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 정민태 코치입니다~!
1999년 20승 7패로 다승왕에 올라 KBO 리그의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로 기록되었습니다. 시속 150km에 근접하는 포심과 범타유도를 위한 투심 등의 속구, 그리고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포크볼 등과 같은 변화구를 잘 활용하여 타자를 잡아내는 투수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승 1위 3회, 승률 1위, 골든 글러브 3회를 차지했습니다.
아마추어 시절
인천 인천숭의초등학교, 동산중학교를 거쳐 동산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동하였습니다. 연고 팀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한양대학교 체육학과로 진학했습니다. 한양대학교 야구부에서는 구대성과 함께 에이스로 활약하였으며, 아마추어 국가대표팀으로 뽑혔는데, 1989년 IBA 회장배 아마추어 야구 대회에서는 한국 국가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으로 뽑혔습니다. 1990년에는 13승 3패, 1.26의 평균자책점으로 그 해 아마추어 야구 대회의 MVP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입단을 제의했으나, 협상이 흐지부지된 이후 1차 지명을 받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태평양 돌핀스 시절
1991년 말 태평양 돌핀스의 김동기, 가내영과 함께, 구단주가 허위 진단서를 써 병역을 면제시켰다는 혐의에 휘말려 수감 위기에 처했으나, 집행 유예로 풀려나 1억 7,200만원의 계약금 및 연봉의 조건으로 태평양 돌핀스의 정식 선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부상과 컨디션 난조 등으로 결장이 심해지면서 이듬해까지 계속 부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활 끝에 1994년부터 서서히 재기하기 시작하여 선배 박정현, 최창호, 후배 신인 김홍집, 마무리 정명원 등과 함께 활약하며, 태평양 돌핀스가 인천 연고 팀 중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시즌 후 11월 21일 결혼하였습니다. 1995년에는 8승을 기록하였으나, 동시에 13패를 기록하여 한화의 한용덕, 구대성과 함께 다패 타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현대 유니콘스 시절
1996년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그는 현대 유니콘스 소속이 되었습니다. 4월 16일 개막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첫 승을 거둔 뒤 시즌 초반에 마무리 정명원과 함께 현대 유니콘스의 6연승을 이끌었으며, 1996년 올스타전에도 베스트 10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이 과정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부정 투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9월까지 15승을 거두며 구대성, 송진우, 주형광 등과 다승 경쟁을 벌인 끝에, 15승 9패, 2점대 평균자책점, 127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승 6위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이 해에 현대는 신인왕 타이틀을 획득한 박재홍, 박진만, 윤덕규 등도 활약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으나, 해태 타이거즈에게 패하여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한국시리즈에서 조계현을 상대로 2번 등판했으나, 1구원승과 1번의 패전을 기록했습니다. 시즌 후, 9,000만원으로 오른 연봉에 현대 유니콘스와 재계약하여 2년 연속 100% 연봉 상승을 기록했습니다. 1997년에도 개막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타선의 부진으로 패전을 거듭하며, 시즌 초반에는 저조한 성적을 냈습니다. 그러나 7월 12일에 2연패를 끊은 것을 시작으로 점차 승리 수를 채워나가며, 박지철, 김상진, 정민철과 다승왕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중 정민철과는 다승왕 뿐만 아니라 탈삼진왕 타이틀을 두고도 경쟁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9월 23일에도 완봉승을 거두며 13승 13패로 시즌을 마치며, 그 날까지 탈삼진 1위였으나, 한화 이글스의 잔여 경기에서 정민철이 삼진을 더 많이 잡아 탈삼진왕 타이틀을 뺐겼습니다. 시즌 후, 그는 구단에서 팀 내 최우수 선수 타이틀을 받았습니다. 1998년, 3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가 되었지만, 비로 연기되었습니다. 또한, 4월 동안 4승을 기록하며 이승엽과 함께 첫 월간 MVP로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박재홍과 함께 팀의 최단기 시즌 40승을 기록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후반기에 그는 베이커, 위재영과 정명원,문동환 등과 다승 경쟁을 벌였습니다. 