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5.
''국민 프로듀서'를 울리고 웃긴 연습생들의 '성장 서사'마저 거짓이었던가'
네 시즌을 치르며 승승장구했던 케이블 음악채널 엠넷의 '프로듀스' 시리즈에 대한 공분이 커지고 있다.
올해 '엑스원'을 탄생시킨 '프로듀스 X 101'(2019)의 조작 의혹으로 촉발된 '프듀 사태'는 지난해 '아이즈원'을 결성시킨 '프로듀스 48'로까지 여파가 번지고 있다.
여기에 팬덤이 공고했던 '워너원'과 '아이오아이'를 각각 탄생시킨 '프로듀스 101' 시즌 2(2017)와 시즌1(2016)에 대한 조작 정황을 경찰이 포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프듀' 시리즈를 연출해온 엠넷의 안준영 PD는 시즌 1·2 조작 관련 의혹은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정황이 포착됐다는 의심만으로 시청자와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연습생들이 느끼고 있는 좌절감이 크다. 경찰은 안 PD와 '프듀' 기획을 총괄한 김용범 총괄프로듀서(CP)를 14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훍수저들에게 희망? 알고보니 그들만의 리그!
사실 '프듀' 시리즈는 2016년 시즌 1의 방송 초반부터 여러 시비에 휩싸였다. 대형 기획사에 소속된 연습생은 초반부터 주목을 받는다는 '금수저' '서열화' 논란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개성을 중시하기보다는 똑같은 의상을 입고 같은 안무와 노래를 선보이는 등 단체 생활로 인해 군대식 문화를 연습생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주입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특히 연습생들의 인성을 평가하는 몰래카메라가 큰 논란거리였다. 연습생과 단 둘이 인터뷰를 하던 작가가 ENG 카메라를 망가뜨리는 상황을 연출, 연습생을 공포와 극한으로 몰아간 상황은 최소한의 품격에서도 벗어났다는 지적을 받았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면 의례적으로 따라 붙는 '공정성 논란' 역시 존재했다. 시청자의 투표로만 진출자, 탈락자를 가려내다 보니 대형 기획사 연습생 시절부터 이름이 났거나 이미 데뷔를 해 대중에게 눈도장을 받은 참가자들이 유리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여기에 출연 분량에 대한 시비도 이어졌다. 한 회마다 101명의 연습생들의 모습을 균등하게 보여주기는 당연히 힘들다. 그러나 특정 참가자의 출연 빈도가 빈번하고 그녀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부에서는 불만이 쌓였다. 특히 시즌 1에서 특정 연습생은 '엠넷의 딸'이라는 별명으로 통할 만큼 방송에 자주 노출됐다.
누군가는 인성 면에서 부박해 보이는 제작진의 '악마의 편집'의 희생양이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엠넷과 연습생들이 맺은 계약서가 연습생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됐다는 주장도 있었다. 일부 연습생이 소속된 기획사가 미등록 업체로 위법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해당 업체가 뒤늦게 등록하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1은 이 같은 논란에도 프로그램은 회차를 거듭할수록 승승장구 했다. 시청률이 높아진 것은 물론 화제성이 컸다. 무엇보다 '헬조선' 속으로 당당히 뛰어든 연습생들의 모습이 공감을 샀다. 주제곡 '픽미'에서 보듯 경쟁체제라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나 이들은 이미 '프로듀스 101' 합류 전부터 지난한 대한민국을 경험했다.
연습생만 10년 넘게 한 소녀, 이미 데뷔했으나 쓴 맛을 본 소녀. 프로그램 밖은 더 지옥이었다. 그런 소녀들에게 이런 프로그램은 어찌 됐든 또 하나의 기회였다. 영세한 기획사들에 속한 '흙수저'들에게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줬다.
하지만 현재 그렇게 보이도록 했거나 시청자가 그럴 것이라 상상하게 만들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됐다. 시청자 투표로 그룹 멤버가 결정됐다는 믿음 혹은 환상이 철저하게 깨지고 있다. 결국 모양만 바꾼 '그들만의 리그'에 농락을 당했다는 찜찜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디션 형식의 모든 프로그램은 성장 드라마다. 시청자는 '프로듀스 101' 속에서 성장하는 연습생에게 감정 이입을 했다.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이 성장하고 순위가 올라가는 것에 감동과 쾌감도 느꼈다.
