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애니콜 임창용 선수입니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해태 타이거즈 시절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5년 지역 우선 드래프트로 입단해 첫 해를 대부분 2군에서 보냈습니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2군 감독이였던 김성근의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입단 2년차부터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에 그와 김정수가 마치 MLB 뉴욕 양키스의 마리아노 리베라, 존 웨틀랜드처럼 불펜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정규 시즌 1위, 팀의 8번째 우승에 공헌했습니다. 1997년 풀 타임 마무리로 데뷔한 그는 14승 8패, 26세이브를 기록하며 KIA 타이거즈로 팀 명칭이 바뀌기 전 마지막 우승에 공헌했습니다. 이 해 불펜과 마무리를 오가며 135이닝을 소화했는데 이는 1993년 선동열의 125이닝보다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창용 불패'의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1998년에는 시즌 최다인 34세이브를 기록하며 역대 최연소 구원왕에 올랐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0년대 내내 강타선에 비해 약한 투수력으로 번번히 우승을 놓쳤던 삼성 라이온즈는 투수진 보강을 위해 팀의 간판 타자 양준혁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걸 정도로 2년간 막 신예로 떠오른 그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거기에 IMF 이후 해태 타이거즈가 운영난에 시달린 것과 맞물려 1998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는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에 현금 20억원을 더한 조건으로 해태 타이거즈와 3:1 현금 트레이드에 합의했습니다. 이는 KBO 리그 사상 최대 규모의 트레이드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양준혁이 트레이드를 거부했다가 당시 감독이었던 김응용의 만류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1999년 ~ 2004년
이적 후 첫 시즌인 1999년에 마무리로 등판하며 38세이브,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해 두 부문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했습니다. 2000년까지 마무리로 활약한 그는 진필중과 함께 한국 최고의 마무리 투수 양대 산맥으로 꼽힐 정도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2001년부터 그는 선발로 보직을 변경했습니다. 2001 시즌 14승, 2002 시즌 17승, 2003 시즌 13승으로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쌓으며 김진웅, 배영수와 함께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2002 시즌에는 팀의 정규 시즌 및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국가대표로도 많은 활약을 펼쳤는데,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등 세 개의 국제 대회에 출전해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2003 시즌 후 선동열이 수석 코치 겸 투수 코치로 새롭게 부임하며 그는 다시 마무리로 이동했습니다. 그는 그 해 정규 시즌 36세이브,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여전히 최강 마무리임을 확인시켰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반 구위가 떨어지며 2004년 포스트시즌에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2004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진출을 모색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2002년 활약상의 비디오테이프를 전달했으나 계약을 맺지 못했고, 그의 높은 몸값에 대한 부담과 그 해 포스트 시즌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점 등이 빌미가 돼 KBO 타 구단에서 그의 영입을 조심스러워 했습니다. 결국 잔류했으며 심정수, 정민태에 이어 리그 전체에서 고액 연봉 3위인 2년간 18억원에 계약했습니다.
2005년 ~ 2007년
그는 2005년에 다시 선발 투수로 보직을 옮겼지만, 2004 시즌 말부터 계속된 제구력 및 구위의 난조로 5승 8패, 3홀드, 6점대 평균자책점이라는 프로 생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혹사의 후유증이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습니다. 2005 시즌 도중 팔꿈치 부상을 당한 그는 결국 토미 존 수술을 받았습니다.
2006년 시즌에는 재활에만 전념했으며, 그 해 시즌 최종전 때 1군에서 등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2006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연장 12회에 구원 등판해 김태균을 상대로 148km/h의 강속구를 던지며 삼진을 잡아 부활을 알렸습니다. 2007 시즌 배영수가 토미 존 수술을 받아 재활군에 머무르자 구단과 팬은 선발 투수였던 그에게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기량은 회복되지 않았고, 5승 7패, 3홀드, 4점대 평균자책점의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2005 시즌과 거의 동일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2007년에도 실망스런 성적을 내며 뭔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환경과 동기 부여를 찾았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진출을 다시 시도했습니다. 2004년 시즌 후 소속 팀 삼성 라이온즈와 맺었던 2년 FA 계약 기간이 끝나는 시점인데다 삼성 라이온즈는 그가 해외 진출을 원할 경우 조건 없이 풀어 주기로 미리 합의했기에 일본 진출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2007년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가 끝나자마자 그는 일본 진출을 하고 싶다고 구단 측에 알렸고, 흔쾌히 동의를 받았습니다. 2005년부터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을 뿐더러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단 새로운 리그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더 중요했기에“인생의 황금기는 한 번이 아니라고 들었다. 정체된 나를 깨우고 싶었다.”라며, 몸값이 낮더라도 상관없이 어떻게든 일본에 진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일본 프로 야구 팀 중 센트럴 리그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그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습니다. 2007 시즌 후 야쿠르트는 에이스 투수 2명, 용병 세스 그레이싱어와 재계약에 실패하고, 좌완 이시이 가즈히사가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해 투수진이 크게 약화됐기에 투수 영입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야쿠르트와 2년 간 연봉 1,500만엔의 조건으로 계약에 합의하며 일본에 진출했습니다.
