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前 축구 선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Talon 2024. 7. 2. 12:20

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바티골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선수입니다~!

 

바티스투타 선수는 22살에 처음 축구를 시작했으며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피오렌티나에서 보냈으며, 세리에 A에서 318경기에 나와 184골을 넣어 세리에 A 역대 9번째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였습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77경기에 출장해 54골을 넣어 아르헨티나 대표팀 역대 2번째로 득점을 많이 한 선수이며, 2004년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 지명되었습니다.

뉴얼스 올드 보이스, 리버 플레이트와 보카 주니어스를 거쳐, 1991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함께 득점왕을 차지하며 세계의 명문 구단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바티가 택한 팀은 세리에 A의 피오렌티나.


이적 첫 시즌에는 초반부에는 적응기를 보였으나 후반기 시점부터 살아나기 시작하여 13골을 기록하며 순조롭게 리그에 적응했고, 이후 줄곧 절정의 골 결정력을 보였습니다. 피오렌티나 시절 특히 주목할 만한 기록은 세리에 A 11경기 연속골. 그러나 바티스투타가 남긴 훈훈한 미담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세리에 A는 이른바 7공주 시대였습니다. 일곱 팀이 한발만 삐끗해도 우승권에서 멀어지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고, 피오렌티나도 그중 한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피오렌티나는 재정 문제로 팀의 간판이었던 바티스투타 선수와 후이 코스타를 떠나보냈습니다.

바티스투타는 2000년 AS 로마로 이적해, 00-01 시즌을 치뤘습니다. 이 시즌 AS 로마는 피오렌티나와 벌인 경기에서 1:0으로 이겼는데, 결승골을 넣은 선수가 바로 바티스투타였습니다. 이 골을 넣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그라운드의 로맨티스트로 불렸습니다. 후에 포포투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른 리그에서 오퍼가 왔음에도 피오렌티나와 맞붙게 될 로마로 이적을 택한 이유를 밝혔는데 당시 오퍼가 왔던 맨유는 자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우승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로마라면 자신의 힘으로 우승을 시켜줄수 있기에 로마를 선택하였다고 밝혔습니다. 피오렌티나에서는 자신과 후이 코스타 만으로는 더 이상 무리라고 생각했었기에 떠났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사연을 뒤로하고 바티스투타 선수는 20골을 기록하며 AS 로마의 2000-01 시즌 리그 우승을 견인해 냈습니다.

그러나 우승컵을 든 그해 그는 이미 32세의 노장이었습니다. 노쇠화와 부상 문제로 인해 다음 시즌엔 6골밖에 기록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2002-03 시즌에 4골을 기록하던 시즌 중반 인테르로 이적, 2골을 추가하는데 그쳤습니다. 결국 2003년 유럽 생활을 정리하고 카타르의 알 아라비 클럽으로 이적했습니다. 이적한 첫해 18경기 25골을 기록해 카타르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다음 시즌 3경기만을 뛴 채 2005년 은퇴했습니다.

바티스투타 선수의 첫 월드컵은 1994 미국 월드컵이었습니다. 첫 경기인 그리스전에서 바티스투타 선수는 무려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월드컵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득점뿐만 아니라 투톱 파트너였던 클라우디오 카니자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후로도 조별리그에서 아르헨티나는 승승장구, 하지만 디에고 마라도나가 도핑 테스트에 걸려 퇴출되며 예상밖의 전력 손실과 팀 분위기 저하 등의 악재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16강전 상대는 게오르게 하지가 이끄는 루마니아. 바티스투타 선수는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절묘한 개인기로 페널티킥을 얻어내고 침착하게 성공시켰습니다. 그러나 경기는 난타전 끝에 루마니아의 3-2 승리로 종료. 그렇게 바티스투타 선수의 첫번째 월드컵도 마무리됐습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자메이카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골 감각을 과시했지만, 16강을 거치고 나서 8강이 문제였습니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를 만나게 된 것. 결국 네덜란드에게 패해 8강에서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통한의 슛이 하나 있었는데, 바티스투타 스타일로 원터치 슈팅을 날린 것이 그만 골 포스트에 맞고 만 것. 최종 개인 득점은 이탈리아의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동률인 5골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기록이긴 하지만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조별리그에서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여유롭게 이겼는데 네덜란드는 3·4위전에서 그 크로아티아에게 덜미를 잡혀버린 것입니다. 마치 가위바위보 같은 전적이 나왔습니다.