특히 성장 초기에 노래, 춤 모두 엉망이던 특정 연습생은 미니시리즈 못지 않은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누군가의 기획이었다는 의심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프로듀스101' 시리즈는 일본 애니메이션 '러브 라이브'를 떠올리게도 했다. 게임과 실제 음반 발매 프로젝트와도 연관 이 에니메이션은 가상의 여고생 아이돌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룹 이름 결정, 개별 또는 유닛 활동의 결정에 팬 투표를 적극 반영한다. '프로듀스 101'처럼 유저 참여형 프로그램인 셈이다.
아이돌 그룹을 제작하는 중견 가요 기획사 관계자는 "이런 프로세스는 팀의 모든 멤버에 이야기를 부여하며 대중 각자에게 자신만의 센터를 만들게 한다"며 "심사위원들의 판단이 크게 작용하는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과 달리 대중이 '프로듀스 101'에 더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짚었다.
엠넷은 '프듀' 시리즈와 이전의 '슈퍼스타K' 시리즈에서 이런 공감대가 극에 달할 수 있는 '절박함'을 잘 뽑아냈다. 엠넷의 또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 '소년24'는 이런 절박함보다 동경의 감정을 이끌어내려고 한 탓에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절박한 드라마에 제작진이 개입한 것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는 만큼, 엠넷판 오디션의 유효기간이 다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는 공교롭게 '슈퍼스타K' 시리즈가 론칭한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엠넷은 '슈퍼스타K' 시리즈와 '프듀' 시리즈로 '오디션 제국'이 됐다.
◇아이돌 오디션, 태생부터 대형 방송사·가요 기획사 밀착 구조
사실 '프로듀스' 시스템은 태생부터 엠넷과 가요기획사가 밀착돼 있는 구조였다. 대형 기획사처럼 힘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나름의 생존 법칙을 터특한 중대형 기획사에게 엠넷은 자신들을 알리는 주요 플랫폼이다.
엠넷 입장에서는 이미 자체적인 시스템으로 신인을 톱으로 키울 수 있는 대형 기획사와 달리 중대형 기획사가 다루기 쉽다. 자신들이 신인을 키운다는 자부심과 이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더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프듀' 시리즈가 거듭할수록 특정 기획사의 연습생이 주목을 받는 빈도가 늘어나면서 엠넷과 특정 기획사가 유착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연습생들이 대거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주목 받는 연습생은 화면에 많이 노출되는 연습생일 수밖에 없다. 특정 시즌에서는 일부 연습생에게 '성장 서가'가 부여되는 듯한 편집 등이 자주 보였다.
일부에서는 여러 기획사를 레이블을 둔 가요계 큰손인 CJ ENM의 수직계열화 구조도 문제 삼을 분위기다. 음악 프로그램 기획, 가수와 음반 제작, 가수 매니지먼트, 콘서트 제작을 한번에 아우르는 셈이니 이들의 힘이 세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편에서는 이번 조작시비를 긍정적인 측면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불공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적극적 '소비자 운동'의 하나라는 것이다. 중견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언론과 함께 이들이 권력의 감시자로 승격되면서, 향후 프로그램의 공정성 확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엠넷은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자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엠넷은 14일 "이번 사태를 매우 엄중하게 받아들이며,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진정으로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회사 내부적으로 진정성 있는 사과 및 책임에 따른 합당한 조치, 피해보상, 재발방지 및 쇄신 대책 등을 마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발언은 다르게 받아들이면, 오디션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도로 들린다. 사실 음악채널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은 빼놓을 수 없는 알짜 프로그램이다.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을 매도할 수는 없다. 연습생 오디션과 결은 다르지만 경연이라는 점에서 엠넷 오디션과 같은 맥락에 놓인 '퀸덤'의 사례는 긍적적이다. 걸그룹 6팀이 경연한 이 프로그램은 그간 수동적으로 보여졌던 걸그룹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청순형 걸그룹으로만 치부된 '오마이걸', '러블리즈' 등이 다시 발견됐다.
K팝 신에서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설정하고 발전시켜나가는 보이그룹과 달리 걸그룹들은 몇 가지 특정 이미지를 강요 받아왔다. 하지만 '퀸덤'은 걸그룹이 주체성을 가지고 충분히 자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했다. 이들도 오랜기간 연습생 생활을 거쳤다.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연습생들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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