그는 팀의 간판 마무리로 2008년 첫 시즌부터 뛰어난 활약을 했습니다. 2008년 요미우리와의 개막 첫 경기 때 구원 등판했고, 마무리 이가라시 료타의 부상으로 그 다음 날 마무리로 등판해 일본 진출 후 첫 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이 날 첫 삼진을 잡은 선수는 이승엽이었습니다. 인상적인 피칭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팀의 주전 마무리로 2009년에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도가 생긴 후 처음으로 팀이 진출한 것에 일조했습니다. 그의 속구는 마치 뱀처럼 빠르고 꾸불꾸불하게 지나가는 것 같다고 하여 '뱀직구'라 불렸으며, 최고 구속은 일본에서 세 번째로 빠른 160km/h였습니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 선수 중 최초로 올스타전 팬 투표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올스타전에 출전했습니다. 이렇듯 일본 진출 2년 만에 스스로 퀼리티를 높여 실력을 인정받고 첫 해 기본 연봉 30만 달러, 2010년 50만 달러에서 2010년에는 200% 증가한 기본 연봉 160만 달러에 재계약했습니다. 그러나 2012년 시즌 중 발생한 팔꿈치 부상으로 재활에 전념했고 그 해 11월 15일에 방출됐습니다. 이후 팔꿈치 수술을 받은 그는 미국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미국 프로야구 시절
시카고 컵스 시절
2012년 12월 14일에 입단했습니다. 이로써 역대 3번째 KBO, NPB, MLB 순으로 활약한 선수가 됐습니다. 이후 팔꿈치 수술을 받고 재활 후 루키 리그부터 시작해서 트리플 A까지 올라와 마이너 21경기에 등판해 22.1이닝동안 13피안타, 4실점,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습니다. 확대 엔트리를 시행 후 2013년 9월 5일 셋업맨 마이클 보우덴을 방출 대기 조치하고 그를 MLB로 승격시켰습니다. 이로써 한국인으로는 14번째 메이저 리거가 됐습니다. 2013년 9월 7일 밀워키전에서 ⅔이닝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을 기록했습니다. 최고 구속은 93마일이었고, 1피안타는 야쿠르트에서 함께했던 외야수 아오키 노리치카에게 허용했습니다.
2005년 구대성이 세운 한국인 최고령 MLB 데뷔 기록을 경신했으며, 시카고 컵스 에서 데뷔한 선수들 중 조 베리에 이어 2번째로 고령이었습니다.
2013년 12월 3일 논텐더 방출됐습니다.
이후에도 시카고 컵스에 초청 선수 자격으로 재합류한 뒤 시범경기에 등판해 MLB 재진입을 노렸지만 마이너로 강등당하자 결국 구단에 방출을 요청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복귀
삼성 라이온즈 복귀
복귀 후 2014년 4월 13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해 2408일만에 구원 승을 달성했으며,[23] 5월 4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한일 통산 300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받은 격려금 2,000만원을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에게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시즌이 갈수록 체력적인 문제와 함께 구위가 저하됐고 예전과 다르게 블론 세이브도 많아졌습니다.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은 그를 마무리로 계속 기용했고 2015년에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듯 마무리로 활약해 역대 최고령 구원왕에 등극했습니다. 2015년 3월 31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통산 세 자릿수 승리 및 200세이브를 달성했으며 이 기록은 김용수 이후 역대 2번째, 세이브 부문에선 역대 4번째였습니다. 2015년 8월 16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한일 통산 350세이브를 달성했습니다.
KIA 타이거즈 복귀
도박 사건 후 그의 요청과 절실한 반성에 힘입어 2016년 3월 28일 친정 팀에 복귀하며 연봉 3억원에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는 사죄의 뜻으로 연봉을 전액 기부했습니다. 2018년 10월 24일 재계약을 포기하고 방출됐습니다.
2015년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 경기를 앞두고 있었던 10월 15일에 삼성 라이온즈의 스타급 플레이어로 평가받는 간판 투수 3명이 마카오에서 도박 게임을 즐겼다는 심증 뿐인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됐습니다. 며칠이 지나 서야 이 선수들은 그와 윤성환, 안지만이라는 것이 밝혀져, 2015년 삼성 라이온즈와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이 세 선수는 모두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팀은 두산 베어스에게 1승 4패로 패배해 통합 5연패가 좌절됐습니다. 또한 프리미어 12 국가대표로 선발됐었던 그들은 모두 국가대표 엔트리에서 제외됐습니다. 이들을 대신해 엔트리에 들어간 장원준, 심창민, 임창민은 공교롭게도 프리미어 12 초대 우승의 영광을 누리게 됐습니다. 그는 2015년 11월 25일 검찰 소환 조사 때 도박 혐의를 시인했고 2015년 11월 30일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됐습니다. 그 후 KBO는 1월 8일 그가 복귀할 시 72경기 출장 정지 중징계를 내렸고, 검찰은 조사로 4,000만원대 도박으로 밝히고, 오승환과 같이 200만원의 벌금형에 처했습니다.
