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야구코치 구대성

Talon 2017. 8. 8. 00:13

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대성불패 구대성 코치입니다~!


아마추어 시절

대전광역시 출신으로 어렸을때 주먹으로 고무공을 치고 노는 ‘찜푸’라는 놀이를 동네 형들 따라다니면서 ‘찜푸’한것을 시작으로 친형이 야구를 하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자신도 야구에 흥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대전신흥초등학교 3학년 때 캐치볼 같은 걸 가볍게 했는데 이때부터 야구에 재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듬해 대전신흥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정식 야구 선수가 되었습니다. 대전신흥초등학교, 충남중학교를 거쳐 1986년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대전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1987년 2학년 재학시절 제 42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1989년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시절 1년 선배인 정민태와 함께 국가대표팀에 뽑히면서 좌대성 우민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1학년 때인 1989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 참가, 일본전에 선발 등판하여 10회까지 던졌습니다. 비록 이 경기에서 2:3으로 졌으나, 그는 이 때부터 일본 킬러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아마추어 최고의 왼손 투수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빙그레 이글스 시절

한양대학교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1차 지명으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시절 혹사당한 어깨 상태로 프로에 입단하고 바로 부상을 당해 데뷔 첫 시즌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한화 이글스 시절

이듬해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등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데뷔 시즌이었던 1993년은 2승에 그쳤지만, 1994년에는 7승 8패, 2점대 평균자책 점을 기록하였습니다. 1996년 18승 3패 24세이브로 다승과 구원부문을 동시에 석권하면서 정규리그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전천후 투수로 활동했습니다. 그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139이닝을 소화했는데, 이로써 현재까지 KBO 리그에서 활동했던 투수중 단 세 명만이 이룩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석권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1999년까지 7시즌을 치르며 55승 50패 129세이브,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습니다. 1999년 창단 14년 만에 한화 이글스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총 5경기에 나와 1승 1패 3세이브를 거둬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듬해 2000년 하계 올림픽 게임에서 야구 국가대표팀이 동메달을 따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해 정규리그에선 6승 7패 21세이브, 2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한화 마운드를 이끌었습니다. 그 해 시즌이 끝나고 일본 퍼시픽 리그로 전격 진출했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2000년 시즌을 마치고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팀인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했습니다.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에는 초반에 부진하다가 2년차부터는 쏠쏠한 활약을 해서 방어율 2위를 찍기도 했지만, 그 당시 오릭스가 팀이 하위권 성적을 냈을때라 그다지 빛을 발하지는 못했습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에서 4년 동안 뛰며 통산 성적 24승 34패 10세이브, 3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습니다. 2004년 시즌 중 그의 소속 팀인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의 합병이 확정되었고 다음 시즌인 2005년부터 오릭스 버펄로스라는 이름으로 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퍼시픽리그 선수들과 퍼시픽리그 팬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의 모기업인 긴키 닛폰 철도가 재정악화로 야구단을 운영하기 힘들어지자 오릭스와의 합병의지가 강했고, 결국은 합병이 확정되었습니다.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최종전인 2004년 9월 27일 Yahoo! BB 스타디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전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이름으로 최후의 승리투수로 기록되었습니다.


미국 프로야구 시절

2004년 시즌 종료 후 일본에서 활동했던 팀은 긴테쓰와 합병으로 오릭스 버펄로스로 구단명이 바뀌었고, 구단에서 잔류요청을 하였지만, 메이저 리그 진출을 도모하기 위해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뉴욕 양키스 등 다수의 팀에서 관심을 보였으나 최종 입단 팀은 뉴욕 메츠였습니다. 2005년 4월 5일 신시내티전에서 첫 홀드를 기록했습니다. 2005년 시즌 주로 중간 계투 요원으로 활동하며, 총 33경기에 나와 승패없이 3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복귀

한화 이글스 복귀

뉴욕 메츠와의 계약이 끝나는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에이전트의 일처리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2005년 시즌 종료 후 원 소속 팀이었던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였습니다. 2006년 시즌 마무리 투수로 활동하면서 3승 4패 37세이브, 1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한화 이글스의 준우승에 공헌하였습니다. 2009년 4월 28일 청주 LG전에서 시즌 처음 등판하였습니다. 그 해 정민철과 송진우가 차례로 은퇴하였고 1년 후 그가 은퇴를 선언하였습니다. 그가 은퇴하게 되면서 장종훈의 35번, 정민철의 23번, 송진우의 21번 다음으로 한화 이글스의 4번째 영구 결번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본인이 영구 결번에는 욕심이 없다고 했고 후배들이 써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2010년 9월 3일 대전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1회초에 선발 등판하여 은퇴 경기를 치렀는데, 이 때 상대 타자 조동찬을 중견수 플라이로 처리하여 은퇴 경기를 치렀습니다. 당시 한화 선수들은 그의 은퇴 경기에 일제히 그의 현역 시절 별명인 대성불패가 새겨진 유니폼을 착용하고 출전하였습니다.