7월 30일에 12승을 기록하고, 8월 7일 다시 완봉승을 거두며 13승으로 선두를 지켜왔으나 결국 18승을 거둔 김용수가 다승왕을 차지하였습니다. 현대 유니콘스는 정규 리그에서 우승하여 한국시리즈로 직행했는데, LG 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1차전과 4차전에서 선발 승을, 6차전에서 구원 등판으로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첫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MVP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시즌 후, 그는 대우자동차와 스포츠조선이 개최한 "레간자 대상"에서 선수들이 직접 뽑은 선수에게 주는 상인 "라노스 대상"을 받았고 골든 포토상에 선정되었으며, 경쟁 후보였던 김용수를 제치고 처음으로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1999년에 그는 1억 5,200만원의 연봉으로 현대 유니콘스와 재계약했는데, 정명원에 이어 두 번째로 그 해에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김용수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 해 2월에 처음으로, KBO 리그 팀들이 해외 전지훈련지에서 현지의 프로 야구단과 연습 경기를 치렀는데, 그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두 번째 연습경기에 첫 등판했습니다. 1999년에는 또한 KBO 리그가 드림 리그와 매직 리그의 양대 리그제를 시행했을 때 그는 드림 리그 개막전에서도 선발로 등판해, 3년 연속 개막전 선발승을 거두었습니다. 시즌 중반, 그는 허리 통증과 허벅지 부상 등으로 등판을 못하기도 했지만, 20승을 기록하여 다승왕을 차지했습니다. 시즌 후, 그는 1999년 한일 슈퍼 게임에 한국 대표로 출장하였으며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영입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프로 야구 선수는 7년 이상 한국에서 활동해야 해외로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둔 KBO가 그가 아직 7년을 채우지 못했다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진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MLB 메이저 리그 커미셔너 사무국에서도 그와 정민철의 신분 조회를 요청하며 관심을 보였으나 KBO가 허락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구단과 모기업 현대그룹까지 엮이며 마찰을 빚게 되었습니다. 결국 일본 진출이 무산된 그는 구단에게 3억원을 요구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12월에 그는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투수 부문을 수상하였습니다. 2000년에 207이닝을 던지면서 18승, 3점대 평균자책점, 153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승 1위, 투구 이닝 2위, 평균자책점 7위, 탈삼진 4위에 올랐습니다. 임선동, 김수경과 함께 다승왕이 되며 1999년에 이어서 2년 연속으로 다승왕을 차지했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 1, 4차전에 선발 등판해 모두 승리했으며, 한국시리즈에서는 2번 선발 등판해 1승을 기록했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그는 2000년 시즌 후 해외 진출을 원했었습니다. 그때 당시 일본 야구팀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 요미우리 자이언츠 세 팀에서 관심을 보였는데, 2001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전격 입단했습니다. 그는 3년 계약에 이적료 약 5억 5,000만엔, 계약금 1억 5,000만엔, 연봉 1억 3,000만엔에 계약하여 당시 최고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단 첫 해부터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였던 가토리 요시타카와 불화가 있었습니다. 결국 2001년, 2002년 2년 동안 일본 리그 적응 실패와 실력 차이를 느꼈습니다. 일본에서 통산 성적은 27경기에 등판해 6점대 평균자책점, 2승 1패를 기록하며, 그가 KBO 리그에서 활약한 모습과는 달리 불명예를 남기며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친정 팀에 복귀하였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복귀
현대 유니콘스 복귀