2017년 WBC 국가 대표로 출전 예정이었던 그는 일본 오키나와 전지 훈련 도중 무면허 접촉 사고를 일으켜 벌금을 지불한 것이 확인됐습니다. 이어 면허 갱신 기간이 지난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설명했습니다.
2017년 9월 12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불펜들이 대기하는 장소에 있던 그가 경기 도중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습이 발견되며 논란을 일으켰으나 엄중 경고에만 그쳤습니다.
예전에 '위기 상황 때마다 부르면 항상 나온다'는 뜻으로 삼성의 휴대폰 브랜드인 '애니콜'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일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소속일 때 팬들로부터 '야쿠르트 수호신', '미스터 제로', '이무타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름의 '용'자를 영어로 하여 '창드래곤' 또는 줄여서 '창드'라고 불리며, 도박 사건으로 인해 '칩창용'이라고도 불립니다.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게임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2009년 WBC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2017년 WBC
광주대성초등학교
화순중학교 → 광주진흥중학교
광주진흥고등학교
KBO
첫 등판 : 1995년 6월 18일, 대 삼성 라이온즈 전
최연소 구원왕 : 1998년 22세, 34세이브 기록
평균 자책점 1위 : 1999년 마무리로서 규정 이닝을 채우며 평균 자책점 1위 등극
최연소 100세이브 : 2000년 4월 14일, 대 해태 전
3년 연속 30세이브 달성 : 역대 첫 번째로 1998~2000
선발로 전향 : 2001년~2003
최연소 150세이브 : 2004년 6월 27일, 대 롯데 전
프로 통산 2번째로 100승 150세이브 : 통산 100승-100세이브는 그와 선동열, 김용수, 송진우만 달성 / 13번째 투수 부문 534경기 출장
한일 통산 300세이브 : 2014년 5월 4일, 대 NC 전
프로 통산 2번째 100승 200세이브, 역대 4번째 200세이브 : 2015년 3월 31일, 대 kt 위즈 전
NPB
첫 등판 : 2008년 3월 2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 8회초에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 상동, 8회초에 이승엽으로부터 / 첫 세이브 : 2008년 3월 2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 / 첫 승리 : 2008년 5월 23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2차전, 10회말에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 첫 홀드 : 2008년 7월 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7차전
데뷔 첫 해 30세이브 달성 : 2008년 9월 4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9회 2사 등판 무실점, 1990년 요다 쓰요시, 2000년 에디 게일러드 이후 역대 세 번째
한일 통산 200세이브 달성 : 2008년 10월 8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9회 등판, 1이닝 무실점
일본 역대 3위 최고 구속 기록 : 2009년 5월 15일, 대 한신 타이거스의 아라이 다카히로를 상대로 160km, 직구를 던짐, 마크 크룬, 사토 요시노리 이어 일본 3위, 일본 내 아시아 선수로는 2번째 스피드에 해당됩니다.
0.00 미스터 제로 행진 : 2009년 7월 12일,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9회 등판, 우익수 희생 플라이로 실점, 이로써 33경기, 33.2이닝 동안 시즌 개막부터 이어온 무자책점 행진을 끝냈습니다.
한국 선수 최초로 팬투표 1위 올스타 선정 : 2009년 7월 25일 센트럴 리그가 3-5로 뒤진 8회 등판, 1회 무실점, 특히 2홈런을 때려 최고 타격감을 보이고 있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마쓰나카 노부히코를 상대로 95km 초저속 커브를 던짐
클라이맥스 시리즈 첫 세이브 : 2009년 10월 17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제1 스테이지 1차전에서 3-2로 앞선 8회 2사 1,2루에 등판, 1⅓이닝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
한일 통산 231세이브 달성 : 2010년 3월 30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9회 등판, 1이닝 무실점
3년 연속 20세이브 기록 : 2010년 7월 2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4-2 앞선 상황에서 8회 등판, 2이닝 4안타 1실점
2년 연속 올스타전 출전 : 2010년 7월 24일, 감독 추천으로 출전해 5-5 동점 상황인 9회 등판, 1이닝 무실점
한일 통산 250세이브 달성 : 2010년 8월 3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9회 등판, 1이닝 무실점
일본 통산 90세이브 달성 : 2010년 9월 11일, 대 한신 타이거스 9회 등판, 1이닝 무실점
일본 통산 100세이브 달성 : 2011년 5월 4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9회 등판, 1이닝 1실점
MLB
첫 등판 : 2013년 9월 7일, 대 밀워키 브루어스, 7회초에 구원 등판, ⅔이닝 1피안타 1볼넷 무실점
한국인 최고령 MLB 데뷔 기록 경신, 이전 기록은 2005년 4월 4일 뉴욕 메츠에 데뷔한 구대성으로 36세
1998년, 2004년, 2015년 최고 구원 투수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9년 최고 평균자책점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8년 제 13회 일구회 특별상
2009년 WBC 준우승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금메달
이상 임창용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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