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정회열 선수입니다~!
1990년 해태 타이거즈에 1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습니다. 당시 해태에는 장채근이 주전으로 버티고 있어서 주로 백업으로 활약했으며, 가끔 우익수 대수비로도 나갔습니다. 과거에는 양용모 같이 대놓고 도루하면서 포수를 안 하는 게 나았을 선수도 있었지만, 이후 프로 1군에서 포수를 보는 선수 중에 기타 포지션으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포수 치고는 주력도 나쁘지 않고 나름 야구 센스가 뛰어났습니다. 1993년에 장채근의 뒤를 이어 주전 포수로 자리 잡는 듯했지만, 다음 해 시즌 막판 새끼손가락 부상을 당하면서 졸지에 시즌 아웃됐고 이로 인해 1995년에는 8경기 밖에 뛰지 못했으며 그 공백은 1994년 시즌 중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이적한 최해식이 지켰습니다. 1996년에는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되며 최해식의 백업으로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그 해 초 하와이 전지훈련 때 송유석, 이순철, 조계현, 이건열 등과 항명사건의 주범으로 찍혀 다음 해인 1997년에는 고작 1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1993년에는 .275를 기록하면서 규정 타석을 찍은 해태 타자 중 이종범에 이어 2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급기야 1996년 초 하와이 항명사건의 주범으로 낙인찍혀 1997년 시즌을 마치고 해태에서 방출된 후 이듬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삼성 구단은 김영진의 스트라이크 낫아웃 사건 때문에 그 대체 요원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서 포수를 영입하면서 포수 자원이 차고 넘쳤습니다. 때문에 삼성에서도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1999년에 은퇴했습니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를 거치면서 주로 배터리코치로 활동하였고, 특히 친정팀 KIA 타이거즈에서는 스카우트, 2군 감독, 수석코치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2019년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했었습니다.
광주중앙초등학교 - 광주충장중학교 - 광주제일고등학교 - 연세대학교
원래는 염경엽 LG 감독과 같은 또래이고, 같은 해 충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프로 입단은 염경엽보다 1년 빨랐습니다. 이는 염경엽이 중학생 시절 유급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도 정회열 선수는 연세대, 염경엽은 라이벌인 고려대를 다녔습니다.
2군 코치 시절 당시 경희대학교 야구부 투수 인스트럭터에게 KIA 입단을 제안했는데, 이 선수가 바로 최영필입니다. 차남 정해영이 광주일고에서 2017~2019년에 활약했습니다. 포지션은 투수, 3루수, 1루수였습니다. 동성중학교 시절 대통령기 전국중학야구대회 우승을 이끈 에이스 투수이자 중심타자로 활약했었습니다. 2018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3학년 에이스 조준혁과 함께 마운드를 지키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정해영 선수가 2020년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을 받으면서 부자가 한 팀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 KBO 리그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박명환야구TV에서 정수근이 밝힌 일화로, 9회말 2사에서 정회열 선수의 중견수 플라이성 타구를 정수근이 잡으면 쓰리아웃과 함께 1-0으로 경기를 이기고 마무리하는 것이었으나 일부러 펜스 뒤로 공을 넘겨버려서 끝내기 역전 투런 홈런으로 둔갑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데뷔 시즌에 자신의 고향팀에서 필승조로 활약하니, 기분 좋은 술안주거리가 생겼다고 합니다. 상무지구에서 고깃집 춘부집을 운영했습니다.
2021년 전설의 타이거즈에 송유석과 같이 출연하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당시 자기 집이 금남로쪽이어서 사건의 진행을 가까이서 볼수 있던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정회열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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