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前 프로 야구팀 현대 유니콘스

Talon 2020. 2. 3. 09:51

오늘 소개할 팀은 바로~

현대 유니콘스입니다~!


KBO 소속으로, 창단 당시에는 인천 공설운동장 야구장을, 2000년부터는 수원야구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습니다.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1995년 9월 21일 450억 원에 인수한 다음 1996년 3월 11일부터 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시즌부터 1999년 시즌까지 인천광역시 및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을 연고지로 했었으며, 2000년 시즌부터 연고지를 서울특별시로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구단의 모기업인 현대그룹의 재정난으로 인해 수원시를 임시 연고지로 썼고, 이후에도 구단의 재정난이 계속되어 2008년 3월 10일 구단이 해체되기 전까지 수원을 연고로 하였습니다. 구단주 정몽헌 회장이 현대전자 회장을 맡고 있었을 때부터 현대전자가 대주주였습니다. 그러나 2000년, 모기업의 심한 재정난과 현대그룹의 내분으로 인해 대주주 현대전자는 서서히 분열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2001년 결국 부도가 난 뒤 '하이닉스반도체'로 사명을 변경하였고, 같은 해 8월 현대그룹에서 완전히 계열 분리된 다음, 그 이후로 야구단을 단 한번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람에 2001년 가을부터는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범 현대가의 소수의 사람들이 지원한 자금으로 간신히 버티면서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구단주 정몽헌 회장이 2003년 8월 투신 자살한 이후 현대 유니콘스 구단주 자리는 공석이 되었으며, 거기에 연고지 문제까지 겹쳐 1차 지명권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2006년 시즌부터는 현대가에서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매우 극심한 재정난으로 완전히 치닫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구단이 상당히 심한 재정난을 겪으면서 서울특별시로의 연고 이전이 완료되기 전인 2007년 말, 결국 팀이 해체되었습니다.

이후 서울 연고권은 현대 야구단을 인수한 팀에게 승계하기로 했고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현대 유니콘스를 해체후 재창단 방식으로 인수, 현대 유니콘스를 모태로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하면서 서울 연고권은 히어로즈로 넘어갔습니다. 2000년 1월, 현대그룹에서 주도하여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이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추진하자, 이에 인천 야구 팬들은 깊은 실망감과 함께 질타, 반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재정난으로 인해 수원으로 이전했지만 이후에도 인천 야구 팬들은 연고지 이전에 대해서 많은 비난을 하였습니다.

 
1996년 4월 13일 인천 숭의야구장에서 LG 트윈스와 첫 개막전 경기를 벌였으나 6:8로 졌습니다. 하지만 태평양 돌핀스 시절 투수 왕국이라 불렸을 만큼 탄탄한 투수진을 바탕으로 하여 창단 첫 년부터 1996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준우승을 하였고, 이후 구단의 과감한 투자에 힘입어 창단 3년 만인 1998년을 시작으로 2000년, 2003년, 2004년등 무려 네 차례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2004년의 마지막 우승 직후 FA 등으로 핵심 전력들이 서서히 이탈하기 시작했고, 재정난까지 겹치게 되었습니다. 2007년 10월 5일 고별 경기인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며, 2007년 정규 시즌 6위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습니다. 이후 투자회사인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현대 유니콘스를 재창단 형식으로 인수했고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은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 되었습니다.

 
태평양 돌핀스 수석코치였던 김재박이 태평양 인수 후 현대의 창단 감독으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재임했으며, 김재박 감독이 LG 트윈스로 옮긴 2006년 10월부터 2007년까지는 오랫동안 김재박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투수코치 김시진이 감독을 맡았습니다.


창단 이전


현대 그룹 인수 이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에 창단한 삼미 슈퍼스타즈, 1985년 후기리그에 삼미를 인수하고 창단한 청보 핀토스, 1988년 청보를 인수하고 창단한 태평양 돌핀스로 이어져 1995년 9월 21일 현대그룹에서 야구단을 인수하기 전까지 다른구단들에 비해 규모가 팀전력이 전반적으로 빈약하였을뿐만 아니라 모기업의 지원 역시 약하였습니다. 현대그룹이 인수하기 전까지 14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없이, 준우승 1번, 플레이오프 진출 2번, 최하위 6번 기록했습니다.