어지간한 공격수는 리그에서 좀처럼 기록하기 힘든 해트트릭을 월드컵 무대에서, 그것도 2개 대회 연속 기록하는 괴수였지만 그가 참여한 대표팀은 그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이 처음 열리는 땅에서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아 마지막 투혼을 다짐했지만, 아르헨티나 정부가 돈 없다고 배를 쨌습니다.

이는 우승 포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서 비행기표 값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경제적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바티스투타 선수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자비로 월드컵에 참가하며 일본에 입국했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가 속한 F조 편성이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 바로 죽음의 조였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맞수인 잉글랜드까지 포함된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

운이 없게도 경기를 치르는 일본 열도는 데이비드 베컴 광풍이 일며 베컴과 그의 동료들인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들은 거의 국빈 취급을 받았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르헨티나는 찬밥 취급을 받는 등 전반적으로 여건이 불리했습니다. 일본이 잉글랜드를 일방적으로 응원했으니 절반 정도는 잉글랜드의 홈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상황. 정작 잉글랜드는 이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실력이 별 볼일 없었는데, 아르헨티나와 스웨덴 모두가 이긴 나이지리아와 유일하게 비겼고, 스웨덴과도 비겨 아르헨티나 하나만 이렇게 이기고 16강에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당시 아르헨티나 스쿼드와 남미 예선 과정이 워낙에 좋았기에 수많은 팬들과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는 거의 100% 조별리그를 통과하리라 예상했고 심지어 프랑스를 제치고 우승 후보 1순위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벌어진 결과는 아르헨티나에 닥친 경제 상황처럼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습니다.

F조 첫번째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나이지리아와 0:0 팽팽한 싸움을 벌이다 결국 바티스투타 선수의 극적인 결승골로 어렵게 1승을 얻었습니다. 반면 잉글랜드와 스웨덴이 1:1로 비기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듯했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전에서 시뮬레이션에 의한 통한의 페널티킥을 내주며 통한의 패전을 겪었습니다. 이는 오언이 아르헨티나 수비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에게 꾀병을 부린 결과였습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르헨티나는 마지막 경기인 스웨덴전까지 끌려가던 중, 경기 막판 크레스포의 동점골로 마지막 희망을 이어갔지만 끝내 1:1로 비기며 1승 1무 1패에 그쳐 충격적인 조별리그 광탈의 수모를 당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라는 말처럼 경제난에 고통받는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월드컵 개최 기간 단 한달 동안이라도 희망을 선사하고자 했던 선수들은 결국 그라운드에 쓰러져 통곡했습니다. 후반전 발목 부상으로 교체된 바티스투타 선수 역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당시 많은 축구팬을 가슴 뭉클하게 했습니다. 결국 바티스투타 선수는 2002 한일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경력을 쓸쓸히 마무리하였습니다.

오직 자신의 개인기에만 의존하는 플레이만 고집하며 패스를 안 하기로 유명합니다. 이 때문에 그 자신도 골결정력이 뛰어난 클라우디오 로페스는 이러한 바티의 취향 때문에 어시스트만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이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게는 취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2002년 FIFA 월드컵에서는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러한 바티스투타 선수의 문제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우세한 경기를 펼치며 막판에 에르난 크레스포가 넣은 골로 무승부를 낼 때까지 시종일관 아르헨티나보다 우세한 경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호세 페케르만 감독은 바티스투타 선수를 2006년 FIFA 월드컵의 엔트리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상으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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