도된 그만의 음악적인 스타일은 당시 대중가요의 경향과는 차별화된 점을 보였고, 이 때부터 아이돌의 이미지를 조금씩 벗고 뮤지션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솔로 2집의 작사, 작곡, 편곡은 물론 당시 우리나라에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미디 작업을 거의 혼자 해내면서 ‘하이틴 스타’ 이미지를 깨고 실력파 뮤지션의 ‘싹’을 보였던 것입니다. 한편 이 Myself 앨범은 한국 최초의 미디 음반이라는 역사적 특전도 갖고 있습니다. 이후 같은 해에 발매된 《변진섭/신해철》이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은 리메이크와 리믹스 등이 포함된 2명의 곡이 각각 4곡씩 수록된 앨범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일 신해철은 인터뷰에서 이 앨범은 제작사의 상업적인 목적으로 인해 만들어진 앨범이므로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앨범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MBC FM의 라디오 프로그램 《밤의 디스크쇼》의 DJ를 맡기도 했습니다.


N.EX.T 결성, 다양한 음악활동, N.EX.T 해체

두 번째 솔로 앨범 활동 이후 신해철은 무한궤도 해체직전 멤버였던 이동규, 신해철의 Myself 투어 공연 세션으로 참여한 적이 있는 기타리스트 정기송과 함께 1992년, N.EX.T라는 록 밴드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HOME'이라는 타이틀의 넥스트 1집 앨범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컨셉 앨범이었습니다. 1집 앨범에서는 솔로 시절의 분위기를 이어간 발라드곡 ‘인형의 기사 Part II’를 비롯하여 테크노와 록을 결합한 ‘도시인’ 등이 히트하였고, 나래이션 송인 '아버지와 나 Part I'도 감동적인 가사로 인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넥스트는 1집 때 TV 출연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성과 음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1992년 11월 신해철은 방위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그러나 1993년 1월에 또 한번의 대마초 흡연으로 몇개월간 복역한 뒤 가석방되어 출소했습니다. 또한 그 시기 신해철은 같은 해에 개봉한 영화와 동명의 OST인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앨범을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으나 주연 배우였던 신인 가수 엄정화는 신해철이 작사, 작곡한 OST 수록곡 ‘눈동자’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1994년 신해철은 넥스트 1집때부터 같이 해온 이동규, 그리고 새로 영입한 멤버들과 작업한 넥스트의 두 번째 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앨범은 '존재'를 주제로 한 컨셉앨범이었는데, 평론가들로부터 '철학적 언어를 가요에 접목했다'라는 등의 극찬을 받았으며,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분히 철학적이고 무거운 사운드를 선보인 이 앨범으로 넥스트는 '테크노 밴드'에서 '록밴드'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체적으로 헤비한 사운드의 곡들이 주가 된 이 앨범 수록된 곡들 중 다소 소프트한 노래인 〈날아라 병아리〉는 대중적으로 큰 히트를 하였습니다. 한편 신해철이 "내 골수팬들이 가장 명곡으로 꼽는 곡"이라고 말했던 〈The Ocean: 불멸에 관하여〉도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넥스트는 이후에도 멤버교체가 있었고, 1995년에는 세 번째 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2: World》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앨범은 세상을 주제로 한 컨셉앨범으로서,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Burrn!'이라는 일본의 유명 록 음악 잡지에 소개되었으며, 음악평론가 마쯔다 야스히로로부터 '올해 나온 음반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정식 수입음반이 아닌 해적음반으로 수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또한 같은 해 2월 4일, COEX 대서양관에서 넥스트의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1집 발표 후 신해철의 군입대, 대마초 사건, 멤버교체 등의 우여곡절 때문에 넥스트의 첫 콘서트는 결성 후 4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표가 모두 매진된 것은 물론 COEX에서 열린 유료공연 사상 최고의 입장객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공연을 하였습니다.


한편 그 당시 신해철은 넥스트 활동과는 별도로 전람회, 이한철 등 동료나 후배 음악인들의 앨범 프로듀싱, 객원 보컬 참여, 정글 스토리 OST 제작, 윤상과 프로젝트 팀 노땐스 결성 등 N.EX.T 외의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한편 노땐쓰라는 팀명은 '『테크노 = 댄스음악』은 아니다'라는 의미였는데, 발표한 앨범을 통해 감상을 위한 테크노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노땐스 앨범에 실린 곡들은 두 사람이 절반씩 만들었습니다. 또 1996년 4월부터 1997년 10월까지 MBC FM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FM 음악도시》의 초대 DJ를 맡아 진행하였습니다. 또한 또 1996년 말에는 ‘빅뱅뮤직’이라는 레이블을 설립해 음반기획과 매니지먼트 , 캐릭터 사업을 직접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1997년 1월에는 록 발라드 곡인 〈Here, I Stand For You〉가 수록된 넥스트의 첫 싱글이 발매되었는데, 해당 곡은 큰 히트를 하였고, 당시 국내에는 생소했던 싱글앨범인데도 불구하고 50만장이 넘는 판매를 기록하였습니다. 참고로 신해철의 묘비명에는 〈Here, I Stand For You〉의 가사가 쓰여 있기도 합니다. 또한 같은 시기 신해철은 여러 대학의 대중문화론 강사로 초빙되었습니다. 20대를 모두 음악에 쏟아부은 그는 이제 비로소 단지 가수가 아닌 비판적 시각을 갖춘 중량감 있는 음악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신해철은 넥스트 4집 《Lazenca: A Space Rock Opera》를 발매하였습니다. 이 앨범은 1997년 당시 TV 채널 투니버스에서 제작, 방송된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의 사운드트랙이었고, 해당 앨범 수록곡 중 〈해에게서 소년에게〉, 〈Lazenca, Save Us〉 등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편 4집 앨범 발표 기자회견에서


