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야구코치 이광우

Talon 2024. 3. 14. 20:10

오늘 소개할 분은 바로~

이광우 코치님입니다~!

 

군산국민학교 - 군산중학교 - 군산상업고등학교 - 원광대학교
- 1984년 청룡기에서 군산상고가 우승할 때 최우수 선수도 그였으며, 청소년 대표로도 발탁되는 등 고교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초고교급 투수였던 그에게 서울의 유명 대학교들이 스카웃 제의를 했지만, 동기들과 지역 대학교 동반 진학으로 압력을 넣은 지도자와 학부모 때문에, 결국 고교 동기 8명을 데리고 원광대학교에 입학했는데, 함께 입학한 선수로는 정명원도 있습니다. 이광우 선수는 원광대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당대를 대표하는 아마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었으며, 대학 4년 내내 태극마크를 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최다투구이닝을 기록하고 캐나다전에서 1승을 올리는 등, 그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습니다.

1989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였습니다. 88올림픽 때문에 한해 더 아마추어로 발이 묶인 군산상고 1년 선배 조계현, 동기인 국가대표 언더핸드 이강철과 함께 국가대표 신인투수 3인방으로 꽤나 화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짠돌이 구단 해태로서는 파격적인 4,1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으며, 아마 시절 엄청난 명성을 떨친 선배 조계현의 3,500만원보다도 더 많은 액수를 지급했을 정도로 특급신인으로 기대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물론 조계현의 이름값은 이광우 선수나 이강철보다 높았지만, 고교시절부터 엄청난 혹사로 팔이 이미 망가져서 예전의 강속구를 못 던진다는 평가가 나왔고, 조계현의 연세대 재학시절 중 2, 3학년때는 아예 타자로 나올 때가 더 많아서 기대치가 많이 떨어져 있던 상황인 것을 감안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당대 최강팀에 선동열을 위시한 투수진도 풍족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뭘 해도 잘 풀린다는 부러움 섞인 시샘을 받았는데, 정작 구단 관계자들은 '거물급이 한꺼번에 3명이나 들어와서 계약금이 부담스럽다'는 배부른 소리를 해대서 욕을 먹기도.

당시 1차지명급 대졸 신인 계약금이 1,500~2,000만원선, 국가대표급 투수들도 3천만원에 근접하면 꽤 수준이 높은 선수에게나 지급하던 금액이었으며, 같은해 입단한 좌완특급 송진우가 당해 신인 최고 계약금 4,200만원을 받았으니, 이광우 선수는 완전히 무명이던 정명원과 함께 이야기될 차원의 선수가 아니었다는 증거.

다만 입단 동기인 이강철은 첫해부터 15승을 거두며 한희민의 뒤를 잇는 잠수함 투수로 각광을 받았고, 조계현도 우려를 딛고 비록 승수는 7승으로 적었지만 174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10위에 올라 이름값을 어느 정도 해낸 반면, 이광우 선수는 1989년 입단 초부터 발가락부상, 어깨부상 등이 연이어 발생하는 고초 끝에 22게임에 등판, 5승 4패,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여 명성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에도 자잘한 부상으로 인해 투구 밸런스가 무너지며 부진은 계속되었고, 결국 세 시즌 동안 8승 12패 3세이브의 초라한 성적으로 전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자신감을 잃은 이광우 선수는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1992년 박노준과 맞트레이드 상대가 되어 OB 베어스로 이적했습니다.

1992년 OB 베어스에 입단하였습니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의 주동자 중 비교적 오래 활동했으나 2001년에 5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부진해 시즌 후 방출됐습니다.

2002년 LG 트윈스에 입단하였습니다. 팀의 3번째 우승 이후 조계현과 최훈재 등 노장들을 정리하던 분위기에서 이광우 선수도 은퇴하고 구단 스카우트로 진로를 결정한 상태였는데 이 당시 LG 감독이던 김성근의 노장 수집으로 LG에서 1년 더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LG 킬러 이광우 선수가 LG로 갔으니 별반 기대는 없던 상황이었는데, 역시나 김민기, 장문석, 이동현, 최향남, 신윤호 등 쓸 놈만 쓰는 분위기에서 37세가 된 그가 나올 일은 거의 없고 4경기 등판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현역 시절엔 쓰리쿼터 투구폼으로 패스트볼-슬라이더의 투피치 투수로, 주로 미들맨과 임시 선발을 오고가던, 돋보이진 않지만 소속팀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했던 투수였습니다. 포크볼을 던지기 위해 검지와 중지 사이를 5mm가량 찢는 수술을 감행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수술 부위가 아물어서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2003년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의 코치로 선임되어 2007년까지 잔류군 투수코치를 맡았습니다. 2007 시즌 중 재활코치로 보직이 변경됐고, 2009 시즌 후 김종모 수석코치와 같이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두산 베어스 등에서 코치로 활동했습니다.

 

이상으로 이광우 코치님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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