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前 야구선수 최해식

Talon 2023. 1. 20. 13:50

오늘 소개할 선수는 바로~

풀빵 최해식 선수입니다~!

 

고향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데뷔해 1990년대 중·후반 해태 타이거즈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습니다. 선수 시절 등번호는 22번. 동글동글 한 외모 때문에 풀빵이란 별명으로 통했습니다.

군산상고와 건국대를 졸업한 후 연고 팀인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멤버로 프로에 입문했지만 전종화, 김충민, 박경완에 밀려 별 다른 활약은 없었습니다. 1994년 장채근과 트레이드되어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고,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제대로 나오지 못하던 정회열을 제치고 해태의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차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트레이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지만, 최해식 선수는 본래 해태 입단을 희망했기에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굉장히 기뻐했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그전에 코치한테 폭행까지 당한지라 쌍방울에 대한 애정은 더더욱 없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김상진 등의 화려한 투수진과 호흡을 맞추었고, 타선에서는 이종범, 홍현우, 박재용 등과 함께 힘을 합쳐 1996년과 1997년 해태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1996 한국시리즈 우승 확정 당시 마스크를 쓰고 있던 포수는 정회열이었습니다. 우승을 확정지은 6차전에서 최해식 선수가 김호인 구심의 볼 판정에 헬멧까지 벗어던지며 거칠게 항의했다가 퇴장당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시리즈 사상 1호 퇴장이었습니다.

하와이에서의 일로 인해 감독에게 찍힌데다가 성적마저 하락세를 타던 정회열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면서 사실상 경쟁자가 없는 주전 포수로 자리 잡았는데, 문제는 그나마 그를 받쳐줘야 할 백업 포수인 김지영, 권오성의 실력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고, 2000년 1차 지명 신인 김성호와 1996년 2차 2순위인 황성기는 성장하지 못하고 쓸쓸히 잊혔습니다. 거기에 김상훈과 차일목은 각각 고려대, 홍익대로 진학하면서 1998~2000 시즌 동안 주전포수로 혹사를 당해야 했습니다. 당시 최해식 선수의 출장 경기 수는 1998년 114경기, 1999년 130경기, 2000년 101경기로 3년간 88.2%에 해당하는 경기에 출장하였습니다.

결국 최해식 선수는 3시즌 간의 혹사로 인한 부상과 피로누적으로 어깨가 완전히 박살 나면서 최고의 강점이던 수비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2001 시즌에 플레잉코치로 1시즌을 더 뛰고 은퇴했습니다. 최해식 선수의 은퇴 이후 타이거즈는 김상훈이 2001 시즌부터 주전 포수를 맡게 되었습니다.

통산 성적은 375안타, 17홈런, 165타점, 타율 0.217로, 타격이 매우 부진했던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의 성적을 보였습니다. 500경기 이상 출전선수 중 최저 타율 10위를 기록했을 정도.

그나마 타율이 가장 높았던 것이 97년의 2할 5푼일 정도로 방망이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를 할게 못되는 포수였지만, 그의 진가는 투수 리드와 블로킹, 프레이밍 등 수비에서 드러났습니다. 최해식 선수 이전의 해태 포수 장채근이 .328의 도루저지율을 보였을때, 노쇠화된 장채근의 후임으로 들어온 최해식 선수의 통산 도루저지율은 .340이었고, 특히 2루 송구 시간이 1.60초로 역대 포수 중 1위를 기록할 정도로, 공을 받자마자 미트에서 빼내 송구로 잇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특히 조인성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앉아 쏴의 원조가 바로 이 분. 하지만 선배들에게는 건방지게 보였던 듯. 이 때문인지 고2 때 세계청소년선수권 대회 엔트리에도 뽑히지 못했습니다. 이후 더이상 앉아 쏴를 하지 않았다고.

트래쉬 토크를 상당히 즐겨했던 선수로 상대 타자에게 트래쉬 토크를 하도 많이 해서 외국인 선수들도 최해식 선수의 트래쉬 토크에는 치를 떨었다고 합니다.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타이론 우즈에게 하도 트래시 토크를 해서 우즈가 욕설로 받아치다가 결국 홈 쇄도 플레이를 할 때 의도적으로 최해식 선수를 향해 돌진해서 튕겨나간 적도 있었다고.

플레잉코치이던 2001년부터 사실상 배터리코치였고, 이후 2003년까지 KIA 타이거즈 2군 배터리 코치로 재직했으나 감독이던 김성한과 구단의 관계가 악화될 무렵 재계약에 실패했습니다. 이후 화순고등학교 배터리코치로 옮겼으나 열악한 야구부 사정과 당시 감독의 강압적인 지도스타일로 구타, 똥군기를 혐오하던 본인과 맞지 않아 화순고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후 야구계를 떠나 사업가로 변신하여 광주광역시에 배달 전문 중국집 최고루를 차렸고, 직접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배달가방을 들고 뛰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이 개발한 볶음짬뽕이 빅히트를 치며 순식간에 사업 규모를 확장시켰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하며 가게 오픈 후 경쟁업체들의 견제가 심해 배달 오토바이를 여러 차례 도둑맞고 최고루의 빈그릇들이 깨져있거나 없어지는 등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공사장에 홍보 차 방문했더니 다른 중국집들은 새벽부터 와서 홍보하는데 늦은 아침에 왜 오냐는 말을 듣고 다음날부터 제일 먼저 공사장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가맹점 15개에 연 순이익으로만 약 10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매달 한 번씩 광주시내 보육원 등을 순회하며 아이들에게 짜장면 200~300그릇을 대접하는 등 봉사활동도 하고 있으며 이 덕분에 광주광역시에서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덧붙이자면 학창 시절부터 야구만 하며 살아온 선수 출신이 은퇴 후에 사업가로서 성공한 매우 드문 사례입니다. 1990년 프로 입문 동기이자 야구선수로서는 자신보다 훨씬 스타였지만 은퇴 후 사업에 실패하고 안 좋은 일에 휘말렸으며 이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이호성과는 크게 비교되곤 합니다. 최해식의 경우 이호성과 달리 남의 말에 꾀여 사업을 확장한다든가 하는 욕심 없이 기존에 경영하고 있던 중국집에만 우직하게 전념한 것이 빛을 보게 된 것.