현대 피닉스와 태평양 돌핀스 매각
현대 피닉스는 1994년 현대그룹에서 지원하여 창단되었던 아마추어 실업 야구 팀이었습니다. 프로 야구 팀 창단을 꾸준히 모색해 왔던 현대그룹에서 프로 야구 팀의 창단이 여의치 않자, 1994년에 '현대 피닉스' 라는 실업 팀을 창단하였는데,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 CEO 출신이었던 이현태 대한야구협회장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피닉스 실업 야구 팀은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는 거물급 선수들을 대상으로 애틀랜타 올림픽 참가와 병역 문제 해결이라는 당근을 제시하여 무차별 영입을 시도했으며 울산지역에 중고팀을 만들어 아마야구가 전체적으로 균형발전할 수 있도록 했고 이 지역을 연고지로 원했지만 프랜차이즈 기득권을 가진 롯데의 반발로 좌절됐습니다.당시 최고 유망주로 평가받았던 문동환, 안희봉, 조경환, 문희성, 강혁 등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현대 피닉스에 합류했고, 현대그룹은 영입한 선수들에게 수억에 달하는 파격적인 거금을 쥐어 주기도 했습니다.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대표팀 엔트리 중 대학 선수 외의 대부분은 현대 피닉스 선수들이었습니다. 김시진 투수코치도 1997년까지 현대 피닉스에서 몸담기도 했습니다. 선수들의 영입 과정에서 한때 프로 야구 팀 삼성 라이온즈와 스카우트 파동 대결 구도로 법적 공방까지 이어졌을 정도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2차 지명을 받게 되자 피닉스 선수단을 이탈하여 입단한 내야수 김재걸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프로 야구 신인 선수들의 몸값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으며, 당시 야구 팬들 사이에서 구설수에 올라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현대 피닉스는 훗날 1995년 현대그룹에서 프로 야구 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1996년 현대 유니콘스로 창단함으로써 졸지에 현대 유니콘스 프로야구단을 위한 선수 수급 기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피닉스는 프로에 가는 선수들에게 처음 지급했던 계약금이 '실제로는 대여금'이라며 이자까지 5배나 붙여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문동환을 롯데 자이언츠가 영입하면서 전준호를 현대 유니콘스에 내주는 어이없는 트레이드가 발생했습니다. 그 후 현대 피닉스는 IMF 역풍에 휘말려 1999년 시즌을 끝으로 해체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피닉스 출신으로 프로 야구계에 진출하여 성공한 선수는 문동환 정도로 손에 꼽을 정도이며, 아마추어와 프로의 수준 차이로 인하여 잘 적응하지 못하고 기량도 적정 수준에 미치지 못해 잠시 반짝하다가 방출 등으로 현역에서 대부분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편 1995년 시즌 중 태평양 돌핀스는 구단 운영에 어려움이 생겨 매각을 결정했고, 1995년 9월 21일 현대그룹에서 450억에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함으로써 1995년 시즌이 끝난 뒤 1996년 3월 11일 '현대 유니콘스'로 팀명으로 결정, 창단하게 됩니다. 구단주는 현대전자 회장이었던 정몽헌 회장이 맡아 대주주는 현대전자가 지원하였으며, 창단 감독은 태평양 돌핀스의 수석 코치 김재박으로 내정하였습니다.

 
1996년~1999년
1996년 태평양이 해체되고 현대가 그 역사를 인수받아 현대 피닉스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태평양을 재창단 역사는 그대로 인계, 박재홍,박진만,최원호를 영입하여 한층더 선수층이 듬직해지고 이듬해인 1997년 대어급 선수를 받쳐줄 후보선수들 부족으로 정규 시즌 6위를 기록하였습니다. 그후 1998년 정명원이 계투에서 보직을 선발로 이동, 성공을 거뒀다 트레이드 충격을 걷어낸 전준호의 포텐이 터지고 이명수 , 박경완을 각각 OB,쌍방울에서 영입을 하여 전력을 보강 코치진에선, 김시진을 영입하여 한층더 강화시켜 사상첫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그후 1999년 양대리그 드림리그,매직리그체제로 시작됐던 99시즌 전년도 우승팀의 면모는 온데간데없고 김경기의 부상 김수경의 부진으로 여러모로 힘든시즌을 겪었다 드림리그에선 3위,정규시즌에선 5위를 달성하였습니다.


1996년
1996년 창단한 현대 유니콘스 구단은 당시 재계 1·2위를 다투고 있던 현대 그룹의 계열사 현대전자의 대폭적인 지원을 받아 기존의 약팀의 이미지에서 강팀의 이미지로 차츰 변모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대어급 선수들을 영입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고졸 유격수 대어급이었던 박진만과 대졸 투수 최원호, 외야수 박재홍 입단 등을 들수 있습니다. 특히, 대졸 외야수 박재홍은 1992년 드래프트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1차 지명되었으나, 박재홍은 연세대학교로 진학하였고 졸업하면서 지명 권한이 있는 연고 구단 해태 타이거즈로 입단해 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기로 밀약을 맺어 해태 타이거즈로의 입단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그가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는 조건으로 당시 해태와 현대는 박재홍의 지명권과 태평양 투수 최상덕을 맞바꾸는 트레이드를 성사시킴으로써 박재홍은 현대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대그룹의 과감한 투자에 힘입어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 분위기는 기존의 태평양 돌핀스 시절때 선수단 분위기와 크게 달랐습니다. 그러나, 1996년 정규 시즌, 많은 야구 전문가들은 현대 유니콘스에 대해 빈약한 타선 때문에 하위권으로 예상하였지만, 창단 첫해 현대 유니콘스는 기존의 태평양 돌핀스 시절 투수 왕국이라 불릴 만큼 화려하고 탄탄한 투수진 구축등 바탕과 함께 타선에서는 신인선수 박재홍의 30-30클럽 달성과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4번 타자 거포 김경기와 고졸로 갓 입단한 신인 유격수 박진만의 눈부신 수비활약 등 타선의 활력소 역할을 보였습니다. 또한, 새로 임명된 김재박 감독은 선수단 조직력을 짜임새있게 다듬는 데 중점을 두어 정규시즌 4위를 기록함으로써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어 버렸습니다. 창단 첫 해 정규시즌 4위를 기록하여 포스트 시즌에 진출,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2전 전승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플레이오프 맞상대인 쌍방울 레이더스를 상대로 1·2차전 전주에서 9회말 끝내기로 분패하였으나, 3·4차전 인천에서 승리, 5차전 잠실에서 승리함으로써 3승 2패로 극적인 승리, 인천 연고 팀 역사상 2번째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됩니다.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상대로 경기를 치르게 되었는데, 당시 양팀 전력비교하면 해태 타이거즈가 일방적으로 우세했었습니다.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진들은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 등을 거치면서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타선은 기존의 '물방망이 타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전반적으로 해태 타이거즈에 비해 열세적이었던 상황 속에서 한국시리즈 4차전, 마무리 투수였던 정명원이 깜짝 선발로 등판,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등 분위기 반전을 꾀했으나, 한국시리즈 5차전과 6차전에서 분패함으로써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 현대 유니콘스는 창단 첫 해에 준우승에 만족하였습니다.