호주 프로야구 시절

한국에서 은퇴한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오스트레일리안 베이스볼 리그 시드니 블루삭스에 입단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 11월 6일 홈 구장인 시드니 블랙타운 베이스볼 스타디움에서 열린 캔버라 캘버리와의 리그 개막 경기에서 팀이 1-0으로 리드한 9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등판하여 상대팀인 닉 킵튼을 헛스윙 삼진으로 처리하면서 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안 베이스볼 리그 역사상 최초의 세이브로 이 기록으로 한-일-오스트레일리아 3개국에서 모두 세이브를 기록한 유일한 투수가 되었습니다.


2016년부터 시드니 블루삭스의 투수코치로 활동했습니다.


대전신흥초등학교

충남중학교

대전고등학교

한양대학교


국제 야구연맹회장배 야구대회 최우수선수상 - 1989

백호기 춘계/추계리그 최우수 투수상 및 체육훈장 기린상 - 1989

IBA대회 최우수선수 - 1990

아시아선수권대회 금메달 - 1990

춘계, 추계리그 최우수투수상 - 1991

스페인 대륙간배 국제 야구대회 최우수투수상, 승률상 - 1991

대통령배 야구대회 최우수투수상 - 1992

한국 프로 야구 정규 리그 최우수선수 - 1996

한국 프로 야구 평균자책점, 구원, 승률, 다승 1위 - 1996

한국 프로 야구 평균자책점 1위 - 2000


1999년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 2경기 1승 3.2이닝 13타자 13타수 2피안타 0사사구 8삼진 0자책, 평균자책 0.00

2000년 시드니 올림픽 : 3경기 1승 19.1이닝 75타자 65타수 11피안타 7사사구 23삼진 4자책, 평균자책 1.86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5경기 1승 8이닝 31타자 30타수 6피안타 1사사구 3삼진 1자책, 평균자책 1.13


고교 시절

고교 시절 연습경기에서 자신을 시험해보기 위하여 고의볼넷으로 만루를 채운 다음 나머지 세 타자들을 상대로 삼진을 잡았습니다.


일본 킬러

그가 일본 킬러로서의 면목을 드러낸 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 4위 결정전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선발 투수는 '괴물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였고, 그는 주전포수 박경완의 부상으로 당시 신인 포수였던 홍성흔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경기 며칠전 팔에 담이 걸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지만 김응용 감독의 지시로 제 컨디션을 찾도록 노력했고, 15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면서 9이닝 1실점 11삼진으로 일본 타선을 꽁꽁 틀어막으며 한국의 동메달 획득에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한편 2006년 제1회 WBC때도 구원 투수로 출전, 일본 킬러로서의 명성을 보여주는 피칭을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예선경기에서 배영수에게 30년 망언을 한 스즈키 이치로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지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후 1루주자 이치로를 승계받은 그는 그 이닝을 책임지고 다음 이닝까지 책임진 후에 박찬호에게 마운드를 물려주었습니다. 이때 낮게 제구되는 직구와, 좌타자 바깥쪽 우타자 몸쪽으로 제구되는 슬라이더가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공이 감추어졌다가 나오기 때문에 일본 타자들이 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고, 자연스레 일본 타자들이 치지를 못하면서 명실상부한 일본 킬러임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랜디 존슨과의 인연

2005년 5월 22일 프로 생활 17년 만에 처음으로 타자로 나섰습니다. 첫 타석은 3구 삼진을 당했고, 7회 무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2번째 타석에 들어섰는데, 당시 상대 투수는 사이영상 수상자이자 메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좌완 투수 랜디 존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상대로 펜스를 맞히는 2루타를 뽑아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뒤이어 나온 타자 호세 레예스가 보내기 번트를 시도하고 성공하자, 그는 순간 홈까지 쇄도하는 멋진 주루 플레이를 선보였고, 결국 그 경기에서 득점까지 올리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사실 비디오 판독상으로는 아웃이였으나 심판은 그의 혼이 담긴 슬라이딩을 세이프로 판정했습니다. 한편 마운드에서도 그는 1과 1/3이닝 동안 탈삼진 3개를 잡으면서 무실점으로 호투, 그는 그 경기에서 "오늘의 선수"로 뽑혔습니다. 하지만 그 때 어깨 부상을 당했고, 이와 함께 그의 메이저 리그 생활도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이상 구대성 코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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