2003년 현대 유니콘스로 돌아오면서 그는 투심을 새로 개발하였고, 슬라이더, 직구, 특유의 슬로 커브 등으로 통해 경기를 운영했습니다. 이 시즌에 177이닝동안 17승 2패, 3점대 평균자책점, 122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군림했습니다. 또한, 이 해 2000년의 기록과 이어지는 선발 21연승을 달성해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시즌에는 다승 1위, 투구 이닝 4위, 평균자책점 3위, 탈삼진 3위, 승률 1위를 기록했으며 팀의 정규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1, 4, 7차전에 선발 등판하였는데, 모두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7차전에서는 허벅지 통증이 심한 상태임에 불구하고, 테이핑을 감으면서까지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게 됩니다.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거둔 그는 1998년에 이어서 2번째로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으며, 1999년, 2000년에 이어서 3번째로 다승왕이 되었고, 정규시즌 0.895라는 높은 승률로 데뷔 이래 첫 승률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활약과 공헌을 인정받아 시즌 후 연봉 7억 4,000만원에 계약하여 프로야구 선수로서 최대 연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2004년 4월 말 무렵에 노화와 허리 부상 등이 겹치면서 악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2004년에는 7승 14패,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부진했으며,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2차전, 7차전에 등판했을 때도 크게 부진을 겪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먹튀'라는 온갖 오명을 받아야만 했고, 그의 연봉은 그 이후에도 계속 대폭 감소되었습니다. 2005년 ~ 2007년 사이에는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여 부상 후유증 등 부진으로 인해 단 1승도 못 거둔채 10패만 기록하였습니다.
KIA 타이거즈 시절
2008년 3월에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선수단을 인계하여 새로 창단한 우리 히어로즈와 계약 협상을 진행했으나 입장 차이로 협상이 결렬되면서 자유 계약 선수로 풀렸습니다. 그리고 KIA 타이거즈와 연봉 7,000만원에 계약하면서 선수 생활 16년만에 처음으로 타 팀에 이적하였습니다. 2008년 4월 18일 한화전에 시즌 첫 선발로 등판했으나, 3과 2/3이닝동안 김태완의 장외 만루 홈런을 포함해 5피안타 6실점을 기록하여 패전 투수가 되었습니다. 이 경기가 2008년의 1군 첫 경기이자 현역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이후 2군에 내려가면서 재활에 다짐했으나 그 해 7월 8일, 결국 오른쪽 어깨 부상을 이유로 재활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 이후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초창기에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한 KIA에서의 투수 코치 생활을 하고 싶어했었으며, 미국이나 일본으로의 코치 연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외 연수를 한다지만 실상은 메이저 리그와 일본 1군 야구가 아닌 마이너 리그와 일본 2군 야구에서의 연수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해외 연수라는 우회로를 이용하지 않고 곧바로 투수 코치을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감독이자, 넥센 히어로즈의 신임 감독으로 선임된 김시진이 태평양 돌핀스 및 현대 유니콘스 시절 오랫동안 코치 및 감독과 선수로서 함께하였던 그를 투수 코치로 영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도 수락하여 2008년 10월 14일에 넥센 히어로즈와 연봉 6,000만원에 투수코치로 계약하였습니다. 넥센 히어로즈의 코치로 들어온 후 2009년 8월 2일에 목동야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습니다. 은퇴식 때 정동진 전 태평양 돌핀스 감독 등 예전 태평양 돌핀스와 현대 유니콘스 시절에 함께한 선수 및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이후 2013년에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부임한 김시진 감독을 따라 이적했지만, 투수진을 이끌지 못하고 2014년 도중 1군 투수 코치에서 3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롯데 자이언츠와 재계약에 실패했습니다. 10월 31일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했습니다.
그의 아들 정선호는 현재 연세대학교 야구부에서 뛰고 있으며, 포지션은 외야수입니다.
인천숭의초등학교
동산중학교
동산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체육학과
KBO 리그 플레이오프 최우수선수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일간스포츠 제일화재 프로야구 최고투수상
한국시리즈 최우수 선수 - 1998, 2003
한국 프로 야구 정규리그 다승 1위 - 1999~2000, 2003
한국 프로 야구 정규리그 승률 1위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투수 부문 - 1998, 1999, 2003
이상 정민태 코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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