 
1997년
1996년 창단 첫 해에 정규시즌 4위, 한국시리즈 준우승한 현대 유니콘스는 전력보강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997년 시즌 시작 전, 현대 유니콘스와 롯데 자이언츠 사이에 톱타자 전준호<-> 투수 유망주 문동환+5억에 트레이드가 성사되는데, 이는 실업 야구 팀 '현대 피닉스' 계약으로 소속되어 있던 문동환과의 계약을 해제해 원래 지명권이 있던 롯데 자이언츠구단과의 계약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에 해당 구단으로부터 주력 클래스의 선수하고 트레이드로 받아 들이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에서 이적한 전준호는 트레이드 충격에 벗어나지 못한 채로 1997년 정규 시즌을 맞이하였고, 그해에 프로 선수 생활 가장 낮은 성적을 기록하게 됩니다.

 
1997년 현대 유니콘스는 기존의 탄탄한 투수진을 바탕으로 에이스 정민태와 불펜 투수 조웅천 등이 활약했었으나, 선발 투수 위재영은 시즌 중 부상을 당해 전력에 이탈하였고, 마무리 투수 정명원의 부진과 타선은 전체적으로 침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투타 밸런스도 불균형을 이루었습니다. 팀 타선의 활력소 역할인 박재홍은 시즌 중반 부상을 당해 30게임이나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326에 20-20클럽 달성하여 제 몫을 했으나, 거포 김경기는 프로데뷔 이후 가장 낮은 성적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프로 2년차 풀타임을 뛰는 유격수 박진만은 전경기 출장하여 1할 타율을 기록하는등 심각한 부진을 겪었습니다.

 
1997년 현대 유니콘스는 선수층 빈약함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어 정규 시즌 6위를 기록하였습니다.


1998년
현대 유니콘스 구단은 빈약한 포수자원을 메우기 위해 시즌 시작 전, 당시 재정난을 겪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포수 박경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게 됩니다. 당시 재정난을 겪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주축 선수를 현금으로 빼가는 데서 야구팬들 사이에 구설수에 오르곤 했었습니다. 이어서 OB 베어스에서 방출되어 선수생활에 궁지 몰렸던 2루수 이명수를 영입하였으며, 1998년부터 용병제가 도입되면서 용병선수들 조 스트롱과 스캇 쿨바를 영입하였습니다. 투수진에서는 마무리 투수였던 정명원이 선발로 전환하였고, 고졸 신인으로 갓 입단한 김수경은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면서 새로 부임된 투수코치 김시진의 조언으로 기량이 더욱 향상되었습니다.

 
정규시즌 시작 전반부터 현대 유니콘스는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했습니다. 투-타 완벽한 밸런스와 짜임새를 갖추었을뿐만 아닌 용병선수들 활약이 돋보였습니다. 선발투수진에서는 정민태-정명원-위재영-김수경-최원호 1~5선발 투수들 전원 두자리 승수 이상을 기록하였는데, 인천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선발 로테이션에 진입한 신인 투수 김수경은 특히 160이닝 동안 168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닥터 K'로서의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이는 당시 현대 투수코치이던 김시진이 1983년 세웠던 신인 최다 탈삼진을 넘어선 기록이었습니다.


타선에서는 기존의 '물방망이 타선'의 이미지를 탈피하였습니다. 1997년 트레이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전준호는 1998년 트레이드 충격을 털어내 확실한 1번 타자 역할을 하였으며, OB 베어스 출신인 베테랑 이명수는 2번타자로 자주 출장하여 프로생애 첫 3할타율이상 기록하는등 테이블셔터로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었으며, 중심타선 박재홍-스콧 쿨바-김경기로 이어지는 타선은 위력적이었습니다. 박재홍은 1998년에 30홈런-30도루 이상을 달성하였으며, 용병선수 스콧 쿨바는 26홈런을 기록하였습니다.

 
시즌 중에는 한국시리즈에 대비하여 재정난을 겪던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트레이드로 당시 현대유니콘스 선수였던 박정현과 가내영 두 선수와 현금 6억원에 맞트레이드로 불펜투수 조규제를 영입했으며, 이와 동시에 LG 트윈스의 박종호<->최창호와 맞트레이드를 감행하였는데 조규제는 이적 후 선발로 전향했습니다. 1998년 정규시즌 동안 조직력과 짜임새로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는 경기가 많았던 현대유니콘스는 81승 45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기존의 약팀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인천 연고팀 역사상 최초의 정규시즌 1위를 기록한 엄청난 의의였습니다.