국내시장과 공연시스템의 열악한 구조로 인해 밴드활동의 지속이 어려워 음악적으로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다. 더 이상의 독야청청은 싫다. 빙하기의 공룡 신세로 음악적 지향이 같은 동료 밴드 하나 없이 내부적으로만 답을 구하려다 보니 깨질 수 밖에 없었다.

라는 말을 하면서 1997년 12월 31일부로 밴드는 해체할 것이며, 4집이 마지막 앨범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해철은 결코 멤버간 불화 등의 이유는 없으며, 휴식기를 갖는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8년, 신해철은 음악평론가 임진모와의 했던 인터뷰에서 넥스트 해체의 배경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털어놓았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넥스트 해체의 결정적 계기는 일본진출 제의 수용 여부에 대한 멤버들간 의견차이였다고 밝혔습니다. 해당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당시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는 록밴드의 입장에서 국내 시장이 너무도 좁아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2주일이면 전국 투어가 끝날 정도로 작은 국내 공연 시장 크기에 답답함을 느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일본 쪽에서 넥스트 측에 일본시장 진출을 제의해왔는데, 당시 일본 측 관계자는 "일본은 전국투어를 할 경우 현 단위까지 다 돌아서 전국투어가 1년 내로 종료가 안 되는 나라"라는 얘기를 하였고, 이것이 자신의 구미를 자극했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일본 측 관계자들은 일본 진출시 넥스트 멤버들이 일본에 체류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조건에 대해 넥스트의 멤버들이 거부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해철은 넥스트 라인업을 교체하느냐, 밴드 자체를 없애느냐의 기로에 있었고, 멤버들에게 예우를 해주고 싶어서 후자, 즉 밴드를 없애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넥스트 해체 이후 신해철은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고, 나머지 멤버들은 랩퍼이자 패닉의 멤버인 김진표와 함께 노바소닉을 결성해 1999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유학 그리고 솔로 활동 재개, 또 다른 밴드 비트겐슈타인 결성, 결혼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신해철은 넥스트 4집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기타리스트 크리스 샹그리디와 손잡고, 1998년 테크노음악에 기반한 솔로앨범 《Crom's Techno Works》를 발표했습니다. 1999년 4월에는 크리스 샹그리디와 MONOCROM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해 동명의 타이틀로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해 5월에는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떠나 라이브 앨범 3장 발표와 영화 세기말의 OST 프로듀싱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에 들어서는 키보디스트 임형빈, 뉴욕 유학생활 중 만난 재미교포 기타리스트 데빈 리와 3인조 밴드 비트겐슈타인을 조직하여 저예산 홈레코딩으로 제작한 앨범을 발표하며 넥스트 시절에 보여준 음악과는 다른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의 게임 뮤직 앨범에는 신해철의 〈Zergs Are Coming〉이라는 곡이 수록되었습니다.


2001년에는 들국화의 트리뷰트 앨범 《A Tribute To 들국화》에서 〈사랑한 후에〉를 리메이크 했습니다. 또 SBS 파워FM에서 고스트 스테이션의 DJ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 뉴욕에 있던 신해철이 녹음을 하여 서버에 올리면 SBS 제작진이 다운받아서 방송하는 파격적인 방식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또, 같은 해에는 세종사이버대학교의 겸임교수를 잠시 맡기도 했었습니다.


2002년에는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김수철의 트리뷰트 앨범 《Pops & Rock》에서 〈이대로가 좋을뿐야〉를 리메이크 했고, 한일 월드컵 직전에 붉은악마 회원용으로 배포된 《꿈★은 이루어진다》앨범에 〈Into the Arena〉를 만들어 수록했습니다. 또 그 당시까지 신해철이 발표한 모든 음악 중 본인이 선곡한 노래들을 담은 박스세트 《The Best of Shin hae-Chul - Struggling》을 발매했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유학시절 만나 교제해오던 미스코리아 출신의 회사원 윤원희와 일본의 한 성당에서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같은 해에는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의 지지 유세 및 선거방송을 하기 위해 진행하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 스테이션을 잠시 중단했다가 선거가 끝난 후, 같은 해 12월 20일 복귀하였고, 2003년 4월 봄 개편 시기에 방송은 막을 내렸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데빈과 임형빈, 독일의 밴드 톡식 스마일의 기타리스트 안회태, 닥터코어 911의 베이시스트 쇼기 · 드러머 이용준과 함께 가칭 '신해철 밴드'를 결성하여 훗날 재결성되는 넥스트의 초석을 다집니다.


