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천둥 손뼉 루이지 리바 선수입니다~!
리바는 1944년 11월 7일, 스위스 국경 근처 롬바르디아 주 바레세 도의 작은 군인 레주노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모친 에디스는 주부였고, 그의 부친 우고는 여러 직종에 종사했는데, 처음에는 미용사를 하다가, 이후 재봉사, 그리고 공장 노동자가 되었는데, 루이지가 9세였던 1953년 2월 10일에 산재로 명을 달리했습니다. 에디스는 이후 가정부가 되었고, 루이지는 엄격한 종교 사립학교에 입학해 3년 동안 학업에 종사하다가 지게 노동자로 취직하고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루이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도 잃었습니다.
리바노는 롬바르디아 연고의 라베노 몸벨로 유소년부에서 아마추어 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1961년에 30골을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33골을 넣었습니다. 그는 18세가 되는 1962년에 세리에 C의 레냐노-이브레아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로 전향했고, 1년차에 22경기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습니다. 신예 리바는 당시 칼리아리 회장이었던 엔리코 로카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이듬해에 세리에 B의 사르데냐 연고 구단에 37M ITL의 거액에 이적하였는데, 당시 리바의 나이는 19세였습니다. 리바는 이후 은퇴하기 전까지 사르데냐 연고 구단에서만 활동했습니다. 그는 사르데냐 1년차에 26경기에서 8골을 기록해 칼리아리를 바레세 다음으로 높은 승점을 쌓으면서 창단 40년 만에 1부 리그로 처음 승격했습니다.
이듬해, 리바는 1964년 9월 13일에 1-2로 패한 로마와의 경기에서 세리에 A 신고식을 치렀고, 20세의 나이로 32번의 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하며 구단이 리그를 6위로 마감해 안정적으로 1부 리그를 잔류를 이룩하도록 도왔습니다. 칼리아리는 그 이후, 1965년부터 1968년까지의 시즌에 11위, 6위, 9위를 기록했고, 리바도 1966-67 시즌에 18골을 기록해 리그 득점왕에 등극했으며, 구단은 당시 거함 스트라이커를 중심으로 선수단을 구축해 리그에서의 경쟁력을 키워나갔습니다. 리바는 자신의 활약을 앞세워 몇몇 유명 선수들을 칼리아리로 불러 모았는데, 당시 그와 동행한 선수로는 엔리코 알베르토시, 로베르토 보닌세냐, 리초티 그레아티, 코무나르도 니콜라이, 마리오 마르티나돈나, 마리오 브루녜라, 피엘루이지 체라, 그리고 네네가 있었습니다. 리바는 이후 1968-69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와 리그에서 모두 준우승을 거두었는데, 리그를 우승한 피오렌티나와는 승점 4점 차이였고, 코파 이탈리아 우승은 로마에게 돌아갔습니다. 리바는 29번의 경기에서 20번 골망을 흔들어 생애 2번째 세리에 A 득점왕에 등극했습니다. 칼리아리는 이 시즌 21번째 경기를 치를 때까지 선두를 달렸지만, 유벤투스와의 안방 경기에서 패하면서 선두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1969년 여름에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안젤로 도멘기니와 세르조 고리 두 명의 쟁쟁한 공격수가 보닌세냐와 맞바뀌어 들어오면서, 리바는 1969-70 시즌에 칼리아리의 숙원이었던 세리에 A 우승을 이룩했습니다. 만리오 스코피뇨 감독의 공격적인 전술을 앞세운 구단은 리바가 최전방을 책임지며 승부처에서 꾸준히 득점을 올려 구단이 리그 정상에 오르도록 기여했습니다. 1970년 3월 15일, 칼리아리는 리그를 6경기 남겨놓고 리그 선두로 올라섰는데, 칼리아리는 2-2로 비긴 유벤투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2골 차로 밀리는 와중에 2골을 연달아 득점해 경기를 2-2 무승부로 마쳤습니다. 그의 2번째 골은 페널티킥으로 넣었는데, 그가 득점할 당시 경기 종료까지 8분이 남았었고, 이 경기에 따라 토리노 연고 구단이 세리에 A 순위 경쟁에서 치고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칼리아리는 3점 차이로 앞서나간 와중에 3경기를 남겨놓고 4월을 맞이했습니다. 방패를 거머쥐기 위해, 칼리아리는 바리와의 다음 안방 경기를 이겨야 했고, 2위를 달리던 유벤투스는 라치오와의 경기에서 자멸해야 했습니다. 4월 12일, 리바는 뛰어들며 머리로 골을 집어넣어 바리 암시코라 원정에서 귀중한 2-0 승리를 따냈고, 유벤투스는 로마 원정에서 라치오에 잔 피에로 기오와 조르조 키날리아에게 실점을 헌납해 0-2로 패했습니다. 그 결과, 칼리아리는 시즌 2경기를 남겨놓고 창단 이래 처음으로 세리에 A 정상에 올랐고, 이듬해 유러피언컵 진출권도 손에 넣었습니다. 또한 칼리아리는 로마 이남의 구단들 중에는 처음으로 리그를 우승한 구단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리바는 이 시즌을 21골로 마무리하며 1번 더 득점왕에 등극했습니다. 이 시기에 리바의 기술, 골결정력, 그리고 경기에서의 활약상은 물에 올라 세리에 B에서 세리에 A로 승격한 작은 지방 구단인 칼리아리를 정상에 올리는 동화를 쓰며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거론되었습니다. 