 
정규시즌 1위한 현대유니콘스는 한국시리즈 직행하였는데, 한국시리즈 맞 상대는 LG 트윈스였습니다. 당시 LG 트윈스는 현대 유니콘스 상대로 11승 7패를 기록하여 상당히 강세를 보였었습니다. 거기다 한국시리즈 경기전 공백기동안 선수단내 청백전에서 주축선수 박재홍이 부상을 당하게 되어 현대측에서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경기에 박재홍은 테이핑을 감으면서까지 지명타자로 출장하여 맹활약을 하게 됩니다.

 
한국시리즈 기간동안 6차전 경기를 치렀는데, 지명타자로 출장한 박재홍의 활약과 에이스 정민태의 눈부시는 활약에 힘입어 4승2패로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을 하여 인천연고팀 프로야구 창단 17년 만에 우승을 이뤄내게 됩니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한 정민태는 한국시리즈 1차전과 4차전에 완벽한 투구를 보였고, 6차전에 마무리로 등판하여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이는 구단의 공격적인 투자와 함께 창단 3년 만에 첫 우승을 하였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 해 현대 유니콘스는 한국시리즈 MVP와 신인왕을 배출했고, 4명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1999년
매직리그, 드림리그로 나뉘어 양대리그 체제가 시작되었고, 1998년 창단 첫 우승을 일궈낸 현대 유니콘스는 1999년시즌전 우승후보로 거론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면서 현대유니콘스는 투수진이 총체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선발에서 마무리로 복귀한 정명원은 노쇠화 기미를 보였고, 선발 위재영은 시즌중 부상에 시달려 전력이탈하였으며, 신인급 투수들인 김수경과 최원호는 혹독한 2년차 징크스를 겪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유일하게 투수진에서 눈부신 활약은 했던 선수는 정민태였습니다. 정민태는 1999년에 20승을 기록했습니다. 타선에서는 거포 김경기가 시즌중 부상으로 전력 이탈하였으나, 1998년 LG에서 이적한 박종호의 활약과 톱타자 전준호, 중심타선의 박재홍,에디 피어슨의 활약등 타선에서는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1999년 시즌에는 전체적으로 투-타 불균형이 극심하여 드림리그에서 3위를 기록, 정규시즌 5위를 기록하였습니다.

 
2000년~2004년


2000년
일단 현대는 충격적인 선언으로 시즌을 준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연고지 이전. 원래 연고지였던 인천,경기도,강원도 지역에서 서울로 이전하는 한마디로 뒤통수를 치는 선언을 한것입니다. 여기에는 당시 8번째 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의 부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프로야구가 홀수개수 팀으로 운영될 것을 걱정한 KBO는 구단을 운영한 새로운 기업을 물색하던 도중 SK그룹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SK그룹은 팀 창단을 조건으로 서울 연고권을 요구하게 되고, KBO가 난색을 표하자 차선책으로 요구한 곳은 당시 현대 유니콘스가 사용하던 인천이었습니다. 프로야구가 홀수의 팀으로 운영될 것에 두려움을 표한 KBO는 현대 유니콘스에게 서울 연고권을 줄테니 우선 수원으로 이전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고, 현대는 이를 받아들이며 현대의 연고지는 인천에서 수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시즌 최강의 모습을 보여주는 00년 현대유니콘스 최원호←→심재학 맞트레이드를 강행 후 심재학을 타자로 전향시켜 야수진을 더욱 보강했습니다. 정명원은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중고신인 위재영은 39세이브를 달성하였습니다. 선발진 3명은 18승 트리오를 결성하게 되는데 그 멤버는 부진했던 김수경, 에이스 정민태, 트레이드로 온 임선동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막강중의 막강이였습니다. 이 해는 최초의 홀드제도가 시행된 해이기도 한데, 조웅천이 초대홀드왕을 등극하면서 허리를 튼튼하게 해주었습니다. 박경완이 4연타석홈런, 40홈런을 기록하면서 거포의 끼를 보여주고, 박재홍이 30-30클럽을 통틀어서 3번이나 가입을 함으로써 호타준족의 면모를 보였지만 일간에선 '기록 밀어주기'라는 시선을 보냈습니다. 김재박이 이끈 현대는 91승49패2무 승률6할9푼5리의 막강전적을 보여주며 정규시즌1위 팀타율 0.278 팀방어율 3.64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직행 00년도 KS우승을 일궈냈습니다.