넥스트 재결성, 솔로 앨범 발매

2003년 신해철은 여러 음악인들이 참여한 프로젝트 앨범 《Project X》에서 싸이와 함께 작업한 곡을 수록하였습니다. 또 일본 대전액션 게임 'GUILTY GEAR XX #Reload'의 한국버전 음악을 수록한 앨범을 작업했는데 이 OST는 일본 현지에서의 반응이 좋아 따로 음악만 일본에서 CD로 발매되기도 하였습니다. 10월부터는 MBC FM4U에서 ‘고스트 스테이션’의 다른 이름인 ‘고스트네이션’ 방송을 시작하게 됩니다. 2004년에는 새로운 라인업으로 재결성한 넥스트의 다섯 번째 정규앨범이자 저예산 레코딩 방식으로 제작한 더블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3: 개한민국》을 발매하였습니다. 이 앨범은 일본의 'Euro Rock Press'라는 록 음악 잡지에서 평론가의 리뷰를 통해 수작으로 평가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2005년에는 SBSi와 공동출자 형식으로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 매니지먼트 회사인 싸이렌을 설립했습니다. 또 같은 해에 라디오 프로그램이 개편되면서 고스트네이션은 1시간으로 방송 시간이 줄어들었고, 주파수도 MBC 표준FM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MBC에서 방송되었던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2에 안드레 대교주 역으로 출연하였습니다.


2006년에는 일부 멤버교체와 함께 데빈을 제외한 예전 넥스트 멤버들을 다시 영입해 리메이크 앨범인 5.5집 음반 《the 2nd fan service: ReGame?》을 발표했습니다. 9월에는 결혼 4년만에 딸을 얻었습니다.



2007년에는 재즈 음악으로만 수록된 솔로앨범 《The Songs For the one》을 발매했고, 넥스트의 6집 음반작업을 위해 MBC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네이션》에서 하차하게 됩니다. 또한 KBS 스포츠 타이틀 로고음악을 만들었습니다. 2008년 3월에는 SBS 러브FM에서 고스트스테이션 방송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7월에는 두 번째 베스트 앨범이자 본인의 데뷔 20주년 앨범인 《Remembrance》를 발매하며 데뷔 20주년 공연을 가졌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아들이 태어나 신해철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 해 10월에는 넥스트 활동을 위해 고스트스테이션에서 하차하고, 12월에 넥스트의 새로운 3부작 시리즈 앨범 《666 Trilogy》의 첫 번째 파트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다음해인 2009년 2월에는 부활의 데뷔 25주년 기념 트리뷰트 앨범에 참여했으나, 해당 앨범은 발매가 무산됐습니다.


방송 출연과 공연

2011년 3월에는 대중가수들이 오페라에 도전하는《오페라스타》에 출연하여 경연을 펼쳤고, MBC 에브리원의 프로그램 《부엉이 시즌 2》에 출연해 가족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5월부터 MBC FM4U 봄 개편으로 신설된 《Ghoststation》의 DJ를 맡게 되었습니다. 7월에는 KBS 2TV의 오디션 프로그램 TOP 밴드에 합류해 1~2개월간 출연하며 S1과 번아웃하우스의 코치를 맡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11월부터는 KBS 2TV의 토크쇼 프로그램 《이야기쇼 두드림》에 합류 및 출연하였으며, 2012년 4월에 하차했습니다.



2012년 2월에는 담낭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5월에는 넥스트의 드러머 김단이 연락을 두절하고 잠적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불화설, 경제적 곤란 등이 원인으로 제기 되었다가 나흘만에 경찰에 의해 발견된 김단이 페이스북을 통해서 '넥스트와는 이미 4월에 같이 못하겠다는 뜻을 전했고, 우울증이나 경제적 곤란은 사실이 아니며 지극히 개인적인 일 때문이었다'라고 심경을 밝혔습니다. 당시 넥스트에 대해서 '해체수순을 밟았다'는 소문과 '해체라 말하기 어렵다'는 신해철 측근의 엇갈린 언급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신해철은 정확한 공식입장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편 6월에는 참여하고 있던 롤플레잉 게임 《아키에이지》 음악 작업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차한다고 밝혔습니다. 7월에는 MBC 노조의 파업으로 일시 중단되었던 고스트스테이션 방송을 재개했으며, 같은 시기에 시나위의 신대철과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해 앨범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9월 1일에는 봉하마을에서 열린 '봉하음악회'에 참가해 신곡 〈Goodbye Mr.Trouble〉을 공개하고, 10월 12일에는 이 곡의 디지털 싱글을 발매했습니다. 〈Goodbye Mr.Trouble〉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음반 《탈상: 노무현을 위한 레퀴엠》의 수록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2일에는 MBC FM4U 가을 개편 날짜에 맞추어 10여 년간 존속해오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 방송을 완전 종료했습니다.


