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축구 지도자 이회택

Talon 2024. 10. 11. 12:20

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아시아의 표범 이회택 선수입니다~!

 

https://youtu.be/MzYG6ScJJpE

이북에서 조부모와 함께 월남해서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중학교 1학년 시기에는 기계 체조를 했다고 하나, 유년기부터 공 차는 걸 좋아했던 이회택 선수는 기계 체조를 때려치우고 또래 애들과 김포에서 공을 차고 놀았다고 합니다.

중학교 3학년 시기에 축구부 비슷하던 걸 하던 고등학교 형들과 활동하다가 김포농고에 들어가고는 어느 정도 마음을 잡고 축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가출을 하는 등 집안과 갈등을 빚다 고2가 되고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했습니다. 부정 선수였던 이회택 선수는 그 약점을 노린 축구 명문인 동북고등학교의 스카우트를 받고 2학년에서 1학년으로 학년을 하나 내린 채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이회택 선수와 동북고는 전국대회가 열리면 반 정도는 우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세가 되던 해인 1965년 동북고 3학년 청소년 대표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1년만 뛴다는 조건으로 석탄공사에서 뛰게 되었습니다.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 북한이 월드컵 8강에 올랐기에 67년 2월 육해공군 3군 소속 선수를 대상으로 양지 축구단이 창설되게 되었습니다. 이회택 선수는 성균관대를 자퇴하면서 입영 대상자가 되었기에 양지의 감독을 맡게 된 최정민이 이회택 선수를 선택하며 연대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던 이회택 선수를 중앙정보부에서 끌고 가면서 양지 선수가 되게 되었습니다. 이회택 선수는 육군 공군 해병대 중에서 가장 복무 일수가 짧은 해병대를 선택하여 양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회택 선수는 양지 축구단에서 당시 딱히 기초군사훈련도 받지 않는 예외적인 존재였다고 합니다. 본인은 이미 이 시기부터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회고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살다 제대를 앞둔 이회택 선수는 계약금으로 300만 원을 받고 외환은행에 입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A매치 82경기에서 21골을 넣으며 활약했습니다. 본인의 술회대로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에 70년대 이후에는 대표팀에서의 비중도 한 살 차이 고등학교 후배 박이천에게 많이 넘어갔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지도자 생활 최대의 한이 90 월드컵 24강 본선에서 정보 부족이나 체육학자들의 오산 등으로 인해 모든 것을 펼쳐서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라고 한다면, 선수 생활 최대의 한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본선에 출전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여담으로 선수 시절에 독일 분데스리가의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의 SL 벤피카가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유럽 무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도 모르고 해서 굳이 이적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https://youtu.be/SkkTOmVd8hM

1972년 펠레의 산투스 FC와의 내한 경기에서도 71분 팀의 두 번째 골을 넣었으며 에우제비우의 SL 벤피카와의 경기에서도 페널티 킥으로 1:1 동점골을 넣었습니다.

1983년 모교인 한양대학교 축구부 감독이 되면서 감독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87년 포항제철 아톰즈 감독직을 맡음과 동시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1990년 FIFA 월드컵에 진출했지만 본선에서 황보관만이 득점하는 부진으로 3패를 당해 탈락한 후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이후 모교인 한양대학교의 체육부장을 하다가 1998년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을 맡았으며, 2003년 11월 29일 FA컵 결승전을 끝으로 전남의 감독직에서 사임했는데 1996년 대우 로얄즈 감독 물망에 올랐으나 2억여원의 연봉에다 3년 계약기간 보장 등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는 바람에 좌절됐습니다.

 

이후 전남 드래곤즈의 기술고문을 맡았고 2004년 5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있었으며, 2004년부터 대한축구협회의 부회장으로 재직했습니다.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김포시에 이회택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 중입니다. 이 축구교실을 거친 선수 중 한 명이 김원일입니다.

한편,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11번을 달았음에도 60년대 중반까지 한국여자농구의 금자탑을 세운 박신자와 국가대표 야구선수 유백만 두 선수의 등번호였던 14번으로 뒷날 변경했지만 국가대표에서 제외되는 등 불운이 겹치자 원래의 등번호 11번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상으로 이회택 감독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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