 
연고지 이전
2000년 1월, 현대그룹에서 추진하여 기존의 연고지였던 인천광역시·경기도·강원도 지역에서 서울특별시로 이전하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당시 KBO와 문화관광부는 국내 4대 기업 중 하나인 SK그룹을 끌어들여 재정난위기 겪던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하게끔 언질을 하였고, SK그룹은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하는게 아닌 해체를 시켜 쌍방울 선수단들을 웨이버 공시하고 계약하는 형식으로 신생 구단을 창단하고, 연고지를 서울특별시로 희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 유니콘스 구단을 운영하는 모체인 현대전자와 현대그룹에서 '프로야구에 참여할 당시 이미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KBO로부터 약속받았던 터였기에 SK 측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는데, KBO는 'SK 측은 차선책으로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였던 인천광역시·경기도·강원도 지역을 프랜차이즈로 창단하되, 현대 유니콘스는 홈 구장인 숭의야구장을 떠나 수원야구장을 임시로 사용하기로 상호 양해를 한다.'는 중재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현대그룹에서 주도한 연고지 이전 발표 선언은 그 당시 기존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 많은 질타를 받게 되었고, 많은 야구 팬들이 깊은 실망감에 빠지게 되면서 기존의 야구 팬들은 반발하여 대거 이탈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선수단 사이에서도 연고지 이전 반대를 강력하게 호소하였으나, 현대그룹에서는 이를 외면한 채 연고지 이전을 추진하였습니다. 연고지 이전 사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숭의야구장의 열악한 시설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1997년 숭의야구장을 현대 유니콘스 구단의 자비를 들여 대대적으로 보수하고자 대폭적인 투자를 하였으나, 숭의야구장이 '무허가 건물'이라 인천광역시에서 보수 허가를 못내줬다고 합니다. 실제로 숭의야구장은 과거 일제 시대 때 지은 건물로 공설이었으나, 주인도 없고 사용료도 없고 관리도 구단에서 알아서 하는 무허가 구장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또, 매년 평균 관중이 해마다 갈수록 떨어져 갔다는 점도 한 몫을 했습니다. 매년 선수층이 강화되어 강팀으로 변모하고 있었을 무렵에 당시 숭의야구장에 평균 관중수는 매년 급격히 줄어들어가고 있었던것도 한 가지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2000년 정규 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
현대 유니콘스는 최고의 한 해를 보낸 동시에 가장 어렵고, 격동의 한 해를 보냈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매직리그와 드림리그로 양대 리그 체제로 가게 되었고, 기존의 홈 구장이었던 숭의야구장을 떠나 수원야구장에서 경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즌 시작 전, 현대 유니콘스는 LG 트윈스의 심재학<->최원호와 맞트레이드로 영입하여 당시 투수로 전환했던 심재학을 타자로 복귀하게 하였습니다.

 
시즌 초반부터 승승 장구를 하였습니다. 개막 후 5연승을 질주하더니 25경기 만에 20승, 40경기 만에 30승을 거두며 일찌감치 독주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5월 19일에는 대전에서 포수 박경완이 4연타석 홈런을 기록하고, 7월 13일에는 박종호가 59경기 연속출루기록하는등 투-타 밸런스가 완벽했던 한해였습니다. 선발투수진에서는 정민태-김수경-임선동을 주축으로한 선발투수들은 공동으로 18승을 기록하여 다승 공동 선두에 올랐으며, 불펜에서는 조웅천이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고, 부상으로 인해 선발에서 마무리 투수로 재기한 위재영은 39세이브를 기록하였습니다. 타선에서는 박재홍이 유일무이한 3할타율-30홈런-30도루-100타점-100득점을 달성하였고, 용병 선수 톰 퀸란은 3루수로 뛰어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선수층에서는 기존의 팀에서 거포 역할을 하였던 김경기가 시즌중 SK 와이번스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떠나기도 하였으나, 2000년 현대 유니콘스는 이해 0.695 승률을 기록, 정규시즌 91승 40패 2무라는 단일시즌 역대 최다 승팀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즌중 현대 유니콘스 구단은 가장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한 해이기도 하였습니다. 현대그룹에서 추진한 연고 이전으로 SK로부터 54억원을 받았으나, 연고 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현대그룹은 내부에서 정주영 회장 슬하 아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왕자의 난’으로 분열되었고, 서울 연고 비용으로 서울 연고 팀 LG와 두산에게 지급해야할 54억원을 모기업 현대전자가 '기업 부도난을 겪고 있다.'는 명분으로 현대 유니콘스가 이전하는 데 이용해야 할 운영 자금을 가로채 현대전자가 써버리는 일을 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어 내부 분열된 현대그룹과 모기업 현대전자로부터 지원이 대폭 축소되기 시작한 현대 유니콘스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게 되면서 임시 홈 구장인 수원야구장에 계속 있어야 하는 사태가 되어 버리고 이는 훗날, SK 와이번스 구단과 자주 마찰을 겪게 됩니다.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한 현대 유니콘스는 양대리그로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맞상대하게 되는데,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4전 전승하여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게 됩니다.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맞붙게 되었는데, 3차전까지만 해도 현대 유니콘스가 일방적으로 승리하여 3승 무패로 무난하게 우승할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4차전 잠실야구장에서 두산 베어스가 승리함으로써 반격이 시작되어 5·6차전에 두산이 승리하여 분위는 크게 전환되었습니다.

 
그러나, 7차전에서 톰 퀸란의 활약과 임선동의 활약에 힘입어 현대 유니콘스는 6-2로 승리,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으로써 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시리즈 MVP는 톰 퀸란이 수상받았습니다.


이해에 현대 유니콘스는 골든글러브, MVP, 올스타전등 각종 부문을 휩쓸었습니다.