2013년 5월 19일에는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4주기 서울광장 추모문화제에 참가했고, 24일과 25일에는 여수엑스포의 엑스포 가요 페스타 공연에서 신대철과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KBS 1TV 프로그램으로, 국악을 사랑하는 청소년들이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무대를 첫 목표로 삼아 국악퓨전밴드를 꿈꾸며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담은 《K소리 악동》에서 그는 피아니스트 임동창과 공동으로 진행을 맡게 되었고, 8월부터 첫 방송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보다 앞선 7월에는 MBC가 여러가지 이유로 대학가요제를 폐지한다고 발표하게 되었고, 이에 1988년 대상을 받았던 무한궤도 출신 신해철은 9월 25일 대학가요제 출신들과 함께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개최되는 '대학가요제 Forever' 공연 제작발표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후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번 공연에서 본인 공연의 내용은 “넥스트 7기 뉴 라인업+대학가요제 선후배 조인트 라이브”가 될 것이라고 밝히고, 3일간 오프닝 순서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6년만에 새 앨범 발표

2014년 4월 16일, 신해철이 넥스트 6집 《666 Part 1》앨범 이후 6년만에 컴백한다는 소식이 보도되었습니다.

또한 신해철의 소속사 측은 "신해철이 소속된 록밴드 넥스트가 2014년 상반기, 새 앨범으로 컴백할 예정”이라고도 밝혔습니다.

5월에는 넥스트의 원년 멤버인 기타리스트 정기송이 신해철의 신보 작업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신보는 신해철의 여섯 번째 솔로앨범의 첫 번째 파트로서, 앨범명은 《Reboot Myself》였습니다. 이 앨범은 2014년 6월 26일에 발매되었습니다.


한편 신해철은 이보다 앞선 6월 17일, 신보의 첫 싱글인 〈A.D.D.a〉를 공개했습니다. 이 곡은 원맨 아카펠라 곡으로 1000개 이상의 녹음 트랙을 제작하고 보컬을 입힌 방식으로 제작한 곡입니다.

 6월 20일에는 공연 겸 파티를 열고 넥스트의 새 라인업 및 신곡을 공개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에는 고양시에서 열리는 《고양 락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7월 1일에는 라디오 프로그램 《두시탈출 컬투쇼》, 7월 4일에는 《김창렬의 올드스쿨》 과 《배철수의 음악캠프》 에 게스트로 출연하였고, 7월 5일에는 tvN의 예능 프로그램 《SNL 코리아 5》에 출연하여 코믹연기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사망

장협착수술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11일간의 과정

2014년 10월 17일 신해철은 갑작스런 복통을 느껴 분당의 모 대학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대기시간이 긴 탓에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스카이병원으로 이동, 각종 검사 후 장협착에 관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0월 19일 오후에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10월 20일 새벽, 미열과 함께 수술부위에 통증이 발생하여 수술을 하였던 스카이병원에 찾아갔습니다. 곧 퇴원했지만, 당일 오후 고열이 발생하여 또 다시 스카이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스카이병원에서는 복막염은 아니라는 진단을 하였고 신해철은 퇴원했습니다. 그러나 10월 22일 새벽, 다시 복부와 흉부에 통증을 느껴 스카이병원에 재입원하였고, 당일 오후 1시 경 심정지가 발생해 병원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습니다. 이에 심폐소생술이 시행됐고, 스카이병원은 신해철을 서울아산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아산병원에 후송될 당시 신해철은 의식불명상태였고 동공반사 및 자발호흡이 없었습니다. 아산병원 의료진은 당일 오후 8시부터 3시간에 걸친 복강 내 장수술 및 심막수술을 하였으나 의식은 회복되지 않았고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의료진은 “향후 수일 내에 추가적인 손상 부위 확인 및 열어놓은 복강을 폐복 또는 부분 폐복을 위하여 추가 수술을 계획하고 있다. 향후 뇌손상 정도를 파악하고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과의 협진을 받아 노력하고 있으며 회복 정도는 장기간의 경과 관찰이 필요한 상태”라고 브리핑했습니다.


의식불명 6일째 되던 날인 2014년 10월 27일 오후 8시 19분, 향년 46세로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직후 아산병원이 발표한 직접 사인은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이었습니다. 이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1차 부검을 마친 뒤, "언론에서 최초 사인으로 알려져 있었던 허혈성 뇌괴사, 이런 표현은 복막염이나 심낭염에 의해서 병발된 것으로서, 법의학적 사인으로 표현하자면 복막염 및 심낭염 그리고 이에 합병된 패혈증으로 우선 판단을 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조문 및 각계의 애도

2014년 10월 28일 오전 아산병원 내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됐습니다. 팬들을 위해 일반인 조문이 실시된 가운데 5일장 내내 1만 6000여 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을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 수 많은 동료 연예인을 비롯하여, 각계 저명 인사들의 직접 조문 또는 SNS, 근조화환, 방송매체 등을 통한 애도가 줄을 이었습니다.



