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철인 최태원 코치님입니다~!
그의 아들은 휘문고등학교 야구부의 내야수인 최준서입니다.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서울미성초, 성남중을 거쳐 그는 성남고-경희대 체육대학 시절 내내 국가대표 2루수로 활동하며 연고 팀 OB 베어스의 1차 지명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OB 베어스는 건국대 출신의 내야수 추성건을 지명했고, 그는 당시 꼴찌 팀이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1순위로 밀렸습니다.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1993년 2차 1순위를 받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입단하였습니다. 신인 시절만 해도 롯데 자이언츠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2루수 송태일에 밀려서 주로 우익수로 활동했으나, 송태일이 이적 2년째인 1995년 슬럼프에 빠지자 그는 특유의 날카로운 타격을 앞세워 1995년 최다 안타상을 수상하며 주전 2루수를 차지했습니다.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는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6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대대적인 선수단 개편에 들어갔고, 그는 이 때부터 붙박이 2루수로 활약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그는 1995년 4월 16일 해태와의 시즌 2차전에 대타로 출장한 이후, 2002년까지 기록적인 1014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쌓아 갔고, 이것이 팀의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과 맞물리면서 1997년 12월 11일 2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그는 연속 출장 기록을 쌓아 가면서 '철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1997년 겨울부터 그는 시련을 맞이했습니다. 쌍방울이 IMF의 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재정난을 겪게 되었고, 모기업 쌍방울이 법정 관리를 신청하면서 김현욱, 조규제, 박경완, 박성기, 김실 등의 동료들이 현금 트레이드되어 다른 팀으로 이적하고, 팀의 4번 타자였던 외야수 심성보는 당뇨병으로 인한 체력 저하로 장타력을 상실하면서 그는 타선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타 구단 투수들은 그를 타깃으로 두고 빈볼, 고의 사구 작전을 펼쳤고 그는 힘겹게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이어갔습니다. 김원형, 오상민, 장재중 등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의 끝까지 함께하였습니다.
SK 와이번스 시절
우여곡절 끝에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은 해체 후 SK그룹에 인계되어 SK 와이번스라는 이름으로 새로 창단했고 인천으로 연고지를 옮겼습니다. 2000년 SK 와이번스의 초대 주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30대 초반에 접어든 그는 빈볼의 후유증으로 인해 2001년에는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고, 프로야구판 노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탓에 SK 프런트의 안 좋은 시선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2002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에서 트레이드된 2루수 정경배에 밀려 벤치 멤버로 전락하고, 끈질기게 이어오던 연속 경기 출장 기록도 당시 SK 와이번스 초대 감독이었던 강병철에 의해 2002년 9월 10일 두산전을 결장하면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 후 쌍방울 시절의 은사인 조범현의 감독 부임 이후 재기를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주전 자리를 탈환하지 못하고 33경기 출장에 그쳤습니다. 2003년 10월 5일 삼성 라이온즈과의 준 플레이오프 2차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은퇴 후 SK 와이번스 주루코치로 코치 생활을 시작했고 팀의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후 조범현이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새로 선임되자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습니다.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 이후 2009년에 팀의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2011년 KIA 타이거즈가 준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에 1승 3패로 패하여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면서 조범현이 경질되었고, 조범현 사단의 해체와 동시에 선동열이 새로 감독에 부임하자 옛 쌍방울 선배였던 김기태가 감독으로 선임되어 부름을 받아 LG 트윈스로 이적했습니다.
서울미성초등학교
서울 성남중학교
서울 성남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이상 최태원 코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