2001년
현대 유니콘스는 경영난에 시달리기 시작하게 됩니다. 악화의 원인은 구단의 최대 주주였던 현대전자가 부도가 나면서부터였습니다. 2001년 현대그룹의 경영 부진으로 그룹계열사에서 빠져나가게 된 현대전자가 대주주로 투자했던 스포츠구단 지분을 매각하거나 투자를 단 한푼도 안 하게 됩니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은 이때부터 명목상 대주주뿐인 하이닉스로부터의 지원이 끊어지게 되어 경영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현대 유니콘스는 한때 구단매각설에 휩싸였으나 현대자동차를 비롯하여 범 현대가로부터 지원을 받아가면서 구단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현대 유니콘스에서는 에이스 정민태가 2000년 시즌이 끝난뒤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였고, 불펜투수로 활약한 조웅천은 SK 와이번스로 현금트레이드로 이적, 심재학은 선수협파동으로 두산 베어스의 심정수와 1:1 트레이드되고 정명원은 2000년 시즌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습니다.

 
2001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선발 임선동과 불펜 투수 신철인,권준헌등의 활약과 타선에서는 유격수 박진만과 포수 박경완이 활약했는데, 박진만은 유격수로 3할 타율에 22홈런을 기록하였고, 박경완은 포수 최초 20홈런-20도루를 기록하였습니다.

 
시즌 동안 삼성 라이온즈와 두산 베어스하고 더불어 치열한 선두권다툼을 하였는데, 치열한 선두권 다툼끝에 정규시즌 2위를 기록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1승 3패로 패함으로써 3위로 마치게 됩니다.

 
2002년
정규시즌은 임선동과 마무리에서 선발로 복귀한 위재영등 주전 선수들의 잦은 부상으로 선수층이 약화되었으나, 신인으로 입단한 조용준은 마무리 투수로 눈부신활약을 보였고, 타선에서는 심정수와 이숭용의 활약과 조직력과 짜임새를 갖춘 선수단은 정규시즌 3위의 성적을 올렸습니다. 특히, 심정수는 46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과 SK 와이번스의 용병타자 페르난데스와의 홈런경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한 현대 유니콘스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정규 시즌 4위였던 LG 트윈스를 상대로 2전 전패함으로써 4위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2003년
시즌 시작전에 2년간 일본 프로 야구에서 뛰었던 에이스 정민태가 현대유니콘스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시즌 끝난 뒤 1996년창단때부터 팀에 많은 활약을 했던 박재홍은 기아 타이거즈의 정성훈+10억에 트레이드됩니다. 주전포수 박경완은 FA선언으로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고, SK에서 방출된 김동수를 포수로 영입하였습니다. 여기에 2003년도부터 연고권문제등 논의로 인해 현대 유니콘스 구단은 1차 지명권이 상실되었습니다.

 
시즌 시작전까지만해도 야구 전문가들은 현대 유니콘스를 중위권 전력으로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에이스 정민태와 셰인 바워스의 활약과 거포 심정수와 노장 김동수,기아타이거즈에서 현대유니콘스로 입단한 정성훈의 활약등 힘입어 7월 중순 이후, 단 한차례도 선두의 자리를 내주지않고 정규시즌을 80승 51패로 마감하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하게 됩니다. 특히, 정민태는 2003년 정규시즌에 17승 2패를 기록하였는데 2000년때 기록이 이어진 21연승을 기록하였고, 심정수는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과 홈런경쟁을 벌이며 53홈런에 142타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셰인 바워스는 방어율 3.01로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또 현대는 신인왕에서 집안경쟁을 벌였습니다. 투타 신인인 이동학과 이택근은 2표차 접전 끝에 시즌 8승 3패 방어율 5.35를 기록한 이동학이 1위로 신인왕을 차지하였고, 이택근은 그 뒤를 이어 2위에 올랐습니다.

 
2003년 시즌 중이던 8월, 현대 유니콘스의 구단주였던 故정몽헌 회장이 투신 자살했습니다... 당시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과 코칭스탭, 프런트들은 야구단에 각별히 애정을 가졌던 구단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구단주 故정몽헌 회장이 자살한 이후 현대 유니콘스의 구단주 자리는 2007년 해체되기까지 공석으로 남게 됩니다. 구단주 故정몽헌 회장의 자살로 현대 유니콘스 구단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나, 선수단들은 프런트진의 지원과 열정속에 특유의 가족같은 분위기로 조직력을 갖추어 정규시즌 1위를 이루어 한국시리즈 직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SK 와이번스와 상대를 하게 되는데, 에이스 정민태는 1차전과 4차전, 7차전에서 3번 선발등판하여 3승을 거두어 4승 3패로 현대 유니콘스의 3번째 우승을 이끌어내고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받았습니다.


2004년
2003년시즌 끝난뒤, 에이스 정민태와 거포 심정수는 구단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습니다. 그리고, 2루수 박종호는 FA를 선언하여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즌 시작 전 한화 이글스 외야수 송지만을 상대로 불펜 투수 권준헌을 1:1 트레이드했습니다.

 
2004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에이스 정민태와 4번 거포 심정수가 시즌내내 심각한 부진을 겪게 되었지만, 신인 좌완 투수 오재영과 용병 타자 클리프 브룸바의 활약 등 힘입어 현대 유니콘스는 6월말까지 선두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가면서 유지하였으나, 6월과 7월되면서 삼성 라이온즈와 두산 베어스하고 선두권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3파전을 두게 됩니다. 각 팀들은 잡힐 듯 하다가 달아나고, 잘 앞서가다가도 어느 순간 덜미를 잡히길 반복했었습니다.