두 번의 장례식

2014년 10월 31일 오전 8시 영결식, 발인 등 장례절차가 시작됐습니다. 영결식에서 추도사는 서태지가 낭독하였다. 하지만, 화장을 앞두고 장례식에 참석한 신해철의 동료음악인들은 사망의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며 유족에게 부검을 요청했고, 유족은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화장을 중단했습니다. 2014년 11월 3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경찰의 의뢰를 받아 신해철의 시신을 부검하였습니다. 부검이 끝난 후 2014년 11월 5일, 장례식이 다시 치루어져 신해철의 시신은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었고, 유해는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유토피아추모관에 봉안하였습니다.


의료과실여부 논란

수사

故 신해철의 사망과 관련하여 장협착 수술을 했던 스카이병원의 과실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신해철의 소속사는 발인 하루 전날인 2014년 10월 30일 "유족측과 상의한 결과 스카이병원을 상대로 민, 형사상 책임을 묻기로 결정했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어 신해철의 부인은 장협착수술을 하였던 스카이병원을 업무상 과실치사혐의로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이 사건의 주요 쟁점은 현재까지 3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고인의 유족측에선, 환자가 동의한 적 없는 위축소수술을 스카이병원이 임의로 시행하였다고 주장하는 바 이의 사실여부입니다. 둘째, 서울아산병원의 응급 수술 기록에는 신해철의 소장에서 1cm 크기의 천공이 발견됐고, 이를 통해 음식물 찌꺼기까지 흘러나와 복부에 염증이 발생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1차 부검결과 심낭에도 의인성으로 추정되는 천공이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천공들이 언제 어떻게 발생했는지가 쟁점입니다. 셋째, 고인이 수술 후에 여러차례 통증을 호소하였는 바 수술 이후 병원 측의 조치가 적절했는지 여부도 쟁점이죠. 2014년 11월 29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최종 부검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심낭과 소장에서 발견된 천공은 수술 과정에서 발생한 손상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경찰은 4개월여간의 수사 끝에, 수술을 집도한 스카이병원 강세훈 원장의 과실로 신해철이 사망했다고 판단, 강세훈 원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한뒤 불구속 입건했으며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였습니다. 2015년 5월 6일에는 부인 윤원희와 강세훈 원장간의 첫 공방 및 대질신문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2015년 8월 24일, 검찰은 故 신해철의 사망원인을 의료과실로 사망한 것이라고 하며 스카이병원 원장 강세훈을 불구속 기소조치했습니다.


민 · 형사 재판

2015년 5월 신해철의 유족은 해당 의사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2015년 10월 이 사건에 대한 첫 형사재판이 열렸습니다.


2016년 11월 25일 서울중앙지법 1심에서 집도의 강세훈에게 유죄가 선고 됐습니다. 재판부는 “강세훈 씨가 신해철의 복막염 증상을 미리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망에 이르게 한 점이 인정된다”며 의사로 인해 고인이 사망하게 된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또 “의사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가벼운 형을 내리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 금고형을 선고하기로 한다”며 피고인이 의사직을 유지 하면 안된다는 취지의 판결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과실치사죄는 의료법 상 면허 취소 사유가 아니어서 피고인 강세훈의 의사면허는 유지 될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한편 유가족은 "한 사람의 자식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가수였던 사람이 사망한 사건이다. 적은 형량에 부당함을 느낀다"라며 항소의 뜻을 밝혔습니다.


2018년 1월 30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는 2심에서 징역1년을 선고하였습니다. 재판부는 "강씨가 집도한 복강경 수술의 경우 천공발생 여부를 인지할 확률이 낮아 당시 신씨에 대해 사후 추적관리의 필요성이 컸다. 그런데도 퇴원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신씨는 강씨의 지시에 따라 퇴원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2심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1심에서 무죄로 판결되었던 '업무상 비밀누설 및 의료법 위반'이 유죄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환자가 사망했더라도 그의 의료 기록을 누설한 것은 의료법상 정보누설 금지 조항에 위배된다. 피고인은 유족들에게 사과하기 앞서 유족들의 동의도 받기 전에 피해자의 정보를 인터넷 사이트에 노출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로써 강세훈 원장은 1월 30일 법정구속되었습니다.


