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야구 해설 위원 김선우

Talon 2018. 9. 5. 08:58

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김선우 해설입니다~!


본관은 광산입니다.


고려대학교 재학 중 미국에 진출하여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메이저 리그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몬트리올 엑스포스, 콜로라도 로키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었습니다. 2007년 시즌 후 귀국하여 두산 베어스와 총액 15억 원에 1년 계약을 함으로써 KBO 리그 무대에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애틀랜타 올림픽, 1997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참가하였습니다. 메이저 리그 시절부터 불려온 써니라는 애칭이 있습니다.


인기 그룹 2PM의 준호와는 이종사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내발산초등학교

신월중학교

휘문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메이저 리그 시절

서울내발산초,신월중를 거쳐 1995년 휘문고를 청룡기 우승으로 이끌며 격이 다른 초 고교급 투수로 각광받았던 김선우 선수는 휘문고를 졸업하고 1996년 OB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았으나,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고려대 경영학과 1학년 때 참가한 애틀랜타 올림픽 일본전에서 1이닝 6실점으로 부진했습니다. 하지만 애틀랜타 올림픽의 부진을 딛고 1997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중퇴하고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주가를 높인 김선우 선수는 1997년 11월 21일 130만 달러라는 적지 않은 계약금을 받고 보스턴 레드삭스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듬해 1월 135만 달러를 받고 뉴욕 메츠에 입단한 동갑내기 투수 서재응에 의해 깨지긴 했지만 김선우 선수가 입단하기 전 120만 달러를 받았던 박찬호를 뛰어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130만 달러는 당시 1라운드 중하위권~2라운드 선수 수준의 금액으로 보스턴에서 김선우 선수에 거는 기대가 결코 작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2000년 메이저 리그 유망주 top 100을 발표하면서 김선우 선수를 전체 94위에 올렸습니다. 이는 2007년 내셔널 리그 MVP를 차지했던 지미 롤린스보다 한 단계 높은 순위였습니다.


1998년 상위 싱글A, 1999년 더블A, 2000년 트리플A를 밟아나간 뒤 2001년 메이저에 데뷔한 김선우 선수는 2002년 시즌 중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트레이드되었습니다. 당시 트레이드 상대는 전년도에 3할-30홈런-100타점을 기록했던 강타자 클리프 플로이드였는데, 보스턴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김선우 선수와 함께 우완 유망주 마이너 리거였던 송승준을 보냈습니다. 몬트리올에서 뚜렷한 성적을 올리지 못한 김선우 선수는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2005년 워싱턴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바뀐 팀 워싱턴 내셔널스에서 그 해 8월 5일에 지명 할당되었고, 콜로라도 로키스에 이적하였습니다. 콜로라도 시절이었던 2005년 9월 24일, 김선우 선수는 메이저 리그 데뷔 이후 최고의 한 해를 보내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 선발로 등판한 김선우 선수는 배리 본즈, 모이세스 알루, 오마 비즈켈 등이 포진한 샌프란시스코 타선을 3안타 1볼넷으로 꽁꽁 묶으며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던 쿠어스 필드 야구장에서 완봉승을 따 냈습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팀에 합류해 병역 문제를 해결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다시 부진에 빠진 김선우 선수는 그 해 9월 5일 신시내티 레즈에 트레이드되었고, 시즌 후 신시내티에서 방출당했습니다. 2007년 1월 4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재기를 노렸으나 더 이상 메이저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김선우 선수는 2008년 1월에 자신을 처음에 지명하였고 끊임없이 작업을 걸어 오던 두산 베어스와 계약금 9억 원, 연봉 4억 원, 인센티브 2억 원 등 총 15억 원에 계약을 맺고 미국 생활을 전격 청산한 후, 한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전년도에 제시했던 4년 40억 원 이상의 대우보다 큰 폭으로 줄었지만 적은 금액은 아니었으며, KBO 리그 복귀 당시 메이저 리그 118경기 등판에 통산 13승을 기록하였습니다.


KBO 리그 시절

2007년 시즌을 앞두고 에이스였던 박명환이 FA를 선언하여 LG 트윈스에게 빼앗겼던 두산 베어스는 2008년 시즌을 앞두고 또 다시 에이스 리오스를 일본 프로 야구 팀 야쿠르트에 내줬습니다. 이로써 두산 베어스가 지명권이 있었던 김선우 선수를 영입하며 그에게 기대했던 역할은 당연히 에이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가 메이저 리그에서 비록 통산 13승을 거두는 데 그쳤지만,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153 km/h에 육박하는 포심 패스트볼과 역회전 무브먼트가 좋은 투심 패스트볼, 날카로운 슬라이더는 메이저 리그에서도 충분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무기로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직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던 김선우 선수의 자신감은 그의 데뷔 시즌을 통해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직구, 직구, 직구로 가는 단순한 일변도의 투구는 타자들에게 읽히기 쉬운 투구 패턴이었고, 직구가 149 km/h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자들에게 계속 안타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안고 투구를 했기 때문에 시즌 중에 계속 통증에 발목을 잡히기도 하였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예선 당시 다시 태극 마크를 달았으나 이후 부진으로 본선 대표팀에서 탈락했던 김선우 선수는 한국 무대 데뷔 첫 해 초반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해 2군에 내려가기도 했고, 1군 6승 7패 평균자책 4.25에 그쳤습니다.


2008년 한국시리즈 때 투심 패스트볼이 살아나면서, 그리고 포크볼을 던지면서 한층 나아진 모습을 보인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습니다. 이에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두산의 팀 전력에 김선우가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2009년 다승왕을 차지할 수도 있다"고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2009년 11승 10패를 기록하여 두 자리수 승수 달성에 성공하였으나, 전년도보다 높은 5.11의 평균 자책점을 보였습니다. 시즌 후 그는 타자들의 실력이 급상승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2010년부터 두산 베어스의 선발 투수로 정착하여 중요한 선발의 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11년에는 16승 7패를 거두며 다승 2위, 평균자책 3위의 좋은 성적을 거뒀고 한국 데뷔 이후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전 구단 상대 승리도 기록했습니다. 2011년 6월 3일 잠실 삼성전에서는 한국·미국 통산 데뷔 첫 세이브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2011년 이후 계속 부진에 빠지게 된 그는 무릎과 종아리 부상이 겹쳐 2013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구단에서 코치직을 제안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2013년 11월 25일 두산 베어스와의 합의 하에 방출을 요청하여 팀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등에서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으나 계속 서울 연고 팀에서 뛰고 싶었고 어린시절부터 LG 트윈스에서 뛰고 싶었던 그는 가족과 상의한 끝에 2013년보다 3억 5,000만 원이 삭감된 1억 5,000만 원에 연봉 계약을 맺고 LG 트윈스 이적을 확정했습니다.


이후 KBO 리그 친정 팀인 두산과의 개막전 선발로 낙점받았으나, 패전 투수가 됐고 2군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결국 2014년 1군 6경기에 등판하여 1패 평균자책 14.04를 기록하고 그 해 11월 17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습니다.

 이후 메이저 리그 경력을 눈여겨 본 MBC 스포츠+에서 그를 야구 해설위원으로 불러들였습니다.



2014년 12월 15일 MBC Sports+를 통해 메이저 리그해설가로 변신하게 되었음을 알렸습니다.


이상 김선우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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