 
시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선두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는 양상으로 이어져가게 되었고, 현대 유니콘스는 삼성 라이온즈와 1위, 2위의 자리를 오가며 한국시리즈 직행을 놓고 선두권 경쟁을 하였습니다. 그러던중 2004년시즌 중에 '병역 파동'으로 휩쓸게 되면서 3루수 주전 정성훈이 남은경기에 결장하게 되었지만, 10월, 시즌 마지막 경기에 현대 유니콘스는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수원구장에서 7-3의 승리를 거두며 바짝 뒤를 쫓던 삼성을 제치고 2004년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지게 되었습니다.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승리한 삼성 라이온즈와 상대하게 되었는데, 사상 유례 없는 무승부 경기가 세 차례 나왔고, 이 때문에 역대 한국시리즈 사상 최다 경기인 9차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시리즈 혈전속에 9차전에서 8:7로 현대 유니콘스가 승리함으로써 현대 유니콘스는 2년 연속 우승과 4번째 우승을 하게 되었고, 한국시리즈 MVP로는 현대 유니콘스의 조용준 선수가 차지했습니다. 이 해가 현대의 마지막 우승이었습니다.

 
이시즌에 유격수 박진만과 용병 타자 클리프 브룸바가 골든 글러브를 수상받았고, 신인 오재영은 신인왕을 수상받았습니다.

 
2005년~2007년


2005년
2004년 시즌이 끝난 뒤, 주축 선수 박진만과 심정수가 FA를 선언하여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게 되고, 용병 타자 클리프 브룸바는 일본 프로 야구 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하게 되는데, 여기서 1996년 창단 때부터 활약해 왔던 유격수 박진만의 이적은 현대 유니콘스에 있어서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2004년의 마지막 우승 이후 해체될 때까지 전력은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시즌이 시작되면서 시즌 중반까지는 4~5위 사이 중위권을 유지해 왔으나 시즌 후반에 접어들면서 선수단 체력 저하와 함께 잦은 수비 실책 등으로 연패를 거듭하면서 하향세를 타게 되며 정규 시즌 7위를 기록하는 등 1996년 창단 이래로 최악의 성적을 맞게 됩니다.

 
투수진에서는 용병 선수 미키 캘러웨이와 황두성, 조용준의 활약이 돋보였으나 에이스 정민태는 재활과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2004년 신인왕 오재영은 혹독한 2년차 징크스를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오재영은 이듬해 시즌을 끝으로 상무에 입대했고, 넥센 히어로즈로 인계된 이후 복귀하였습니다. 타선에서는 거포 송지만과 래리 서튼의 활약이 돋보였으나 톱타자 전준호가 부진과 부상에 시달렸고, 유격수 박진만을 대신한 채종국은 부진과 함께 잦은 수비 실책을 보였습니다. 팀의 주장인 이숭용 역시 시즌 중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는 등 타선 득점력도 기복이 심했었습니다.

 
여기에 2005년에 '명목상 대주주'일 뿐이었던 하이닉스반도체는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 지분에 대해 현대그룹과 법정 공방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KBO에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의 매각을 요청, 현대 유니콘스 구단은 어려운 한해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2006년
어려운 시련을 겪었던 현대 유니콘스는 시즌 전, 야구 전문가들 사이에서 '꼴찌' 후보로 거론되곤 했었습니다. 정규 시즌이 시작되면서 처음부터 4연패를 겪는 등 총체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졸 신인투수 장원삼의 눈부신 활약과 용병 투수 미키 캘러웨이, 승률왕을 차지했던 전준호, 불펜 투수에 박준수, 신철인, 외야수 이택근의 활약과 노장 톱 타자 전준호, 이숭용, 포수 김동수의 투혼 등 선수단 내에 조직력과 짜임새를 바탕으로 치고 올라가게 되어 4월 말에는 파죽지세로 5연승, 9연승을 기록했습니다. 그로 인해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가게 되면서 시즌 전에 '꼴찌' 후보로 점찍었던 야구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시즌 중반 무렵이 접어들면서 잠시 주춤하게 되어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와 3파전 양상으로 선두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하게 됩니다. 치열한 선두권 경쟁끝에 정규시즌 2위를 기록하게 되어 플레이오프에 직행하게 됩니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KIA 타이거즈를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한화 이글스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는데, 1차전에서 크게 승리하였으나, 2·3차전에서 분패하였고 4차전에는 0:4로 패하게 되어 1승 3패로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 패하게 되어 최종 3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2006년 10월에 김재박 감독이 돌연 자신의 친정 팀이었던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이적하게 되면서 현대 유니콘스는 오랫동안 투수코치로 있던 김시진을 후임 감독으로 선임하게 됩니다.