마왕

가장 널리 알려진 별명은 마왕입니다. 언론 등에서 신해철을 소개할 때, 마치 신해철의 '호(號)'인 듯이, 이 별명이 신해철의 이름 앞에 먼저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마왕 신해철씨를 모시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어둠의 세계를 컨셉으로 잡았던 고스트 스테이션의 DJ를 맡은 이후 청취자들로부터 마왕이라고 불리면서 해당 별명이 생겼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고, 상당수의 매체에도 그렇게 소개되어 있으나, 고스트 스테이션의 DJ를 맡기 이전인 1998년 6월 25일, 동아일보 25면의 기사에 이미 마왕이라는 별명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해당 기사에는 '독특한 대중문화론과 뛰어난 무대 위의 카리스마로 마니아들 사이에서 마왕으로 불리는 신해철은...' 이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참고로 신해철이 고스트 스테이션의 DJ를 맡은 것은 2001년 부터입니다. 다만 고스트 스테이션의 DJ를 맡고 난 이후, 해당 별명이 널리 사용되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이죠. 한편 신해철이 2005년 MBC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 안드레 대교주역으로 출연하였는데, 극중에서 검은 망토를 입은 모습이 마치 마왕을 연상시켰기에 해당 별명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교주

마왕으로 불리기 이전, 널리 불리던 별명은 교주였는데, 신해철은 2003년 한 방송에서 이 별명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10년 전쯤 공연 때 팬들을 통솔한 후 교주라는 별명이 붙은 것 같다. 그 때에는 공연장을 경찰이 와서 통제했고, 이는 공연을 즐기는 것을 매우 방해했다. 때문에 경찰에게 내가 알아서 통제할 테니 빠져달라고 부탁했다. 공연내내 팬들은 내가 노래부를 때에는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곡이 끝나면 앉는 식으로 질서정연하게 반복했고, 이는 흡사 사이비 종교단체와 비슷했다. 그 후부터 교주로 불린다.


신해철은 사회에 대한 통찰과 비판이 묻어있는 가사도 많이 썼는데, 단지 노래 가사로만 그치지 않고 사회문제와 정치에 실제 행동으로 참여하는 '소셜테이너'로서도 활동하였습니다.


대통령 선거운동 참여

2002년 대선 당시에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히며 선거유세에 참여하였습니다. TV 찬조 연설자로 나서기도 했는데, 문성근은 “대통령 선거 TV 지원연설에서 대본없이 20분간 할 말을 한 사람은 백기완과 신해철뿐”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시 TV 찬조 연설 내용의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 후보가 가지고 있는 품성 가운데서 그의 우직함을 좋아한다. 너무나 똑똑한 사람들과 너무나 영악한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그래서 속물공화국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에 가장 긴급 수혈되어야 할 그런 부분이 바로 그 우직함이라고 생각한다. 노 후보도 3당 합당이나 자기가 더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을때 그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남았고 그것이 지금의 노 후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노 후보가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서민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가 없이 살았다' '초년때 고생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옳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

MBC 100분 토론 출연

MBC 100분 토론에 여러차례 출연하여, 대마초 비범죄화 · 간통죄 폐지 · 체벌금지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또 100분 토론 300회, 400회 특집에서는 '최고의 비정치인 논객'으로 선정돼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100분 토론에 출연하여 대마초 비범죄화, 간통죄 폐지 등을 주장한 것과 관련하여 신해철은 아래와 같은 얘기를 한 바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바뀔 수도 없고, 질 수밖에 없는 문제에 왜 뛰어드냐고 주변에서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영악하게 지는 싸움을 피해가는 사람은 많습니다. 저는 지는 싸움도 때로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간통죄 위헌 주장

2005년 11월 3일 MBC 100분 토론에서는 간통죄 폐지 찬반을 주제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이 방송에 신해철은 간통죄 폐지에 찬성하는 측의 패널로 출연하였습니다. 한편 그로부터 10년 뒤, 그리고 신해철이 사망한 후로부터는 4개월 뒤인 2015년 2월, 헌법재판소는 형법상의 간통죄 조항을 위헌이라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해철이 주장해왔던 간통죄 폐지는 신해철 사후에야 현실이 됐습니다.

 아래는 100분 토론에서 신해철이 했던 발언 중 일부입니다.


"부부간의 신뢰와 책임의 문제다. 간통에 대해 국가가 형법으로 개입해 쇠고랑을 채우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다."

"부인이 남편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간통죄로 고소하며 끝까지 가는 경우가 적은 것이다. 간통죄가 여성들이 이혼소송일때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줄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노예근성일 수도 있다."


"(간통을) 사회적 해악이라 보기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의미하기도 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국가가 섣불리 시나리오를 쓰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A와 B라는 두 남녀가 있을때 C라는 사람이 있어서 B와 C 사이에 간통이 벌어졌다. 그런데 카메라가 B와 C를 잡아서 영화를 만들때는 카피문구가 이렇게 나온다. '하늘도 거역하지 못한 사랑.' 관객들이 볼때는 남편인 A가 무관심으로 B를 대하면서 지금까지 이 사람을 학대해온 세월이 밉고 A가 밉다. 그러나 카메라 각도가 딱 돌아가서 A, B를 비추면 부부 사이에 끼어든 C는 악녀가 되고 만다. 이건 모든 사람의 관점의 차이다."


체벌금지 법제화 추진 및 그 성과

2004년 '체벌 금지 법제화 추진 모임'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체벌금지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신해철은 카페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긴 바 있습니다.


