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前 기계체조 선수 나디아 코마네치

Talon 2022. 8. 9. 13:20

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작은 바위 덩어리 나디아 코마네치 선수입니다~!

 

코마네치는 1961년 11월 12일 루마니아 오네슈티에서 금속 노동자인 아버지와 노동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섯 살 때까지는 평범한 소녀로 자랐지만 여섯 살 때 벨라 카롤리 코치의 눈에 띄어 ‘카롤리 체조 연구원’에 입문한 뒤 하루 4~5시간의 훈련과 음식 조절을 해가며 체조 요정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에 처음으로 전국 청소년 체조 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13위에 올랐으며 1970년에는 같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국제 경기에 참가했던 것은 1972년 뮌헨 올림픽 대회에 앞서 1971년에 열린 공산주의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 선수권대회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코마네치는 3개의 금메달을 땄으며 그 후 1973년, 1974년에는 전 부문에서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청소년이 아닌 일반 선수 자격으로 처음 참가한 1975년의 세계 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유럽 선수권을 5차례나 제패한 바 있는 소련의 류드밀라 투리셰바를 제치고 1위에 올랐습니다. 이어 1976년 뉴욕시에서 개최된 아메리카컵 대회에서도 우승했으며 여자 체조 선수로서는 최초로 2단 평행봉에서 2회전 뒤로 공중 돌기를 하면서 착지하는 고난도의 기술을 성공시켰습니다.

열네 살에 코마네치는 1976년 몬트리올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단 평행봉 연기로 사상 최초의 10점 만점을 받아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연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53cm, 39kg의 가냘픈 몸매의 코마네치는 그 후 그 대회에서 10점 만점을 여섯 차례나 더 기록하며 결국 금메달 셋, 은메달 하나, 동메달 하나을 획득했습니다. 코마네치는 이미 1975년 유럽선수권에서 체조 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아 세계무대에서의 만점을 예고했습니다. 올림픽 역사가들은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 체조에서 루마니아의 코마네치가 무려 일곱번이나 만점을 기록하면서 금메달 3개를 차지한 것을 매우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체조는 기록경기가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고 10점을 만점으로 해서 점수를 매기는 경기이기 때문에 9.9점이라면 몰라도 10점 만점을 주기가 어려운 종목입니다. 신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체조계의 불문율이었던 것이죠. 코마네치의 연기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즉 심판들이 앞으로 ‘이보다 더 뛰어난 플레이는 없다’는 뜻에서 만점을 준 것인 거죠. 여자 체조는 코마네치를 기점으로 여성미를 보여주는 눈요깃거리 스포츠에서 기술이 가미된 ‘예술’로 승화했습니다. 1976년의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이후 그녀는 당시 공산국가였던 루마니아의 국민적 영웅이 되어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코마네치는 뛰어난 체조 실력만큼이나 별명도 많았습니다. 체조경기장에서는 웃음 짓는 일이 거의 없어서 ‘작은 바위 덩어리’로 불렸고, 가로 10cm의 평균대를 훨훨 날고 이단평행봉에서 공중을 헤집듯이 절묘한 묘기를 연출할 때는 ‘냉정한 작은 벼룩’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당시 시사 잡지 《타임》은 그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습니다.

1976년 이후 코마네치는 당시 공산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에서 젊은이로 성장하면서 자유가 없는 사회에 대한 어려움과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점점 나이가 들고, 아는 것도 많아졌고, 마침내 삶도, 경기도 결코 공정하지 않으며, 복종은 선택이지 주어진 숙명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코마네치의 십대가 되고픈 욕망과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고픈 욕망은 서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1977년 그녀는 주로 앞으로 뭘 하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만 골몰했습니다. 체조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나간다고 느꼈고, 여느 십대처럼 혼란스러웠고 불안했으며, 자신의 삶의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습니다. 당시 루마니아 체조연맹은 벨라 카롤리 코치와 코마네치를 당분간 떼어놓은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훈련을 하면서 대학교 수업을 받기 위해 수도인 부쿠레슈티로 떠났습니다. 이후의 여섯 달을 코마네치는 훗날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사춘기인 데다 과식까지 해서 살이 10kg나 찌고, 부모님의 결혼 생활도 삐걱거리더니 결국 두 분이 이혼하기로 한 것입니다. 1978년 카롤리는 정부로부터 전국 청소년 체조대회 팀을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 데리고 나가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거기에 덧붙여 새로운 선수들과 함께 과거 팀원들도 반드시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카롤리는 코마네치를 다시 복귀시키기로 마음먹고, 그 해 그녀는 그와 함께 데바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위에 그치는 부진함을 보였고, 언론은 그녀가 끝장났으며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기죽지 않고 훈련을 계속해 불과 다섯달 뒤에, 시련을 극복하고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1979년에는 손의 감염으로 대부분의 시합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198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 경기대회에서는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개인종합 준우승을 하였습니다. 이로써 코마네치는 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 3개의 은메달, 1개의 동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코마네치의 연기는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과감하면서도 우아하여 인간 육체 표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상으로 나디아 코마네치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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