그는 1966-67 시즌, 1968-69 시즌, 그리고 1969-70 시즌에 3번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고, 같은 이탈리아인 잔니 리베라에 이어 1969년 발롱도르에서 2위에, 게르트 뮐러와 보비 무어에 이어 1970년 발롱도르에서 3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리바의 해는 칼리아리의 우승 이후 상승세를 이어나갔습니다. 소속 구단은 개막 몇 주 동안 1970년 10월 29일에 산 시로 원정에서 인테르나치오날레에게 그의 2골에 힘입어 3-1로 이기는 등 인상적인 성적을 거듭 올리면서 리그에서 선두를 달렸고, 이 경기에서 잔니 브레라는 그의 인상적인 활약에 감명받아 그에게 "천둥 손뼉"이라는 현재까지 널리 쓰이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는 같은 해 유러피언컵 첫 경기도 치렀는데, 칼리아리는 생-테티엔과의 1차전 1라운드 안방 경기에서 3-0으로 이겼는데, 리바는 이 경기에서 2골을 집어넣어 2라운드 진출을 견인했습니다. 그는 2-1로 이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2라운드 1차전 경기에서 본인의 대회 3호 골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리바는 10월 말, 유럽 선수권 대회 예선전에서 중상을 당해 시즌을 일찍이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칼리아리는 그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유러피언컵 16강전에서 탈락했고, 리그도 7위로 마감하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리바는 부상으로 복귀한 후, 1971-72 시즌에 30번의 경기에 출전하여 21골을 넣었고, 시즌을 리그 득점 2위로 마치며 소속 구단의 4위에 일조해 이듬해 UEFA컵 진출로 인도했습니다. 스코피뇨 감독이 떠나면서, 칼리아리의 성적은 이어지는 2년 동안 리바가 1972-73 시즌 12골, 1973-74 시즌 15골의 꾸준한 득점 행진에도 불구하고 하락해 중위권을 맴돌았습니다. 리바는 세계구급 선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칼리아리는 1970년대 말에 들며 리그에서의 악전고투를 거듭했지만, 사르데냐 연고 구단에 충성심을 나타내며 북부 이탈리아를 비롯한 대형 구단의 제의를 뿌리쳤습니다. 리바는 몇 차례 언론에서 그가 몇 명의 선수와 맞바꾸어 거액의 기록적인 이적료에 토리노 연고 구단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칼리아리에서 구단과의 의리를 지켜 세리에 A 거함 유벤투스의 거액 제의를 거절하고 사르데냐의 수도에 남았습니다.
리바는 재능과 득점 솜씨를 계속해서 뽐냈지만, 몇 차례 큰 부상을 당했는데, 특히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던 도중에 부상을 당해 말년에 크게 활약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는 1971년까지 5년 동안 35번의 경기에 결장했고, 1974년부터 1976년까지는 24번의 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쳐, 자신과 선수단의 전체적인 득점률이 하락했습니다. 1974-75 시즌, 종아리 부상을 당하면서 그는 8경기에서 2골을 득점하는데 그쳤고, 1976년 2월 1일, 리바는 밀란과의 경기에서 구석 깃대 근처에서 그를 추적하던 밀란 수비수 알도 베트와 어깨 싸움을 하다가 오른쪽 허벅지의 내전근과 건인 파열되었습니다. 그는 이어지는 1년 반 동안 복귀 시도를 감행했지만, 결국 완쾌하지 못했고, 1978년에 33세의 나이로 축구화를 벗었는데, 그의 마지막 경기는 31세였던 1976년에 치렀습니다. 리바는 부상으로 1975-76 시즌에 단 15경기만을 소화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시즌에 8경기 동안 6골을 넣으며 불태웠지만, 칼리아리는 그의 부재로 리그 최하위에 떨어져 세리에 B로 강등되었습니다. 리바는 구단과 국가대표팀에서 도합 439번의 경기에 출전해 248골을 넣었고, 이 중 칼리아리에서 315경기에 나서서 164골을 기록했는데, 이 중 세리에 A에서 289경기에 출전해 207골을 기록했으며, 칼리아리에서의 13년 동안 모든 대회를 통틀어 397번의 경기에서 213골을 넣었습니다.
이탈리아 청소년 국가대표팀에서 몇 차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리바는 1965년 6월 27일, 1-2로 패한 헝가리와의 친선전에서 20세의 나이로 부상당한 에치오 파스쿠티와 8분 만에 교체되어 들어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그는 성인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한 최초의 칼리아리 선수였습니다. 그는 국가대표팀 초년에 고전했는데, 다음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경기인 1966년 3월 19일에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친선경기에서 득점 없이 무승부를 거두었고, 잔니 브레라 기자는 리바를 "절름발이", "무능한 선수"라고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는 이후 1966년 월드컵에 참가할 22인 명단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제외되었지만,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은 그와 마리오 베르티니도 국가대표팀에서 경험을 쌓은 추가 예비 선수로서 잉글랜드로 동행했습니다. 이탈리아는 대회 조별 리그를 넘지 못하고 탈락했습니다.