훗날 제가 눈을 감을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음악을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체벌을 금지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힘을 모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단순히 체벌을 받는 학생들에 대한 동정의 차원이 아니라 체벌이라는 독버섯의 밑에 우리 시대의 거대한 부조리와 사회악의 상징들이 상상보다 커다란 규모로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파악하고 알리며 싸워나가달라


2006년 체벌 금지를 주제로 토론을 펼친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폭력은 전염되면 점점 강해지고 그 효과는 약해진다. 폭력 이외의 대안을 먼저 모색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운동은 2010년 10월 경기도교육청이 '경기학생인권조례'를 공포하면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습니다. 이후 광주광역시교육청, 서울특별시교육청, 전라북도교육청이 차례로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했습니다.



사이버 모욕죄에 대한 입장

2008년 12월 19일 《100분 토론》 400회 특집에서 신해철은,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처참한 언어들의 폭력 현상들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파고들어가서 '우리 국민들의 품성이 거칠어지고 어린 시절부터의 품성과 커뮤니케이션 교육에 문제가 있다'라는 점에서 출발해야지, 그것을 처벌하고 법을 만든다고 해서 크게 개선되어질 것 같지 않다"라고 하며 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라크전 파병 반대 1인 시위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전 파병 결정을 반대하며 동료 연예인들과의 결의대회나 참여연대가 주관하는 1인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신해철은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서며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깡패가 칼질할때, 나는 칼을 안 쥐었다고 하더라도, 뒤에서 칼 갈아주고, 심부름해주고, 뒤처리해준다고 해서 나는 책임이 없고 도덕적으로 깨끗한가?”

“설령 힘의 논리에 의해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더라도, 지금 당장의 국익을 위해 부도덕한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까지 한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씻을 수 없는 도덕적 부담감을 남기는 죄악을 저지른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공교육 소멸론 주장

신해철은 앨빈 토플러의 공교육 소멸론에 공감하고 이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홈스쿨링과 사교육이 공교육의 대안이 될 것이라며 자신의 자식들도 그런 방식으로 교육시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의 딸을 대안학교에 입학시켰으며, 싸이렌 음악원이라는 사교육업체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공교육 소멸론에 관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나는 공교육이 사멸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의료민영화는 반대해도 교육은 민영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현재의 공교육은 수습될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었고. 수많은 정권들이 들어서서 입시 제도를 수도 없이 뜯어고치고, 엄청나게 많은 짓을 했는데도 그 누구도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도 성공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본다. 물신주의 패러다임 아래서는 교육 문제는 해결 안된다. 내가 너무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공교육은 지금까지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했다.

(중략)


사교육을 비난하는 사람들 중 과연 몇이나 사교육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교육은 무조건 악인가. 권력이나 부의 세습을 강화하고 빈자들을 고립시키는 대표적인 악으로만 이야기될뿐이지 사교육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공교육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앨빈 토플러가 이야기했다. 21세기의 조직 가운데 제일 먼저 사라질 게 학교라고. 우리는 학교가 소멸하는 미래를 생각해봐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학교가 나쁜 짓을 많이 한 나라에서는 학교를 빨리빨리 없애야 한다.


홈스쿨링이 빈약한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대단히 강력한 교육수단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경우도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사교육이 그런 진화 단계를 밟게 될 것이라고 본다. 사교육 시장이 동네 학원에서 거대 학원으로 진화하고, 온라인 툴을 갖추고, 공교육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고. 또 그 다음엔 같은 사교육 업자들끼리 경쟁을 통해서 가격을 밑으로 내리게 되고. 미래의 사교육은 저렴한 가격으로, 온라인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에게도 얼마든지 공급될 수 있는 형태로 재편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공교육이 빨리 몰락해야 한다는 게 제 사고방식이니 (나를) 과격하다고 이야기한다."


2009년 2월 9일, 10일에는 조선일보·동아일보에 게재된 특목고 대비 입시학원의 전면광고에 출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신해철의 그동안 사회정치활동이 진보 상업주의와 쇼맨십이 아니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신해철은 2월 29일부터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이러한 비판 및 논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여기서 신해철은 이 사건을 "왜곡의 메카니즘"으로 칭하면서, 그동안 자신은 "공교육의 총체적 난국을 (…) 비판해 왔지만 (…) 사교육과는 거의 무관한 얘기였다"라고 밝히는 한편, "신해철은 평소 교육에 대해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자세를 취했으니 ‘마땅히’ 사교육에 강경히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어야 한다"라는 일부 언론 보도를 비판하였습니다. 언론 보도에서 그는 "학원 광고 찍은 이유는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다"라고 밝혔습니다. 누리꾼들은 이러한 해명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과 동조하는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1년 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논란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 입시 위주 교육을 비판하면서 학원 광고에 등장하고 학원을 운영하는 건 어폐가 있는데.