사업가로서 성공한 후에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역 시절 시즌 15승을 했던, 30홈런을 쳤던 사회생활과는 무관하다."는 직설적인 말로 프로선수의 은퇴 후 삶이 녹록지 않음을 거듭 강조했었습니다. 실제로 최해식 역시 사업을 하던 당시에 사기를 당해 몇 번이나 가세가 기울기를 반복한 끝에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사회경험이 없기 때문에 배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

2014년까지 광주과학기술원에서 야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2018년부터 바쁜 관계로 야구 강의 강사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2010년대 초반 식당 경영을 하는 틈틈히 KIA 타이거즈의 홈경기를 중계했던 광주 지역 케이블 SO인 CMB에서 해설을 맡았습니다. 이후 2012~2013년도에 광주방송 MyFM에서도 KIA 타이거즈 편파중계방송 '말로 홈런' 해설을 맡았습니다. 한때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기아가 7위로 추락하자 냉정하게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하였습니다.

광주 MBC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전설의 타이거즈'에 까치 김정수와 함께 출연하여 입담을 뽐냈습니다. 영상 중 압권은 2002년 광주 MBC 노래열전에 출연하여 혜은이의 열정을 열창했던 장면입니다.

그의 아들인 최우재도 야구선수입니다. 개명전 이름은 최상인으로 186cm, 85kg의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는 우완 정통파 투수였으나 2018 시즌부터 외야수로 전향했습니다. 광주수창초, 진흥중, 진흥고 출신으로, 고졸로서 2016년 신인드래프트 대상에 포함되었는데 KIA에 지명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고. 다만 기록이 좋지 않아서 상위권 지명은 힘들 것으로 보였던 모양. 결국 2015년 8월 24일 실시된 2차 지명에서 NC 다이노스에 2차 5라운드로 지명되었습니다.


아들 최우재가 프로로 진출하면서 광주광역시야구협회에 1,000만원을 기부했는데, 본인이 아들에게 권유했다고 합니다. 지명 순위가 높은 편이 아니어서 계약금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닌데 기부를 했다는 점에서 팬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공로로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상진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1997년 해태의 마지막 우승 당시 주전 포수로서 그와 함께 하기도 했으니, 누구보다도 그의 안타까운 이른 죽음에 슬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튜브 방송에서 정수근이 자기때문에 제일 많이 맞은 포수라고 최해식 선수를 언급했습니다. 당시 해태와 OB가 경기를 할 때 정수근이 계속 도루를 하니까 도루저지도 신경 쓰고, 그러면서 블로킹도 하다가 몇개 공 빠트렸는데 김응용 감독은 그걸 보자마자 바로 포수 교체 사인을 하고 교체되는 최해식을 코치들이 때렸다고 합니다. 다만 최해식도 당하기만 한게 아니라 본인도 인터뷰에서 정수근이 타석에 설 때 일부로 야지를 걸어 좋은 공 보내준다, 좋은 공 받아라. 하면서 투수에게 빈볼 사인을 내서 정수근을 맞춰버렸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모로 둘 다 현역시절 시합으로 많이 붙은 것이 기억에 남는 듯.


아들 최우재만이 아니라 조카 방건우도 야구선수 출신입니다. 동성고 출신 투수로, 2015년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2018년을 마지막으로 방츨되었습니다.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에서 선배인 김성한과 같이 출연하여 이전 편에서 탈모를 이유로 모자를 쓴 채로 방송을 했던 강태원을 디스 하며 최해식 본인은 가발을 착용한다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상당히 자연스럽다.


김응용 감독이 포수리드를 중시하는 바람에 경기를 지면 상당히 자주 갈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욱해서 감독에게 "아 씨! 거기까지만 해!"라고 짜증을 내자 당황했는지 "야...이 자식 또라이야! 또라이!" 라고 했다고. 그 뒤로 김응용 감독은 최해식 선수를 갈구지 않고 종이만 찢었다고...


이후로 김응용 감독이 대타를 최해식 선수 타석에 쓰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오기가 올랐는지 감독과 5만원 빵, 10만원 빵을 하는 일도 흔했다고. 물론 최해식의 통산 성적에서 볼 수 있듯이 못 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1995년 5월 27일 청주구장 원정경기에서 이상군을 상대로 2회에 쓰리런 홈런을 쳤는데, 김응용 감독은 이를 두고 "소가 뒷걸음 친 격."이라는 촌평을 남겼습니다. 그럴만한 것이 최해식은 그 시즌 1할대 타율과 2홈런을 쳤기 때문.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최해식은 이를 회고하면서 "그때는 상군이 형이 맛탱이가 갈 때였다."라고 했습니다.

 

이상으로 최해식 선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반응형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前 야구선수 박철우  (0) 2023.01.22
e스포츠 코치 곽나훈  (0) 2023.01.21
가수 신효범  (0) 2023.01.19
前 야구선수 장채근  (0) 2023.01.18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최용혁  (0) 2023.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