 
2007년
그나마 지원하였던 현대가에서 지원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현대 유니콘스 구단은 운영에 어려움을 크게 느끼게 되면서 현대 유니콘스 고문 이사이자 현대해상 회장인 정몽윤이 KBO 회장에게 직접 찾아가 매각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2007년 1월 16일, "하이닉스의 경영 부진을 위해 농협중앙회에 야구단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1월 19일 농협 측은 농민 등 여론의 반발을 이유로 인수를 중단한다고 발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현대 구단은 지원한푼도 없이 KBO로부터 위탁 운영을 받게 되면서 시즌을 치러나가게 되었습니다. 시즌 개막 3연전부터 3연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4월에는 매우 심각한 부진에 빠지게 됩니다. 4월 말까지만해도 7연패를 겪는 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연패를 끊은 이후부터 5월과 6월에 치고 올라가 한때 4위권 내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시즌 중에 용병투수 미키 캘러웨이가 부상으로 이탈함으로써 선발 투수진이 붕괴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시즌내내 투-타 불균형 엇박자가 계속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선수단들은 동요하지도 포기하지않고, 프런트진의 지원과 열정속에 구단 특유의 가족같은 분위기를 형성하여 끝까지 분전하였습니다.

 
투수진에서는 장원삼, 황두성, 김수경이 선발에서 활약하였고, 불펜에서는 신예 투수 조용훈과 박준수가 활약하였습니다. 타선에서는 이택근과 송지만, 클리프 브룸바, 정성훈 등과 노장 선수인 김동수, 전준호, 이숭용이 활약하였습니다.

 
2007년 10월 5일 고별전이었던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며 2007년 정규시즌 6위를 기록했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이듬해 2008년 3월에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후 현대 야구단은 넥센 히어로즈로 재창단되어 명맥을 이었습니다.


매각과정과 해체
2005년 5월 -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KBO에 구단 매각 요청.
2006년 12월 - 모기업 현대&기아차 야구단 지원 중단 발표.
2007년 1월 15일 - 농협 현대 인수 여부 검토 언론 보도. 19일 - 농협 현대 인수 포기 통보.23일 - 미국 투자회사 KBO에 현대 인수 의사 전달 언론 보도.26일 - 미국 투자회사 현대 인수 포기 통보.
2월 27일 - KBO "현대 인수 타진 기업 3월초 최종 인수 여부 의사 전달할 것" 발표.
6월 1일 - KBO 신상우 총재 "농협, 현대 인수 재추진 가능성 있다" 발언.
9월 27일 - 신상우 총재 "빠르면 10월초 뻗어나가는 중견기업에 매각될 것" / 28일 - KBO "STX 현대 인수 실무 검토" 발표.
11월 21일 -KBO "STX 인수 제안 공식 철회" 발표.
12월 11일 - 신상우 총재 "크리스마스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것" 발표.27일 - KBO "KT, 현대 유니콘스 해체 후 재창단" 발표.28일 - LG·두산 "KBO와 KT 협상 내용 인정할 수 없다" 반발.30일 - KT "7개 구단 찬성 없을시 야구단 창단 없다" 발표.
2008년 1월 2일 - KBO, KT 창단 문제 논의 위한 이사회 소집 통보.8일 - KBO 이사회 'KT의 창단 전폭 환영 및 성의있는 조치 촉구' 결의문 발표.11일 - KT 이사회, 현대 인수 전면 백지화 선언.18일 - KBO, "3개 기업과 현대 매각 협상 중" 발표.30일 - KBO-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 현대 대신할 제8구단 창단 조인.
2월 -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 서울 연고지 보장을 대가로 창단에 KBO와 합의. 현대 유니콘스를 해체한 뒤 선수단과 프런트를 승계 발표. 센테니얼, '우리 담배'와 메인스폰서 체결, '우리 히어로즈'구단명으로 창단.
3월 10일 - 현대 유니콘스 해체.


역대 골든글러브 수상자
1996년 김경기, 박재홍 / 1998년 정민태, 박경완, 박재홍, 전준호 / 1999년 정민태 / 2000년 임선동, 박경완, 박종호, 박진만, 박재홍 / 2001년 박진만 / 2002년 심정수 / 2003년 심정수, 김동수, 정민태 / 2004년 브룸바, 박진만 / 2005년 서튼 / 2006년 이택근


역대 개인 기록 수상자


다승
1999년 정민태 20승7패 / 2000년 정민태 18승6패, 김수경 18승8패, 임선동 18승4패 / 2003년 정민태 17승2패


평균자책점

1998년 정명원 184 - 38 - 1.86 / 2003년 바워스 143 2/3 - 48 - 3.01


최다 탈삼진
1999년 김수경 184K / 2000년 임선동 174K


최다 세이브 1996년 정명원 26세이브


수위 타자
2000년 박종호 441타수 150안타 타율 0.340 / 2004년 브룸바 475타수 163안타 타율 0.343


최다 홈런
1996년 박재홍 30홈런 / 2000년 박경완 40홈런 / 2005년 서튼 35홈런


최다 타점
박재홍 108타점 (1996), 115타점 (2000) / 2005년 서튼 102타점


최다 도루 2004년 전준호 53도루 8실패


최고 장타율
2003년 심정수 0.720 / 2004년 브룸바 0.608 / 2005년 서튼 0.592


최고 출루율
2003년 심정수 0.478 / 2004년 브룸바 0.468


역대 신인왕
1996년 박재홍 / 1998년 김수경 / 2002년 조용준 / 2003년 이동학 / 2004년 오재영


역대 올스타전 MVP 2002년 박재홍


역대 페넌트레이스 MVP 2000년 박경완


역대 한국시리즈 MVP
1998, 2003년 정민태 / 2000년 톰 퀸란 / 2004년 조용준


이상 현대 유니콘스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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