▲입시 위주 공교육을 비판했지, 지금껏 내 발언 중 사교육에 부정적인 시각은 없다. 학생때부터 내게 학교는 시간 낭비였다. 중고등학교때 수업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고 참고서로 공부했다. 인성적으로 감화되지 않는 선생들에게 고개 숙이는 위선도 짜증났다. 지식을 가르치는 전문가에게 '하드하게' 배우고 나머지 시간에는 내 생활을 갖고 싶었다.

- 사교육 과열이 가져오는 문제점도 있지 않나.


▲사교육의 기능과 비용 문제를 구분 못한 것이다. 사교육이 악인 것은 가정경제를 압박하고 학생들에게 과도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교육 문제를 지적하려면 비용 문제를 짚어야 한다. 학원이 영세업에서 벗어나 전국 체인화된 대기업이 되면 박리다매가 가능하다. 입시 학원 광고를 한 것도 그 학원이 대형 체인이었기 때문이다. 앨빈 토플러가 21세기 소멸할 첫 번째로 꼽은 게 학교였듯이 난 공교육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학교는 대중을 통제하고 정권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

영어교육관련 정책 비판

2008년 1월 30일 본인이 진행하는 인터넷방송에서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가 추진하는 영어 공교육 정책에 대해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스스로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든지, 영국의 영연방에 들어가 스스로 식민지가 되든지 …… 이게 무슨 엿같은 소리냐?”라고 강도높은 비판을 했습니다.


한편 신해철은 자신의 딸을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서울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기까지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최근에 우리 가족이 용인으로 이사했는데,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 유치원을 찾다보니 서울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냥 아이와 놀아만 주는 유치원이 없더라고요. 이사 가서 유치원을 옮겨준 후 딸에게 “새 유치원 어때?”하니까 “응, 아무 것도 안 해”하더라고요.


그때 아내와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그래, 됐다’ 싶었어요.

게임 4대 중독물질 규정 비판

2013년 10월 30일, 트위터에서 게임을 4대 중독물질로 규정한 '중독관리법' 법률안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애시당초 "게임셧다운제"에서 못막았으니 더 치고 들어올 밖에. 국민을 '통치'하고 '교화'할 '백성'으로 보는 문제보다는 그렇게라도 '좋아지면' 되는게 아니냐는 노예근성들이 문제. 비대한 공권력이 오만을 두르고 다음번에 침입하는건 너네집 안방이다."


"오만한 공권력이 함부로 개인의 삶과 가치를 규정하는데서 생기는 해악은 게임 중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악 그 자체다."


"게임중독자들이 생겨나는 원인은 게임 밖의 세상이 거지 같기 때문일진데, 그들에게 마땅히 제시할 찬란한 비전이 없다면 모욕하고 통제하기 전에 비타민제나 싸게 공급해라. 웃긴건, 모욕은 가능하지만 결국 통제는 뻔히 불가능한데도 죽어도 그걸 모른다는게."


불합리한 한국 음악산업 지적

2014년 4월, 록 그룹 시나위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신대철이 언론과 SNS를 통해 왜곡된 음원유통 구조와 불합리한 한국 음악산업 전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설립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7월에 '바른음원 협동조합'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신해철은 이 행사에서 축사를 맡게 되었는데, 축사에서 "MP3가 생겨나고 이동통신업체가 음원 서비스를 맡는 등 창작 환경이 많이 바뀌어왔는데 그때마다 착취당하는 것은 항상 음악가들이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시트콤

2005년 MBC 《안녕, 프란체스카》시즌2


광고

금강제화 랜드로바

삼화 타이거

빙그레 꽃게랑

SK하이닉스 컴보이

롯데리아 텐더그릴치킨버거

빙그레 투게더

바이엘 아스피린

SK텔레콤 생각대로T 패러디

CS교육미디어 하이스트 전속모델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  - 바리새인 역으로 출연


1988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

1990년 MBC 10대 가수상

1990년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1990년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1위

1990년 제1회 서울가요대상 신인상

1990년 제5회 골든디스크 본상

1991년 라인CC주최 백조상

1991년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 최고인기가수상

1991년 KBS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1995년 제9회 한국 노랫말 대상 환경노랫말상

2006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DJ부문 특별상

2015년 제4회 가온 차트 K-POP 어워드 K-POP 공헌상


《사랑의 날개는 너에게》 

《신해철》 

《인물과 사상 - 2003년 2월호》 

《신해철의 쾌변독설》 

《청춘을 달리다》 

《김태훈의 편견》 

《신해철 다시 읽기》


KBS 스포츠 타이틀 로고음악 제작

N.EX.T 5.5집 《ReGame?》 수록곡인 〈인형의 기사〉 뮤직비디오 감독

게임 '길티기어 이그젝스 샤프리로드' 주제곡 제작·작곡 및 편곡, 테스타먼트 목소리 출연

EBS 《다큐프라임》 - 〈행복의 조건, 복지국가를 가다 - 1부. 노동〉편 나레이션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축구팀 응원가인 〈Into The Arena〉 제작 및 편곡


이상 故신해철 님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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