1967년 3월 27일, 1-1로 안방에서 비긴 포르투갈과의 3번째 국가대표팀 정강뼈와 종아리뼈가 동시에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면서, 리바는 7개월 후에야 국가대표팀 선발로 복귀했고, 5-0으로 이긴 1967년 11월 1일 키프로스와의 유로 1968 예선전 경기에서 국가대항전 골맛을 처음으로 보았고, 같은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완성했습니다. 리바는 페루초 발카레지호에 발탁되어 안방에서 열린 유로 1968의 우승 주역이 되었습니다. 다리 부상에서 회복한 그는 선발에 복귀해 로마에서 6월 10일에 2-0으로 이긴 유고슬라비아와의 결승전 재경기에서 12분에 선제골을 기록했습니다. 리바는 이 경기에서의 활약으로 대회의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69년 11월 22일, 리바는 나폴리 산 파올로 경기장에서 열린 동독과의 월드컵 예선전 안방 경기에서 뛰어들어 머리로 득점하며 3-0 승리를 견인했고, 그 결과 이탈리아는 1970년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지었습니다. 이 대회를 앞두고, 리바는 16번의 경기에서 19번의 득점을 기록하는 성과를 냈습니다. 멕시코에서 열린 1970년 월드컵은 리바에게 많은 기대가 걸린 대회였습니다. 그러나, 리바는 조별 리그에서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안젤로 도멘기니와 동시에 부진에 빠졌는데, 도멘기니는 6월 11일에 열린 이스라엘과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오프사이드 오심으로 득점이 취소되었습니다. 조별 리그에서 무득점으로 실망스러운 활약을 펼치며 언론의 비난의 집중포화를 받은 리바는 토너먼트전에서 월드컵 골맛을 보았습니다. 6월 14일, 이탈리아는 개최국 멕시코와의 8강 경기에서 2골을 잔니 리베라의 도움을 받아 넣었고, 밀란 플레이메이커와 위협적인 조합을 이룩해 토너먼트전에서 선전했습니다. 리바는 본인의 21번째 국가대표팀 경기인 서독과의 6월 17일 준결승전 경기에서 승부처에 본인의 22번째 국가대표팀 득점을 기록해 4-3 승리에 일조했는데, 이 경기는 훗날 "세기의 경기"로 회자되는 명승부였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1-4로 패하면서 대회를 준우승으로 마감했습니다.
리바는 이 대회에서 3골을 기록해 이탈리아 선수로는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습니다. 대회 후, 리바는 그 해 말에 열린 유로 1972 에선전에서 오른쪽 다리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는 2-1로 이긴 오스트리아와의 10월 31일 빈의 프라터슈타디온 원정 경기에서 76분에 오스트리아 수비수 노버트 호프와 세게 경합한 후 교체되어 나갔습니다.
1973년 3월 31일, 리바는 5-0으로 이긴 룩셈부르크와의 월드컵 에선전 안방 경기에서 4골을 넣었고,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단일 경기 4골을 넣은 6명밖에 되지 않는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6월 9일, 그는 로마에서 2-0으로 이긴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주세페 메아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대표팀 33호 골을 기록했습니다. 메아차는 경기 후 "리바는 키프로스와 튀르키예와의 경기에서 많은 득점을 올린 좋은 선수입니다. 그래도 제 골이 더 순도가 높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의견을 표력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리바는 이어 1973년 9월 29일에 열린 스웨덴과의 안방 친선경기에서 34호 국가대표팀 득점을 기록해 2-0 승리를 견인하고, 메아차의 기록을 넘어섰고, 같은 해 10월 20일에는 스위스와의 월드컵 예선전 안방 경기에서 본인의 35호이자 마지막 국가대표팀 득점을 기록했고, 결과는 2-0 승리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꾸준히 득점을 기록했지만, 부상으로 허덕이면서 서독에서 열린 1974년 월드컵에서 거듭 실망스러운 활약을 펼쳤고, 결국 폴란드와의 1차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는 명단에서 빠졌고, 이탈리아는 이 경기에서 1-2로 패하면서 조기에 탈락했습니다. 그는 1-1로 비긴 아르헨티나와의 6월 19일 2차전 경기에서 42번째이자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습니다. 리바는 42번의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35번 골망을 흔들어, 2023년 기준 현재로도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1경기당 평균 0.83골을 기록했습니다.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역대 최다 득점자를 오른 것 외에도, 리바는 17골로 월드컵 및 월드컵 예선전 통합 역대 최다 득점자이기도 하며, 14골로 이탈리아의 월드컵 예선전 역대 최다 득점자입니다. 또한, 리바는 실비오 피올라와 함께 13골로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많은 안방 경기 득점을 올린 선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으로 루이지 리바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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