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움직이는 화약고 공필성 코치입니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1990년 경성대학교를 졸업하고 입단해 주로 3루수로 활동했습니다. 1992년 팀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했습니다.
은퇴 후 2014 시즌까지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로 재임한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선수였습니다. 2014년 CCTV 불법 사찰 사건에서 프런트와 선수단과의 갈등이 불거지는 와중에, 당시 감독이었던 김시진 이후 대리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소문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등 프런트계 코치라는 누명을 썼습니다. 그 후 팀내 불화와 구설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코치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사임 후 사실을 알게 된 선수단과 오해를 풀었으나 과거의 일이라며 재합류를 사양했습니다. 2014년 12월부터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2016년에 두산 베어스 2군 감독으로 활동했습니다. 2017년 4월에 두산 베어스 수비코치로 활동했습니다.
신인 시절에는 잦은 수비 실책으로 인해, '움직이는 화약고'라는 오명을 얻었으나 이후 안정된 수비를 보여 주어, 후에 애정 어린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현역 시절에는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는 타격 폼 때문에 유달리 몸에 맞는 볼이 많았는데, 1995년에는 22사구를 맞았음에도 공을 피하지 않는 근성을 보여 '사구의 화신', '자해 공갈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제황초등학교
진해남중학교
마산상업고등학교
경성대학교
공필성 코치를 상징하는 등번호는 0번. 선수단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0번이나 3자릿수 등번호도 볼 수 있게 된 2010년대 프로야구에서는 가끔씩 보이는 번호이지만 90년대 당시엔 드문 등번호였습니다. 은퇴 이후 일구회 자선시합에도 이 0번을 달고 나오는 등 0번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선수 중 하나. 마침 성이 '공' 씨였기에 그런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풀이가 "공을 달면 필히 성공할 것" 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0번을 달게된 동기는 원래 등번호였던 43번을 뺏기고 나서 달 번호가 없어서. 이유야 어찌 되었건 공필성 코치에게는 굉장히 잘 어울리는 등번호였습니다.
그 유명한 1999 시즌 플레이오프 7차전의 기적도 공필성 선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9회 공필성 선수가 안타로 출루했고, 이후 임수혁이 동점 홈런을 때렸습니다.
외모가 매우 잘생긴 선수 중 하나. 나이들며 역변하는 경우도 많은데 공필성 코치의 경우에는 오히려 나이를 먹으며 중후한 멋이 생긴 케이스.
2006년 8월 SK 전에서 호세와 신승현 사이에 벌어진 벤치클리어링에서 호세가 휘두른 주먹에 대신 맞고 떨어져나가 그의 살신성인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2007년 당시 윤형배 2군 투수코치와 시구-시타로 나섰을 때도 사구를 맞는 황당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세 번 나간 한국시리즈에서 총 두 개의 홈런을 때렸는데, 이는 2018년 기준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통산 홈런 1위입니다. 여담으로 두 개 친 선수가 공필성 선수 한 명뿐이라 한 개친 델동님도 2위입니다.
승률 0.286으로 역대 롯데 감독 중 금지어 다음으로 낮습니다.
이상 공필성 코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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