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이만수 감독입니다~!
KBO 리그의 간판 포수였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적인 포수 프랜차이즈입니다. 종교는 개신교이죠.
삼성 라이온즈 시절
대구중앙초등학교, 대구중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1982년 당시 KBO 리그 원년 멤버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982년 동대문에서 열렸던 MBC 청룡과의 개막 경기에서 프로 야구 1호 안타와 1호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1984년에는 타격, 홈런, 타점에서 1위를 차지하여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KBO 리그 통산 1호 100호 홈런과 200호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이 기록은 훗날 박경완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프로 통산 포수 홈런 1위를 기록하였습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포수 부문에서 5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삼성 라이온즈 구단과 코치 연수 지원 문제에서 의견 다툼이 있어, 결국 1997 시즌 후 방출되어 은퇴하였고 자비로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야 했습니다. 아울러, 1994년부터 포수 대신 1루수 겸 지명타자로 뛰었으며 그 이후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1999년 7월 31일 트레이드 마감일에 진갑용을 두산 베어스에서 현금 트레이드 하기로 하였는데 진갑용을 영입하기 전까지는 뚜렷한 실력을 갖춘 포수가 없어 삼성 라이온즈는 포수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지도자 경력
은퇴한 뒤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싱글 A 팀인 킨스턴 인디언스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습니다.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트리플 A 팀인 샬롯 나이츠로 옮기고 나서, 2000년 1월부터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 포수로 활약했습니다.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 후 귀국했습니다. 2006년 11월부터 김성근 감독 밑에서 SK 와이번스의 수석 코치를 맡았습니다. 2010년 6월 계형철 2군 감독과 보직을 맞바꾸었다가, 2010년 8월 다시 맞바꾸었습니다. 2011년 8월 18일 당시 김성근 감독의 전격 경질로 인해 SK 와이번스의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SK 와이번스가 2011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KBO 리그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감독 대행이 되었습니다. 2011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10월 29일 제4대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습니다. 2012년에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으나 2013년, 2014년에는 팀의 성적이 부진하면서 그에 대한 책임으로 2014 시즌 후 SK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감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SK 와이번스는 그의 후임으로 김용희를 제 5대 감독으로 선임하였습니다. SK를 떠난 이후에는 주로 라오스 야구의 보급에 힘쓰고 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관계
이만수 감독은 명실상부한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그의 등번호 22번은 삼성 라이온즈의 영구 결번이기도 합니다. 2003년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는 선동열 수석코치, 한대화 타격코치를 영입하면서 그를 배터리 코치로 교섭하였으나, 도중에 이를 없었던 일로 영입 제의를 철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코치 제안을 거절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2006년 KBO 리그로 돌아왔으나 친정 팀이 아닌 SK 와이번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대구중앙초등학교
대구중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체육학과 78학번
이상 이만수 감독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